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나의 연결 다리 : 엄마

부모의 유년시절

by 정인

사람은 아무리 자기 객관화를 하려 노력해도 한계가 있다.

남이 나를 바라보는 것과 완전히 같을 수 없기에 내가 생각하는 나의 장점이 단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장점이 될 수도 있다.


무뚝뚝하고 과묵한 아빠였다.


부모가 자주 다투는 모습을 보여줬고, 거친 사랑의 매도 맞았지만, 우리들은 가족 대화 시간을 가졌다. 계획적인 시간은 아니었다. 보통 5명의 식구 중 다툼이 발발하면 자연스럽게 대화도 시작되었다. 가장답게 아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보통은 “언니가 이런 게 아빠한테 그동안 불만이었다는데, 너희도 아빠한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봐.” 식의 질문이었다. 가장 어리고 순수하던 내게 눈에 들어온 건, 아빠의 침묵이었다.

모두가 말하는 가운데 아빠는 자신의 속사정을 우리에게 내비치지 않았다. 서글펐다. 또래 친구들과의 우정이 인생에서 가장 큰 걱정과 고민거리이던 나이였다. 친구들과 마치 정해진 규칙이 있는 것처럼 서로의 아픔이나 비밀을 공유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아빠는 우리의 아픔과 비밀만을 가지고 갔다. 그게 슬펐다.

가장 어리고 순수해서 솔직할 수 있었나? 엉엉 목 놓아 울며 아빠에게 물었다.


“왜 아빠는 힘든 것들을 말하지 않아? 가족한테 터놓아야지!”

작은 웃음과 함께 알았다며 말을 해주었지만, 그 이후로 여전히 다른 가족 구성원만큼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빠는 과묵한 사람, 무거운 사람, 비밀이 많은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사춘기 시절 아빠와 겪은 크고 작은 갈등을 통해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20대 중반이 될 때까지 변함없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나기 전까지.

가족 여행을 가거나 대화가 시작되면 왜인지 모를 불편함을 가지고 해결되지 않을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불편함까지 익숙해지던 시기, 생각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것은 남자 친구와 가정사를 터놓기 시작한 후였다.

서로 비슷한 가정환경을 가지고 있었고, 공통분모도 많아서 이야기가 잘 맞았다. 그리고 연애 기간이 길어질수록 감추고 싶지만 감추어지지 않는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남자 친구에게 미안하지만, 우리 아빠보다 더 과묵한 (우리 아빠는 과묵한 게 아니었구나 싶을 만큼) 남자 친구의 아버님의 성향을 전해 들을 때면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크게 두 가지의 생각이었는데, 하나는 ‘다른 가족 구성원들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다른 하나는 ‘그렇지만, 남자 친구는 아버님의 성향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닐까?’였다.

나는 2번째 궁금증에서 멈추어 섰다. ‘나는 우리 아빠의 침묵이 어쩔 수 없는 가정환경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것을 왜 인지하고 있을까?


엄마의 중간 다리 역할이었다.


엄마 아빠 사이의 잦은 다툼이 있었지만, 엄마는 아빠에게 연민의 감정도 가지고 있었다.

우리 엄마 역시 남아선호사상을 가진 엄마 밑에서 자랐지만, 그 외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특히 첫째라는 이유로 남동생들 앞에서 기를 살려주는 든든한 아빠가 있었다며 나에게 자주 말해주고는 했었다. 그런 엄마의 눈에 아빠는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른 밑에서 혼자 아등바등 살려고 애쓰는 작은 아이처럼 보였던 것이다.


자아가 비대해지며 아빠와 첨예한 갈등을 겪던 시기, 나에게 엄마는 위로보다 ‘이해를 좀 해줘.’라는 말을 많이 했다.


불편한 엄마와 노름에 빠진 아빠는 나의 아빠의 성장 과정에 적극적이지 못했다고 들었다.

요즘에서야 과열된 부모의 욕심이 자식을 망친다는 걱정이 있지만, 우리 아빠만 보더라도 오히려 부모가 자식의 교육에 너무나 무지했고, 무관심했다.


우리 아빠는 공부를 잘하고 좋아했다고 했다.

하지만 시골에서 태어난 아빠에게 고등학교 선택의 폭은 너무 비좁았다. 그대로 시골에 있는 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된다면, 공부를 제대로 배우지 못할 것이라 판단한 아빠는 가까운 지역에 인문 고등학교를 신청했고 합격했다.

하지만, 지금도 차로 40분이 걸리는 그 거리는 40년 전, 아무리 일찍 일어나 버스를 타도 지각하기 일쑤였다. 교사의 권위가 강하던 그 시절 아빠는 매일 같이 맞았다고 했다. 결국 견디다 못해 본가가 있는 시골 학교로 전학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렇게 첫 번째 좌절 후, 열심히 공부를 했던 아빠에게 찾아온 두 번째 죄절은 대학교 진학이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도 명성 높은 지방 거점 국립 대학교였다. 아빠의 성적은 들어가기 충분했지만, 당시 등록금을 낼 부모가 없었다. 그래서 포기하고 다른 사립대학교를 선택하게 됐다고 들었다. 처음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너무 비통했다. 아빠가 갈 수 있던 대학과 차선책으로 진학한 대학교의 차이는 극명했다. 나의 수험생 생활 동안도 차이가 극명한 대학이었기에 비통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그것보다 더 안타까운 건, 그 이후였다. 아빠 밑으로 나이 터울이 큰 남동생 (작은 아빠)가 있었고, 큰 나이 차 때문인지 그 사이 할아버지는 농사를 시작해 큰 수입이 생겼다.

아빠와 같은 대학교를 합격한 작은 아빠는 무사히 등록금을 수납하고 해당 대학교를 진학 후 대학원까지 나와 박사가 되었다. 참 아이러니하고 분통했다.

자식인 나도 안쓰러운 아빠의 유년 시절이 아빠 본인에게는 어땠을까?

엄마는 그렇게 아빠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무관심한 부모 밑에서 감정을 공유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이라고,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너도 아빠를 이해해 달라고.

10대 시절에는 공감과 이해의 영역으로 생각지 못했다. 가끔은 아빠의 험담을 하는 엄마를 보며, ‘아빠한테 직접 듣지 않았으니까, 엄마 말만 듣고 엄마 편을 들 수 없어.’ 라며, 엄마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엄마가 우리에게 이해를 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 그냥 대화를 좋아하니까.라고 생각했다.


남자 친구는 과묵한 아버지와 중간 다리 역할을 해주지 못한 어머니 밑에서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이해의 역할을 내가 돕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부모가 이해되지 않을 때, 그 사람들의 어린 시절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말을 했다.

어느 순간 나의 엄마처럼 남자 친구에게 갈등의 골이 깊어지지 않도록 말하는 나 자신을 보며, 엄마의 역할이 중요했구나. 새삼 깨달았다.

엄마에게 고마웠다.


우리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엄마는 간혹 아빠와 우리 사이에서 너무 힘들다는 말을 했었는데, 그 조차도 ‘왜 혼자 고생을 할까.’ 생각만 했던 내가 참 어렸구나 싶다.

엄마는 아빠와 나의 관계성을 지금까지 유지해 준 연결 다리였다는 걸.

아빠가 하지 못하면, 엄마가 해줘야 한다는 걸.

그것이 가정을 이룬 부모의 역할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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