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무언가를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책임감
내가 근무하는 지역은 매년 4회, 분기별로 한 번 수요일마다 각 지구별로 각 초등학교의 전교회장이 한데 모여 회의를 진행한다. 6학년 전교회장 부회장이 주로 참여하는 회의. 6학년 아이들에겐 일주일에 단 한 번 가뭄의 단비같은 5교시 수업날 회의를 간다는 건 맥이 빠지는 일이겠지만 학교를 대표하는 직책이 감당해야 하는 몫으로 생각하고 1학기에 열린 2번은 흔쾌히 잘 다녀왔더랬다. 하지만 2학기가 되서부턴 어쩐지 6학년 회장 부회장의 눈빛이 1학기와는 다르게 메마름과 시니컬함이 잔뜩 배어있었다.
보통 회의날 일주일 전부터 나는 아이들에게 그날은 중요한 회의날이니 꼭 스케쥴을 비워두라고 단단히 못을 박는다. 지난 10월 회의날에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서 전교회장 아이를 마주칠 때 마다 회의일정을 다시 한번 되새겨주며 잊지 않을 것을 당부했다. 회의 당일날. 전교회장 아이는 갑작스럽게 학원스케쥴로 인해 참여가 불가능하다며 발을 뺐다. 나는 일주일 전부터 예고한 일이기에 당일취소는 어려울 뿐더러 학교의 대표로 참가해야 하니 쉽게 여길 약속이 아니라며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그러자 아이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등떠밀리듯 나와 동행했었다.
그러다 오늘, 마지막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전교회장은 이미 수요일 스케쥴이 어렵다고 미리 알려둔 터라 전교회장을 대신해 6학년 전교부회장아이와 동행하기로 약속했었다. 늘 그랬듯 일주일 전에 회의스케쥴을 고지해주고 이틀 전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부회장 아이를 불러 약속에 대한 확인사살까지 마쳤다.
눈이 흩날리던 학교 현관. 마침 눈을 구경하러 내려온 듯한 그 부회장아이가 보여 반가운 마음에 아는 체를 하고 오늘 잊지 않았지? 라고 밝은 어투로 말을 건넨다. 그러자 갑자기 난처한 기색을 하며 부회장 아이는 조심스레 말을 잇는다. "저 오늘 컴퓨터 자격증 시험 공부 해야 해서 어려울 것 같아요" 갑작스레 훅 치고 들어온 예상치 못한 답변에 나는 잠시 얼어버렸다.
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게 무슨 소리냐며 되물었고 그리 쉽게 파기할 수 있는 약속이 아니라며 일축했다. 아이는 조심스레 입을 열어 5학년 부회장 아이를 데려가면 안되냐는 말을 허공에 대고 흩날린다. 분명히 일주일 전부터 미리 고지했고, 바로 전날 까지도 단단히 못박아둔 사실인데 손바닥 뒤집듯 쉽게 여기는 아이의 태도에 나는 속에서 화가 솟구쳐 올랐다.
오늘 당장 출장을 나가야해서 화를 낼 겨를도 없이 6학년 부회장 아이를 뒤로 하고 급한대로 5학년 교실로 황급히 뛰어올라가 5학년 부회장아이를 수소문했고 다행히 함께 동행하기로 약속을 받아내었다. 5학년 아이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자신이 그런 중대한 자리를 가도 되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깨를 살짝 어루만지며 갑작스런 요구에 응해줘서 고맙다며 수업 후 만나자는 인사를 하며 아이를 보냈다. 돌아서서 교실로 가는 아이의 발걸음은 뭔가 모르게 춤을 추는 듯 가벼워보였다.
나는 아까의 책임을 묻기 위해 6학년 부회장 아이를 교실로 다시 부른다.그리고 전교부회장의 책임에 대해 설파한다.
"3월에 공약하던 때를 떠올려봐. 학교를 대표해 어떤 어려움도 감수하겠다고 했던 네 공약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어. 친구들 후배들은 너의 그 공약을 믿고 소중한 한표를 내던진거야. 부회장이라는 직함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야. 그에 걸맞는 무게가 있어. 그 무게란 자신을 믿고 뽑아준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어려움을 감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해.
“너의 사정은 이해가 가지만 이렇게 갑자기 무자르듯 약속을 파기해버리는 건 옳지 않아. 미리 찾아와 얘기라도 했으면 선생님도 오늘처럼 당황하는 일은 없었을테고. 네가 가벼이 여긴 약속 덕분에 선생님은 오늘 아침 정신없이 뛰어다녔어. 그것도 알아주길 바래. 그리고 앞으론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 자리에 오르기 전 그에 맞는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길 바란다“
나직히 읊조린 어쩌면 인생의 충고와도 같은 나의 진지한 말에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알듯 말듯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 교실로 조용히 사라졌다.
책임감의 무게. 요즘 아이들은 권리만 주장하지 그에 따른 책임감은 거추장스러운 무언가로 취급하는 행태가 만연해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그에 걸맞는 책임감이 있다는 사실. 원하는 것의 무게가 무거울 수록 그에 걸맞는 책임감도 함께 무거워질 수 밖에 없다. 오늘 본 6학년 부회장의 행동에서 학교에서 공부도 인성도 중요하지만 책임감이라는 것 또한 조목조목 알려주고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친다.
오늘 회의에 데려간 5학년 부회장은 전교회장이 여태 한 번도 의견발표를 한 적이 없었는데 자신은 오늘 5번이나 손을 들고 5번째 만에 지목을 당해 “2학기 마무리를 잘하자”라는 의제에 대해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이 끝이 아니니 중학교와 먼 미래를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의견을 내고 왔단다. 아침에 느꼈던 실망감이 기대감으로 번지는 순간이었다. 아이가 낸 의견은 마치 오늘 6학년 전교부회장에게 날리는 어떤 조언과도 같았고.
두 시간 남짓의 회의를 끝나고 나오니 눈발은 더 거세어졌지만 내 마음엔 5학년 부회장의 책임감 있는 행동덕분에 포근한 눈송이가 쌓였던 오늘이었다.
아이야 너는 6학년이 되어도 오늘의 마음 변치 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