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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Jan 25. 2023

다진마늘에 담긴 피땀눈물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노동의 산물임을 자각하고 늘 감사해야 한다.

 한달에 한 번, 친정에 다녀오는 내 손엔 늘 판판하게 펴서 얼려진 다진 마늘 두어개가 들려있다. 다진마늘 뿐이랴. 참기름,들기름, 쌀 등등. 이번엔 직접 쑨 도토리묵까지.. 명절지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준중형차 트렁크가 택배를 가득 실은 트럭처럼 친정에서 뽑아온 살림으로 가득찼다. 그렇게 한달에 한 번 나는 구석구석 친정 살림을 쏙쏙 뽑아오는 도굴꾼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얄미운 딸이다.

일일이 마늘까고 직접 빻은 다진 마늘, 마트에서 비싼 이유가 있다.


 머쓱해진 내가 "엄마아빠 드셔, 우리 조금만 주면 돼"라고 한사코 거절하면 엄마는 "늘 집에 많다, 우리는 시간이 많으니 또 하면된다"라는 말들로 부담을 덜어주며 바리바리 싸보낸다. 두 아이 육아에 늘 부족한 시간에 허덕이는 나는 엄마의 말에 못이기는 척 그것들을 받아들고 온다. 냉장고에 쌓여가는 반찬들, 냉동고에 무지개떡처럼 켜켜이 쌓인 다진마늘을 보며 나는 집에 올라가기 전 언뜻 스쳐본 엄마의 발갛게 부르튼 손을 떠올렸다.

 이번 명절엔 두 동생들 포함 우리 네식구까지 얹혀져 엄마의 손엔 물마를 새가 없었다. 그뿐이랴, 장남인 아버지로 인해 명절 제사음식을 하느라 허리에 파스까지 붙이고 계실 정도로 엄마의 명절 노동은 상당했다. 다행히 팔순이 훌쩍 넘으신 할머니께서 다음 추석에는 차례를 지내지 말자라고 선언하신 바람에 엄마의 명절 제사음식 노동은 늦은 은퇴를 했다. 안타깝게도 건건이 돌아오는 제사준비에선 은퇴가 언제일지는 불확실하다.

 철없던 어린 시절 설날,추석이 되면 나는 괜스레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외벌이 살림에 늘 먹을 것이 부족했던 우리 삼남매는 우리집이 큰집이라는 사실이 마냥 기쁘기만 했다. 큰집이라는 것은 즉 제사를 지내는 집이고 제사를 지내야 했기에 제사음식도 우리 차지였으니 기름냄새 가득한 전, 떡 등이 집안에 한가득이었기 때문이다.  장남 며느리로서 손이 부르트도록 음식을 홀로 해야 했을 엄마의 짠눈물은 꿈에도 모른채 말이다.

 명절 전날이 되면 3평 남짓한 좁은 부엌은 갖가지 전재료와 생선들이 즐비했다. 장남에게 시집온 업보로 엄마는 늘 일년에 최소 두번 이상을 밀가루 뒤집어쓰고 온몸에 향수대신 눅진한 기름냄새를 밴채 명절음식 준비를 홀로 감내해야 했다.

 그 당시 엄마 혼자 하는 수고를 덜어주겠다며 팔을 걷어붙인 우리 삼남매에게 주어진 첫 역할은 바로, 엄마가 밑작업을 마친 전에 밀가루 묻히고 털어내기 였다. 엄마에게서 지시가 떨어지면, 우리는 뭔가 큰 도움을 주는 양 어깨가 귀에 걸린 채 코에 밀가루를 묻혀가며 신나게 작업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에겐 그저 재미로만 느꼈기에 장난치다 밀가루를 바닥에 엎어 엄마의 가재미 눈을 여러번 목도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런 우리의 역할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진화해갔다.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엔 꼬치에 재료끼우기,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넘어갈 무렵엔 계란옷입혀 직접 기름에 전을 붙이는 최고 수준까지 갔다. 큰집 세남매라는 업보로 우리는 전부치기 최전선을 경험하며 커왔다. 하지만 우리의 역할은 엑스트라 정도의 수준이었을 뿐 모든 지휘와 감독은 엄마의 차지였다.

 그 이후엔 세 남매 모두가 흩어져 제갈길을 가는 바람에 우리는 그 작은 노동에서 해방되었고 명절음식은 모두 엄마의 독차지였다. 해마다 맛보았던 기름냄새나는 고소한 전들은 묵묵히 홀로 행해온 엄마의 피땀어린 노동의 산물이었으리라. 명절마다 그 음식을 입으로 밀어넣으며 애써 그 고통을 외면해왔음에 이제서야 회한이 든다.

 환갑이 넘어도록 엄마는 음식 노동에서 여전히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명절을 제하고서라도 일년에 제사 4번, 그때마다 엄마는 제사음식을 혼자 다 차려내셨고 나는 분통이 터지는 목소리로 이제 음식 좀 사서 하라고 해도 "조상 잘 모시면 다 너희에게 돌아간다, 음식은 정성이지" 라며 옅은 웃음만 지으실 뿐이다.

 제사 뿐만 아니다. 작은 텃밭을 일구어 고구마, 방울토마토, 각종 채소등을 가꾸시느라 쉴틈이 없다. 파스를 붙여가며 고구마 몇 박스를 캐서 우리에게 꼬박 고구마 택배를 보내시고, 늘 내게 전화로 우리집 냉장고의 다진마늘, 고춧가루 안부를 묻는다. 딸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음에도 딸을 위한 엄마의 원격 가사노동은 계속 된다. 퇴근이 없고 정년이 없어 평생 몸을 가만두지 않는 환갑넘은 엄마의 고단한 삶의 자리에 잠시 나를 앉혀본다.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서야 알았다.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건 엄마의 무수한 가사와 돌봄노동 덕분이었음을.밥솥에 밥이 있는 것은 누군가가 쌀을 씻어 취사버튼을 누르는 노동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며, 냉동실에 가지런히 놓인 다진마늘도 손끝이 얼얼하도록 마늘을 까서 일일이 빻고 곱게 피는 엄마의 고단한 노역의 산물임을..

 명절 아침에 먹은 떡국도 쌀을 정성스레 농사지은 누군가의 손에서 떡집 사장님께 옮겨갔으며 또 떡국떡을 사기 위해 열심히 노동한 누군가의 손으로 옮겨와 먹을 수 있게 된 수많은 노동 집약체의 산물이었다. 우리가 먹는 모든 것들은 그렇게 모두의 노동이 합작을 이루어 만든 소중한 무언가이며, 먹거리를 통해 생면부지의 누군가와도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 재료를 손질할 때 좀 더 정성을 기울이고, 음식을 먹을 때 감사한 마음으로 먹어야 겠다는 무언의 다짐이 마음을 깊게 흔든다.

 연휴가 끝나고 이른 아침 된장찌개를 끓이며 당연스레 꺼낸 다진마늘을 보며 엄마의 발갛게 부르튼 손을 떠올린다. 작은 마늘 조각 하나 바닥에 떨어질까 염려하며 두손 그러모아 조심스레 찌개로 퐁당 넣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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