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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born 민주 Oct 08. 2023

공포를 이기는 고통

넘어져야 보이는 세상이 있었습니다 #7

30대 가슴이 너무 뜨겁고 꿈이 현실보다 클 때가 있었다.

무식해서 용감할 때 사업을 하겠다고 중국을 갔고 처음 석 달은 시장조사로 정신이 없었다

그날도 상해에서 천진으로 가는데 기차시간이 빠듯했다. 기차를 놓치면 기차표도 날리고 숙박비도 들어야 했다.

돈도 시간도 빠듯했기에 늘 뛰어다녔었다.

그러다 그날은 넘어지며 도로에 얼굴을 갈고 이마가 찢어졌었다.

이마에 피가 솟구쳤지만 기차시간 때문에 약국에서 응급처치만 하고 기차를 탔다.

열몇 시간을 달려 천진에 도착해서 의원을 갔지만 의사는 벌어진 채로 굳은 이마는 봉합해도 흉터가 꾀 남는다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봉합 내내 울었었다.

아파서가 아니라 기차표값 안 날리려고 평생 내 얼굴에 흉을 남긴 상황이 서러웠다.

위로해 주는 가족도 친구도 없었던 외로움이 서러움을 증폭시켜 참고 있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서른네 살 때 자궁각 임신으로 5시간이 넘는 큰 수술을 했을 때도 아이를 놓친 아픔과 그때의 상황이 서러워 울었었다.

내가 기억하는 내 인생에서 진짜 몸이 아픈 고통으로 울었던 적은 없었다.

무언가 참고 있던 눈물이 그득할 때 몸이 아프면서 서러움에 밀려 터져 나오는 거였다.

하지만 항암은 달랐다. 정말 너무 아프고 괴로워서 울음이 터졌다.

다른 감정을 찾아 꺼내올 수도 없이 그냥 아파서 울었다.

그렇게 여섯 번을 안간힘을 다해 버텨냈다..


항암이 이토록 고통스러운 건 어쩌면 삶에 대한 애착을 좀 내려놓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조금은 줄여주기 위해서란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누구나 막연하게 언젠가는 나도 죽겠지란 생각을 하는 것과 진짜로 내가 곧 죽을 수도 있는 일이 내 앞에 벌어진 건 너무나 다른 일이었다.

6번의 항암을 기간 내에 완주하고 컨디션이 좋지는 않았지만 곧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설렘으로 최종 검진날을 기다릴 때였다.

오른쪽 엉덩이의 통증이 시작됐다. 처음엔 담이 결린 거 같았지만 곧 발을 내디딜 수조차 없는 통증에 다시 난 쫄보가 되었다.

처음에 암진단을 받았을 때도 갈비뼈 아래가 담이 결린 듯 시작 됐었다.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공포가 밀려왔다.

공포는 어느새 나를 뒤덮었고 나 때문에 일도 줄이고 병간호를 하는 동생 앞에서

항암을 또 받느니 안 받고 죽겠다며 소리 내어 울어댔다.

이젠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항암을 받아야 한다면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항암의 고통은 죽음의 공포를 누를 수도 있었다.


급하게 응급실로 들어가 찍은 CT를 본 의사는 전이일 수도 있다면서 MRI를 찍자 했다. 그리고 다음날 검사 결과를 듣기 전까지 수없이 많은 생각과 쉼 없이 눈물이 흘렀다.

다행히 영상소견은 "전이로는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게 약해져 있다 보니 디스크가 터져서 아픈 거 같다"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서야 제대로 숨이 쉬어졌다.

디스크 시술을 받고 열흘 후 최종 검사 때 PET CT의 결과도 좋았지만 의사는 다지기 항암이라며 두 번을 더 받자 했다.

그 말을 듣고 난 속이 울렁거리고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다지기란 의사의 말은 꽤나 달콤한 유혹이 되어 바닥나 있던 의지를 끌어냈다.

그리고 두 번의 항암은 또다시 나를 괴로움에 울게 했지만 결국은 이겨냈다.

살면서 아파서 우는 일은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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