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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born 민주 Apr 12. 2023

더 많은 기억들이 추억이 되기를~

“어머 그림 멋지다~새로 샀어?”

아주 친한 언니의 집에 놀러 갔을 때 내가 물었다.

언니는 상냥하게 웃으며 답한다.

“3년째 걸려있던 거야~~”

나도 “아... 그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웃고 만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진짜 오랜만에 놀러 갔나 보다 생각했겠지만 주구장창 놀러 가는 베프의 집이다.


“소파 샀네?”

“있던 거야~”


“여기 진짜 맛있다”

“우리 여기 왔던 데야~”


나를 좀 잘 아는 사람들은 나의 이런 뜬금포 말에도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고 설명해 준다.

또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어쩜 그렇게 기억을 못 하지?~”란 말을 꾀나 오랜동안 하다가 적응이 된다.     




난 심각하게 기억을 하지 못한다.


매일 다니는 출근길도 1년 이상은 티맵을 켜고 다녀야 하는 길치에 방향치이다.

길치라고 해서 다 기억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난 모든 걸 잘 기억하지 못한다.

열 번 이상을 다니는 골프장 코스도 매번 처음 치는 느낌이고 심지어 드라마도 지난주 내용이 잘 기억이 나질 않아 같이 보는 동생을 귀찮게 한다.

한때는 심각하게 치매를 걱정하기도 했지만, 내가 이렇게 기억을 못 하는 데는 여러 가지 합리적 이유들이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있다.


난 열여덟에 만난 사람과 12년의 연애 끝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결혼생활 6년째에 자궁각임신으로 5시간을 넘는 큰 수술을 받고 아이를 포기하기까지 난 여러 가지 상황과 이유들로 여섯 번의 유산을 경험하였다. 아이를 낳지는 못했지만 일곱 번의 전신마취와 그때마다 밀려오는 감정들로 나를 지키고 합리화하기 위해 어쩌면 전략적 망각을 선택했던 것 같다.


그런 전략이 지금 생각해 보면 나를 위해서는 굉장히 훌륭한 전략이었다고 생각한다.

기억을 못 해서 불편한 것도 많지만 기억을 못 해서 살 수 있는 게 더 많지 않았을까?

어쩌면 저절로 쌓이는 기억들을 나는 선별해서 남기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란 생각도 든다.

나한테 상처가 된다거나 힘든 사건들이나 말들은 그 당시 아픈 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지만 나의 기억에 저장되어 곱씹으며 상처가 되는 걸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결과로만 본다면, 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들한테는 평범할 수도 있는 많은 것들을 실패했다.

결혼도, 아이도, 사업도. 그리고 결국 건강까지도 잃어버리는 실패를 겪었고 그런 쉽지 않은 시간들을 지나면서 고스란히 쌓이는 상처들과 나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칼날 같은 말들을 그대로 나의 기억에 꽂아놨었다면 난 다시 일어나서 달리기가 어려웠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기억을 지우려 애를 썼다기보단 신기하게 그냥 기억으로 남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진해지는 아름다운 추억이기를


하지만 좋았던 일 행복했던 특별한 시간들은 나의 기억에 오래 남아 지우려고 애를 써본 경험도 있는 걸 보면 난 기억력이 없다기보단 나를 방어하는 본능적인 능력이 뛰어난 게 아닐까?

나뿐 아니라 인간은 누구라도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기억을 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체력이라면 망각은 길러지는 체력이란 생각이 든다.


엄마들이 아이를 낳을 때의 고통이 너무 커서 다시는 아이를 안 낳는다 해도, 그 아이가 주는 행복이 너무 커서 출산의 고통을 망각하는 것처럼 사람은 아픈 기억은 흐려지고 행복한 기억은 진해지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기억이라는 건 단순한 텍스트나 화면이 저장되는 게 아니라 그 시간에 나의 감정과 마음이 담겨있기에 행복한 기억은 추억으로 남고 그 한 장의 추억은 평생을 가기도 한다. 나에게도 물론 그런 추억들이 있다. 어떤 추억은 지나고 보면 기억보다 더 아련한 아픔을 만들어 내지만 그렇다고 지우려 애를 쓰거나 뜨문이 찾아오는 아픔 때문에 망각하고 싶진 않다.


나는 앞으로도 많은 걸 기억하지 못하고 살아가겠지만 그래도 나의 시간 시간에 의미 있는 추억들을 많이 남기며 살고 싶다란 생각을 해본다.

나와의 모든 시간이 누군가에겐 시간이 갈수록 진해지는 아름다운 추억이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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