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마디도 그냥 지나치치 않는 아이들에게서 감동을 느끼다
누군가가 교사로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에 대해 불쑥 물어온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흘러가듯 던지는 내 한마디도 소중히 붙잡아 기록하고 기억하는 아이들을 만나는 순간이요”
나는 수다쟁이 선생님이다. 교과수업을 시작하기 전 아침마다 10분씩 내 경험담이나 누군가의 미담, 또는 생활 속 지혜 등 아이들에게 유용한 조언을 해주고 시작하는 편이다. 내리 5시간 수업을 앞두고 워밍업 시간이라고나 할까. 목을 아껴야하지만 이 10분을 건너띄면 왠지 모르게 개운치 못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느낌이다.
잠에서 깨어나지 못해 형체없이 부예진 나와 아이들의 머릿속을 맑게 정화하며 윤곽을 선명히 하는 일종의 의식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어제는 국어수업을 앞두고 바람직한 독서방법에 대해 자유로운 이야기 시간을 가졌다. 어김없이 나는 내 이야기로 아이들의 흥미를 돋운다.
“최근 선생님은 한강소설에 빠져 5권의 책을 내리 읽었어. 그러다보니 한강작가의 소설의 특징을 하나 잡아냈어. 그게 뭘까?“
아이들은 내 말에 갸우뚱하는 표정으로 귀엽게 미간을 좁히며 나름의 답을 골몰한다.
“바로, 처음보는 단어가 많았다는 사실이야.선생님도 어휘력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한강작가의 소설을 보며 숙연해졌어. 국어사전을 펼쳐가며 읽었단다“
나는 입술을 달싹여 어제 읽은 작별하지 않는 다에서 처음 본 단어이야기를 꺼낸다.
“혹시 일별하다 의 뜻을 알고 있니?”
다시 교실엔 정적이 흐른다. 그러더니 여기저기서 내놓는 답들. 눈 언저리에 장난끼가 그득한 맨 앞줄의 남자아이의 답.
“일별? 밤하늘 별 중에 일등? 여기저기서 꺄르르 웃음이 터져나온다.
“헤어지는 것이요. 일별이니 잠시 헤어지는 거?”
한 여자아이의 그럴싸한 답변에 아이들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대답대신 곁눈질로 아이들을 슬쩍 쳐다보는 행위를 한다.
“일별하다는 바로 방금 선생님이 한 행동처럼 누군가를 흘깃 쳐다보는 뜻이라고 국어사전에 나와있단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아이들의 입이 일제히 벌어진다. 우리가 모르는 단어는 이렇게나 많다며 늘 겸허한 자세로 책을 많이 읽고 책 속 단어를 부단히 배워나가자. 라는 교훈으로 마무리하고 수업을 이어나간다.
국어시간이 끝나고 미처 배움공책에 중요한 내용을 필기하지 못한 한 남자아이가 시야에 들어온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 살피다 마침 나와 눈이 마주친 여자아이에게 공책을 부탁한다. 조심스레 내게 내민 공책. 오늘 배운 내용을 쓰는 공책이다. 국어시간 필기내용을 찾아더듬거리며 보던 찰나. 오늘 아침시간 내가 흘리듯 말한 단어가 형광분홍빛 색이 입혀진 채로 떡하니 자리했다.
선생님이 읽은 한강소설 속
“일별하다: 흘낏 쳐다보다”
그 부분에서 한참 시선이 머물렀다. 내가 흘러가듯 한 말을 놓치지 않고 기록해둔 아이. 가슴에 뭔가 뜨거운 것이 울컥 차올랐다. 마치 물가에서 우연히 얻은 소중한 물고기를 빠져나가지 않게 두손 꼭 그러모아 잡아가두듯 내 말 한마디도 소중히 여기는 아이가 한없이 기특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맞닥뜨릴때마다 나는 교사라는 직업의 매력을 한껏 느낀다. 일주일 한 번 제출하는 일기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흘러가듯 말해준 명언들. 생활 속 교훈들을 쌍따옴표로 가두어 강조하며 자신도 그렇게 살아가겠다고 필압이 느껴지게 꼭꼭 눌러쓴 글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시큰해지기도 했다. “
가끔 내겐 끊임없는 외부자극과 감정의 소용돌이로 인해 삶이 흔들리기도 하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해보이고 지루해져 의욕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이 올때가 있다. 깊은 수면 아래로 침잠하려는 나를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게 만드는 건 바로 이런 아이들을 만나는 순간이다.
내가 무심결에 하는 말이 누군가에겐 기록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둔갑되는 교실 속 현장들을 수없이 목도하면서 메마른 가슴엔 다음과 같은 불꽃들이 자잘하게 피어난다.
“열심히 책을 읽어야지. 일상을 충실히 살아내야지. 누가 인정하든 안하든 좋은 삶을 지향하는 인간미 넘치는 글들을 부단히 써나가야지.”
내가 최선을 다해 살아간 하루가 우리 반 누군가들에겐 책보다 더 훌륭한 본보기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하며 오늘 하루도 주먹 불끈 힘을 내어 살아나가야겠다.
11월을 마무리하는 오늘. 12월의 첫 월요일엔 어떤 좋은 말을 해줄까 라는 생각으로 아침부터 눈을 뜨자마자책을 펴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