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년간 내가 해온 것들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된 순간의 뿌듯함
2024년의 끝자락, 우리는 어제 겨울방학식을 맞이했다. 1학기에 비해 길고 길었던 2학기의 종지부를 찍고 맞이하는 방학이라 아침부터 모두들 들뜬 분위기가 교실에 만연해있었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깜짝 이벤트의 일환인지 내 책상위에는 롤링페이퍼 5장이 나란히 놓여져있었고 나는 흐뭇한 얼굴로 그 종이를 하나씩 찬찬히 들여다보며 방학식날 아침을 기분좋게 맞이했다.
롤링페이퍼를 죽 훑어읽으며 올 한해 나는 정다운 교실에서 정많은 아이들과 정을 꼭꼭 눌어담으며 행복한 일년을 보낼 수 있었음에 문득 감사했다. 물론 좁은 교실 속 26명의 개성강한 아이들과 지내다 보니 3월부터 12월까지 기나긴 여정 중간중간에는 고됨과 삐걱임의 순간이 종종 찾아오긴 했지만, 그 순간을 함께 겪어내며 생긴 서로의 마음에 단단히 응어리져진 무언가가 서로를 단단하게 결속시켜주는 힘이 되었다.
오늘 내가 받은 롤링페이퍼는 여태껏 받아온 롤링페이퍼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물론 지난 13년간 아이들에게 받은 메세지들은 하나 같이 귀하고 소중하지만 오늘 받은 롤링페이퍼에는 그 전과는 다른 이것이 담겨 있었다. 바로 우리가 일년간 교실서 함께 해온 것들, 그리고 내가 아이들에게 지도한 것들에 대한 감사가 담뿍 녹아들어 있었다는 것. 보통 학생들로 받아보는 롤링페이퍼에는 "선생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두 문장이 공식처럼 수놓여져 있는데 오늘 내가 받은 롤링페이퍼는 내가 여태 지도한 것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감사하는 말들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심지어 평소 글쓰기 시간에 한 두 문장도 쓰기 어려워하는 몇몇 남자아이들 마저도 진심어린 나의 지도와 자신에 대한 마음써줌에 대해 진솔하게 써낸 것이다.
나는 특히, 1학기때 나의 속을 무던히도 썩이던 한 남자아이의 메세지에 한 동안 시선이 붙들리고야 만다.
"선생님 1학기때 말을 많이 안들었는데 잘못된 점을 끈기있게 고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독서록을 못썼는데 선생님의 꾸준한 지도덕분에 그 전보다 잘 쓰게 되었어요. 그리고 매일 좋은 명언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노력할게요❤️"
늘 알아볼 수 없는 글씨를 써와 몇 번이고 자리로 돌아가곤 했던 아이. 이번 롤링페이퍼에는 전에 없이 반듯하고 정돈된 글씨체를 선보였다는 점에서도 나의 마음을 울리기 충분했다. 지난 열달간 내가 아이들에게 쏟은 열정과 진심이 학년 말 롤링페이퍼 속 아이의 반듯한 글씨체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달까?
2024년을 돌아보며 나는 크게 해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누군가의 대단한 성취를 지켜보며 나는 12월이 되고 나서 내가 이루어낸 게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마음에 끝없이 품으며 눈에 보이는 대단한 업적이나 성취가 없음에 탄복하며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중이었다. 2024년의 데미를 무기력함 속에서 초라하게 종지부를 찍을 뻔 했으나 뜻밖의 진심이 담긴 아이들의 롤링페이퍼가 번개처럼 내 의식을 뚫고 들어와 내가 2024년에 참 의미있는 일들을 많이 해왔음을 일깨워주었다.
지난 해 4학년 담임을 맡고 올해 또 맡게 된 4학년,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를 좋아하는 내게 익숙함이란 약간의 무기력을 동반하게 만드는 방해꾼과도 같았다. 하지만 익숙함을 무기로 올해는 작년에 하지 못했던 다양한 활동을 아이들과 해보기로 마음먹으며 2024년 3월을 시작했다.
아침마다 명언을 써주고 그와 관련된 나의 일상경험을 나누기. 매일 스트레칭과 심호흡. 그리고 매주 세줄쓰기 활동으로 아이들과 마음 나누기. 매일 독서록을 쓰고 질문을 만들고 묻고 답하며 자신의 경험 나누기. 수업시간에는 배움노트를 쓰며 매일의 수업내용 기록하고 자신을 성찰하기. 알림장 맽 끝에는 감사일기 한 줄을 쓰며 감사함의 근육기르기. 일주일 한 번 내는 일기에선 아이들과 나의 소통창구로 만들어 가끔 상담도 해주고 조언도 해주고, 평소 못했던 칭찬도 해주며 부단히도 아이들과 연결되려고 애써왔다.
물론 이런 나의 열정이 교실에 드라마틱한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교육이라는 게 한 두번 한다고 즉각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신기루같은 행위가 아니기에 중간중간 주저앉고 싶은 녹록지 않은 순간들이 꽤나 찾아왔었다. 나의 열정에도 불구 수없이 말하고 지도해도 늘 제자리 걸음인 아이들. 그 과정에서 하기 싫어 입을 삐죽이는 아이들. 하루에도 몇 번 충돌이 일어나는 왁자한 교실 속에서 나의 무기력감은 내 두 발목을 옥죄어왔다.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일까? 라는 생각을 늘 마음 속에 품은 채 말이다.
하지만 꾸준함이 주는 힘을 믿고, 손톱만큼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 또한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으로 3월부터 12월간 꾸준히 교실활동을 이어왔다. 그간 내가 행해온 모든 것들이 아이들의 몸과 마음에 알게 모르게 좋은 자영분으로 스몄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나의 열정이 아이들의 마음에 가닿아 서서히 번져나갔고 아이들을 향한 나의 진심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어제의 롤링페이퍼가 입증해주었다.
일년간 그저 공중으로 흩어져버렸다고만 생각했던 나의 지도활동들. 눈에 드러난 큰 성과로 상을 받거나 대단한 업적을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건 아니지만 어쩌면 이것이 바로 가장 의미있는 활동이 아닐까? 나의 일년이 26명의 아이들의 온몸에 스몄고 그리고 그 것들이 앞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의 마음 속에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씨로 앞으로 더 발전하게 만드는 큰 힘이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 어떤 상이나 업적보다 위대한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지난날의 내가 새삼 기특해져온다.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대단한 게 아닌 바로 이런 사소한 일상의 것들이 아닐까 한다. 매일 업무에 치이고 많은 아이들의 등쌀에 힘든 하루를 보내기에 여유가 없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짬을 내어 아이들과 월요일 10분이라도 경험이야기나 마음나누기를 하며 그들의 마음에 다가가려 애쓰고, 명언 말하기, 세줄쓰기,감사일기 등 그 학급에서만 할 수 있는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며 공동체의식을 느끼는 동식에 자기 성찰도 하게 하고,하루를 지내며 아이들을 잠시 관찰하며 학급 명부 옆에 칭찬할 거리를 써놓고 한 번씩 언급해주며 거리를 좁히는 이런 일련의 행위들. 이런 것들이 아이들의 몸과 마음에 쌓여 선생님과의 관계를 단단하게 만들 뿐 만 아니라 아이들도 자신의 진심을 누군가에게 성의껏 내보이게 만드는 힘이 되어준다.
누군가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열정을 다한다는 것은,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노력과 열정이 알게 무르게 누군가에게 스며 큰 영향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을 나는 방학식날 아이들이 내게 선물한 롤링페이퍼를 통해 알게 되었다. 최근 읽은 소설에서 마음에 오래 남은 문장이 문득 떠오른다.
"한 번 써본 마음은 남죠. 그러니 그 마음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요"
지난 일년간 내가 아이들에게 쓴 마음은 허공으로 흩어진 무언가가 아니었다. 이렇게 아이들의 온몸에 그대로 남아 내게 롤링페이퍼라는 수단을 통해 진심을 흥건히 남긴걸 보면 말이다.
2024년에 내가 아이들에게 쓴 마음, 아이들에게 내게 보여준 진심. 한 번 써본 마음도 남는데 지난 열달동안 매일 쓴 마음은 오죽하랴. 그렇게 열달동안 써온 마음들은 2024년이 지나도 오래오래 서로에게 남아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리라.
내년에는 또 어떤 새로운 아이들과 함께 할 지 내 지도가 올해만큼 또 통할진 알 순 없지만, 올해의 경험과 한 번 써본 마음은 남는다” 라는 말을 믿고 또 다시 힘을 끌어올려봐야지.
지난 2024년, 참 많은 일을 해낸 나 대견하다. 그리고 이런 내 활동을 감사히 여기고 꾸준히 따라와주며 다정함의 면모를 늘상 보여준 우리반 아이들도 너무 대견하고. 2024년 잘 마무리하자.
한 해의 끝에 이런 기쁨을 맛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모두들 한 해 마무리 잘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