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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우선 May 29. 2024

세상의 끝에 닿다
-피니스테레, 묵시아


오늘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서 90km 떨어진

작은 어촌 마을 피니스테레와 묵시아에 가는 날이다.


아직까지 잠자리가 편치 못한 거 같다.

숙면에 들지 못하고 뒤척거리다 나름 조심스럽게 일어났는데도 

결국 친구들을 다 깨운 모양새다.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함께 숙소를 나온다.

또 비다.

벌써 일주일째 비를 만났고 

앞으로도 일주일 정도는 계속 비가 올 것이라고 하니 우기가 일찍 찾아온 듯 하다.


정시에 버스투어 장소에 도착한다.

어제 미리 길을 익혀 놓은 덕이다.

이것도 요령인가?

슬슬 이 생활에 적응해 가는 내 모습이 대견스럽다.


출석 확인 후 버스가 출발한다.

가이드의 친절한 안내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연신 귀에 들어온다.

그는 오늘의 일정과 슬쩍 스쳐 지나가는 마을과 다리

그리고 바위와 산 등에 대해서도 열심히 알려준다.


산티아고 시내를 벗어나니 비로소 눈부신 햇살과 양 떼 같은 구름이 

언제 비가 왔냐는 듯 군데군데 하늘에 널려 습기에 찬 기운을 데워 준다.

무지개도 보인다.

그것도 쌍무지개다.

그 쌍무지개가 마을과 마을을 이어 준다.






버스 차창 저편으로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대서양이다.

달리던 버스가 멈춘 곳은 해안가 마을 '프에블로 데 무로스'(PUEBLO DE MUROS).

닻을 내린 채 촘촘히 어깨를 나란히 한 요트들이 잔물결에 따라 조금씩 흔들린다.

한 폭의 그림이다.

아스파라거스 잎을 닮은 가로수 길을 걸으며

여유롭게 선착장 주변을 돌아본다.


댐에서 흘러 내보내는 물로 만들어졌다는

카스카다 데 에사로(CASCADA DE EZARO) 폭포,

‘공사 중’이라는 표지판 때문에 접근할 수 없어 아쉽지만

그래도 주변 풍광과 나이 많이 든 큰 나무 아래 앉아

따사한 햇빛을 맞으면서 오랜만에 길지 않은 휴식을 취한다.


버스 출발 시간에 맞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한참을 달려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 전 그들의 땅끝마을이었던

카보 피니스테레(CABO FISTERRA)에 도착한다.



0.00km를 알리는 마일스톤 옆에는

기념촬영을 하려는 사람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다.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과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바다가

조용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 준다.



처음에는 그랬었다.

내가 만약 걸어서 이 산티아고 순례 여정을 온전히 마칠 수 있다면

신었던 낡아진 내 등산화를

이베리아반도 서쪽 끝 바위에 올려놓고

부근의 이름 모를 들꽃 한 송이를 찾아서 꼭 꽂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낡은 등산화가 없어 야생화도 필요치 않은 지 다.

그러고는 내 여정을 담은 저널 북을 가슴에 낀 채 바다를 바라본다.


잔잔한 물결 위로 퇴직 후의 3년이란 시간이 어리며 지나간다.

하루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않고 

나름 일기 쓰듯 보내려 다짐했던 나날들이 과연 예정했던 대로 지나갔나?

그림을 매개로 책과 음악을 믹스하려 했던 나의 시도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가?

도대체 이 나이에 벌이는 실험정신이라는 게 무슨 의미일까?

바보!

그렇더라도 나의 어릴 적  '나'에게 씁쓸한 하지만 대견한 미소를 보내 본다.


갑자기 사위가 어두워지는 거 같다.

어두운 바다 위의 등대 불빛처럼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내게 위로가 돼주던 팝뮤직 가사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My mother, God rest her soul

couldn't understand

:

:

and when she passed away

I cried and cried all day

Along again, naturally

Along again, naturally


혹시나 저 바다 끝 어디쯤 계실 거 같은 

사랑하는 엄마에게 했던 이제는 공허해진 약속.

퇴직하면 꼭 같이 떠나려 했던 그 바람과는 달리

여기 이렇게 홀로 와 있다는,

그 죄스러움이, 아쉬움이, 한스러움이 몰려온다.

많이 외롭다.


뭔가 위안을 받으러 온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짧은 여정의 끝을 여기서나마 저 바다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다.

수행자의 심정으로 걸으려 했던 이 여정.

결국은 다시 혼자라는 느낌이다.

자연스럽게....



시계를 본다.

또 다른 세상의 끝인 묵시아(MUXIA)로 출발할 시간이다.

파리로 가는 비행기에 오른 날 

앞좌석에 붙은 모니터로 영화 <The Way>를 봤다.

피레네 산맥 인근에서 아들을 잃은 후, 

아들의 유해와 함께 순례길을 완주하고

유해를 바다에 뿌린 곳이 바로 묵시아라는 내용이다.

영화 한 장면을 생각하면서 묵시아에 닿아 있는 마음

바위에 부딪쳐 하얀 포말로 퍼져가는 바다와 

날려버릴 기세의 바람 속에서 

영화 속 아버지의 마음을 만난다.


버스투어의 마지막 일정이다.

폰테 마세이라(PONTEMACEIRA) 마을에서

14세기에 만들어졌다는 돌로 만들어진 다리를 건넌다.

지금도 물레방아로 밀을 찧는다는 제분소가 있는 갈리시아 마을로 들어선다.

간간이 배낭을 메고 설렘과 기대가 가득 찬 표정의 순례자들을 지나친다.


동생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옥수수 저장 창고 '오레오 데 카르노타(HORREO DE CARNOTA)'를 볼 수 없음이 너무 아쉽다.


또 다른 하루가 지나고 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숱한 나날 중 단 하루였지만,

나에게는 정말이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하루였다.


버스는 천천히 산티아고로 들어선다.

여지없이 차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다시 내가 산티아고로 돌아왔음을 알려준다.

그래도 좋다.

비가 왔었거나 해가 떴었거나 이미 지난날이다.

아직 나에게는 포르투갈 일정이 남아 있다.

그 일정들은 확신건데 스페인에서의 글루미함보다는 

분명 행복한 나날일 것이다.


그리고 이 스페인에서의 여정이 담긴 한 권의 저널 북이 

이 여행의 의미를 더 값어치 있게 해 줄 것이다. 

왜냐고?

난 두세 배로 더 행복해야만 하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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