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 말이 돌고 돌아 다시 누군가에게로. 예쁜 말의 중요성
주말에 친정에 갔을 때의 일이다. 두어달만에 내려간 친정, 마침 그날은 엄마가 수년만에 참석한 동창회가 있는 날이었다. 주말에 홀로 남겨지신 아빠를 모시고 이른 저녁을 먹은 후 들른 카페. 그곳에서 예상치 못하게 어린시절 이웃에 살던 아주머니와 조우했다. 나의 유년시절을 꿰뚫고 계신 역사적인 인물과의 만남에 나는 잠시 어안이벙벙했다. 아주머니는 아빠와 나를 차례로 알아보시곤 해사하게 웃으며 말을 건네신다.
"아이고 오랜만이다. 벌써 애를 둘씩이나 낳고 대견하다. 아직 아줌마 눈엔 네 어린시절이 선명한데 말이다"
나는 반가움에 어쩔 줄 몰라하시는 아주머니께 웃음으로 답하며 말했다.
"아주머니는 진짜 하나도 안변하셨네요. 어린시절 뵈었던 모습 그대로예요."
나의 말에 아주머니는 눈가에 깊은 주름이 생기도록 활짝 웃으시며 손사래를치셨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아주머니의 얼굴에 핀 웃음꽃이 만개해 돌아서는 뒷 모습에서도 그 웃음꽃이 피어나는 그 순간을 말이다. 아주머니는 30대 후반 나이에 안타깝게 남편이 심장마비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두 아이를 홀로 힘으로 키우며 세찬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으셨던 안타까운 사연이 있으신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 모진 세월을 정통으로 비껴간 그 해사한 미소는 그대로셔서 괜스레 마음이 놓였다.
기분좋은 만남을 뒤로 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들어선 지 30분이 채 안되어 핫핑크 조끼에 털모자를 쓰고 양손에 동창회 기념품으로 보이는 물건과 남은 음식들을 한아름 든 엄마가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내셨다. 피로한 기색이었던 친정엄마는 오랜만에 본 두 아이를 보자마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남은 짐정리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시고는 친정아빠에게 오늘 동창회에서 있었던 일을 한 옥타브 높은 음으로 시시콜콜 늘어놓기 시작하셨다.
"내가 아팠던 이후로 십년만에 가서 다들 못알아봤는데 졸업하고 한 번도 못 본 00이가 그러더라. 어쩜 니는 하나도 안변했노. 고등학교 때 모습 그대로다."
엄마는 그 말이 듣기좋았던 지 나 여동생 남편 이렇게 상대를 바꿔가며 세 차례나 반복하셨다. 구름위로 둥실 떠오른 엄마를 땅에 내려놓기 싫었던 우리는 그때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세찬 동의를 표했다. 사실 엄마는 17년에 크게 아프신 이후 모든 모임에 일절 발걸음을 끊으실만큼 상태가 좋지 않으셨다. 무기력하고 힘없는 엄마의 눈을 볼 때 마다 가슴이 미어졌었기에 엄마가 동창회나 모임을 간다고 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수 년만에 간 동창회에서 최고의 칭찬샤워를 받고 온 엄마는 근래 본 엄마의 모습 중에 가장 화사하고 반짝였다. 다음날에도 엄마는 한 번 더 같은 말을 꺼내셨고 나는 그제서야 문득 어제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이웃 아주머니께 나도 같은 말을 건냈던 것. 갑자기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혹시 내가 한 말이 돌고 돌아 누군가의 입을 통해 엄마에게 전해진 것은 아닐까?
장소는 달랐지만 아주머니에게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게 한 그 한마디는 사라지지 않고 새의 날개처럼 날고 날아 엄마에게로 전해졌다는 생각이 들며 갑자기 온몸에 기분좋은 소름이 오소소 돋아난다.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 삼킬 수도 있던 그 말을 밖으로 꺼내놓은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날 밤, 아주머니와 엄마는 누군가에게 들은 "너 참 그대로야. 하나도 안변했어" 라는 말을 기분좋게 가슴에 품고 그 어느 때보다도 달디단 잠을 청하셨을테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를 기분좋게 하는 말들은 속으로 삼키지 말고 가능한 자주 많이 입밖으로 꺼내야겠다고 말이다. 삼킬 말과 꺼낼 말을 구분할 줄 아는 것. 나와 누군가의 인생을 향기롭게 만들 가장 중요한 능력 아닐까?
그날 동창회에서 들은 기분좋은 한마디로 삼십년쯤은 더 젊어보였던 우리 엄마에게도 그런 향기로운 말들을 만날 때마다 찾아내서 부지런히 해드려야지. 엄마 더더 젊어지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