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습니다. 바람결 따라 부딪치며 내는 빗소리는 요란해서 겁이 덜컥 나기도 합니다. 오래전부터 책상에 앉아 있지만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깊은 밤에 마신 커피 때문인지 머릿속은 은화처럼 밝고 맑습니다. 한 가지 생각에 골똘하고 싶은데 생각들이 앞서왔다 달아나곤 합니다. 글을 써야 하는 지금 질서 없는 생각 속에서 방향을 잡아 봅니다.
소소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멀리 또는 가까운 곳을 여행하고 찍어 온 사진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지금은 여행을 자주 할 수 없어 주변에서 얻는 소재로 그림을 그리는 소위 어반을 즐기고 있습니다. 퇴직 후 그렇게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길 햇수로 3년째, 요즘은 그림 그리는 일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림 그리기 이전의 십여 년은 꾸준히 도보여행하였습니다. 퇴직 직전까지 휴일이 되면 배낭에 무거운 카메라를 챙겨 집을 나서는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주어진 것만 보고 주어진 대로 살던 시간을 과감하게 떨쳐내고 나설 때 오감이 활짝 열리는 듯했습니다. 사계를 체험할 수 있는 걷기, 따갑게 내리쬐는 땡볕 아래서도, 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비바람이나 눈보라 속에서는 경이로운 자연과 마주했습니다. 비를 피하고자 잠시 서 있던 시골집 지붕을 두드리며 떨어지는 빗소리에 마음이 사로잡히기도, 얼어오는 손가락을 호호 불며 자연을 담아 보려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의 경쾌한 소리와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걸었던 나의 걸음은 낙동강이 시작하는 태백 황지에서 바다와 만나는 부산 을숙도까지를 시작으로 한강, 금강, 영산강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나라 해안선 따라 걷기’는 걷다 보니 동해는 ‘해파랑길’ 남해는 ‘바래길’ 서해는 ‘서해랑길’이라 이름 붙여지는 시기와 함께 했습니다. 관동대로, 영남대로, 휴전선 155마일, 외씨버선길···. 퇴직과 동시에 걸으려 했던 ‘산티아고 순례길’은 코로나-19로 시도조차 못하고 있던 차에 지난 10월에 호기롭게 여자셋이 출발하였으나 걷기엔 역부족인 친구들을 위해 버스타고 산티아고 길을 거쳐 포르투갈에서 40여일의 시간을 보내고 왔습니다. 이제 자아를 확산시키며 생동감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산으로 강으로 내몰았던 자신을 차분히 가라앉힐 시간입니다.
괴테는 말했다죠. ‘꿈을 품고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을 시작하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용기 속에 당신의 천재성과 능력, 그리고 기적이 모두 숨어 있다.’ 라고.
이제 제 소망은 나의 이름의 책을 내보고 싶은 꿈으로 내닫고 있습니다.
근래에 네 명의 친구와 삼남 대로를 완보했습니다. 서울 남대문에서 시작하여 전라남도 해남의 땅끝마을까지 1,000리 길을 걸으며 도반들과 겪은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과연 책으로 엮어질지 쉬운 일이 아닐 테지만, 나무 하나, 풀 한 포기, 구름, 물, 다리 논, 밭, 구릉들이 예사롭지 않았던 시간을 그림과 글로 녹아낸 책이 만들어지면 더 없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생각만으로도 나를 꿈꾸게 하는 요즘입니다. 꿈은 꾸는 사람의 몫이니 오늘도 한껏 꿈을 꾸겠습니다.
논산 노성면을 걷는 반사경 속의 도반들
39년의 직장 생활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오롯이 나만의 인생살이를 시작하고 있는 지금, 퇴직 후 걱정했던 혼란스러움은 이제 더 이상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일상에 정착하게 해 준 글과 그림으로 알게 된 그림 친구들과 글 친구들이 제 새로운 세상입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결국 풍경이 아닌 시간의 결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그림도 내 글도 풍성해질 것입니다. 또한 삶이 권태와 무기력함으로 힘들어질 때 지난한 삶을 배낭에 담아 연필과 노트 카메라를 챙겨 길을 나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