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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born 민주 Aug 01. 2023

그땐 왜 몰랐을까?

우리 집에서 시청 앞 회사까지 가는 길은 많다.

그중 난 정릉에서 성북동을 지나 삼청동으로 내려오는 길을 좋아한다.

산을 두르며 구불구불 이어진 도로는 출근길을 멋진 드라이브 코스로 만들어 준다.

길에 줄지어 선 나무들은 한 발 앞서 계절을 알려준다.

집에서 출발할 땐 어두웠던 세상이 내가 움직이면서 점차 환해지기 시작한다.

웬만한 초등학교 정문만 한 대문을 가진 성북동의 저택들을 지나고,

삼청동 미술관이며 크고 작은 이쁜 카페와 점포들을 지나간다.

아직은 모두가 잠에서 깨기 전처럼 고요하다.

그렇게 하루가 시작되지 않은 그 길을 지날 때면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걷는 느낌이다.



사실 그 길이 좋아진 건 2년 전부터이다.


늘 같은 길로 출근을 하고 있지만 그 길이 좋아진 건 2년 전부터이다.

나는 3년 전 림프암 4기 진단으로 한순간에 나의 모든 일상이 중지된 적이 있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새벽 5시에 시작된 나의 하루는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곤 했었다.

영업을 하다 보니 밥 먹는 시간, 자는 시간을 제대로 지키는 게 쉽지 않았다.

주마다 월마다 마감에 마감을 거듭하다 보면 가족을 챙기거나 계절을 느끼는 것도 사실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지금의 회사에서 10년을 달려왔다.

지금 생각하면 한없이 미련한 시간이었지만 그때는 나의 건강보다 중요한 게 더 많았었다.

아니 건강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내가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내 몸을 갈아서 이루고 누린 모든 것들에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건강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알게 됐다.


2020년 5월,
나는 하루아침에 내일을 알 수 없는 암환자가 됐고 꼬
박 1년을 투병했다.

아프기 전에는 그저 일상으로 지나쳤던 모든 시간들이 간절히 그리워졌다.

그리고 그렇게 놓쳐버린 일상들을 다시 누리기까지 1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땐 다시 누릴 수 있을 거란 확신도 할 수 없었다.

그날이 그날 같아 무료하기도 하고 늘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아서 지치기도 했던 시간들을 다시 찾기까지 난 죽을힘을 다해야 했다.



왜 그땐 몰랐을까?


깜깜한 새벽 출근길에 환해지는 아침

골프장 카트에서 마시는 믹스커피 한잔

조카들과 마트 나들이

속눈썹에 마스카라 하기

노래방에서 뛰어놀기

친구들과 깔맞춤 사진 찍기

계란 2개 푼 콩나물 해장국

주말 가족들과 식사 나들이

맛있는 베이커리 카페

이밖에도 수없이 많은 소소한 것들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행복은 아니었다.

신기한 건 아프고 나서 그전에 내가 행복이라고 믿었던 많은 것들.

돈을 많이 벌거나 큰 성과가 있거나 이런 날들은 그립지도 생각나지도 않았었다.

그런 거 보면 사람이 진짜 어리석다는 말이 맞다.

무엇이 행복인지도 모르고 평생을 살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행복이 뭔지도 모르면서 행복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살아간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잃어버리기 전에 볼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란 생각도 했지만 인생 절반쯤에라도 알았음이 큰 행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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