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아들 덕분에 더 없이 충만한 크리스마스
우리 집 장남은 해마다 산타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쓴다. 작년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로봇을 선물해달라고 하더니 올해는 다소 소박하게 "할아버지 과자상자 선물로 주세요"라는 문구를 또박또박 종이에 써넣는다. 흰 종이에 정성들여 자신이 좋아하는 것의 목록을 써넣는 모양새가 참 귀여워서 한 참을 들여다보게 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명확하다는 게 어쩔 땐 참 부럽기도 하다. 38번의 크리스마스를 통과해오면서 그 설렘이 점차 희석되어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들어도 바람빠진 풍선마냥 살짝 맥이 빠지는 나와는 달리, 이제 겨우 크리스마스를 8번 통과하고 있는 중인 아들은 크리스마스라는 말만 들어도 금세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느낌일게다.
어제는 정신없이 바쁜 업무를 마치고 곧장 마트로 향했다.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은 바로 과자상자였기에 오휘황한 장난감 코너들은 가뿐히 건너띄고 오로지 과자코너라는 목표물만을 향해 돌진한다. 휴대폰을 열어 아들이 좋아하는 과자목록을 재빨리 스캔한 뒤 앞머리를 휘날리며 큰 마트를 정신없이 쏘다녔다. 각종 과자류 코너를 종횡무진 다니며 장바구니에 하나씩 담아갔다. 분명 아들을 위해 담는 선물인데 고르는 내가 더 신이 난다. 이토록 과자를 제한 없이 사본 경험이 있었나. 그러고보니 내 어린시절 소원은 바로 이런 거였는데. 돈 생각없이 원하는 과자 다 고르기.
어린시절, 내게도 로망이 하나 있었다. 바로 마트에서 돈 생각없이 원하는 과자를 다 고르는 것. 빠듯한 살림에 늘 하루 300원의 용돈이 정해져 있던 터라 늘 동네 과자가게에서 이리저리 서성이며 어떤 과자를 고를 까 고민했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그 당시 300원짜리 과자는 감자깡 양파깡 고구마깡 새우깡 같은 과자종류가 대부분. 나는 그 사이에서 늘 다람쥐 쳇바퀴 돌듯 과자를 하나씩 골라 사먹곤 했다. 한번은 엄마가 직장인이셨던 단짝이 500원짜리 포스틱을 사먹는 모습을 흘낏 본적이 있는데 그게 어찌나 부럽던지. 내 손에 들린 감자깡이 그렇게 초라해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해 산타할아버지께 빈 나의 소원은 포스틱 10개를 받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찌나 소박하고 귀여운지. 그 시절 마음에 품었던 작고 소소하던 그 소원이 어쩌면 지금의 아들에게로 이어져 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아들의 과자를 고르며 잠시 아스라한 옛생각에 빠져들며 내 가슴도 몽글해졌다. 장장 1시간에 걸쳐 고심하며 과자를 고른 후 계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빨간색 선물자루 대신 초록색 쓰레기 봉투에 터질 듯이 담긴 과자 꾸러미를 보며 내 마음도 충만해졌다. 어린 시절 가슴 가득 품곤 했던 소원을 지금에서야 다 이루어낸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해서였을까. 아들의 선물인 동시에 어린시절 내게 건네는 선물이란 생각에 이상스럽게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하며 양손 무겁게 봉지를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날 밤, 아들은 산타할아버지가 다녀가실 생각에 잔뜩 들떠 자신의 편지를 다시 곱게 접어 양말에 넣더니, 뒤돌아 내게 문득 이런 질문을 던진다.
"엄마, 엄마는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안주셔?"
나는 아이의 질문에
"엄마는 어린 시절 이미 많이 받아서 이제 안주실거야. 그리고 이제 어른이니까 안받아도 괜찮아."
내 대답에 아이의 표정이 잠시 애잔해지더니 갑자기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5분 뒤 돌아온 아들은 말없이 내게 흰 종이와 5만원권 한장을 쓱 건넨다. 아들의 돌연한 행동에 나는 일순 얼어붙고야 만다. 흰 종이에 꾹꾹 눌러쓴 손글씨.
"자 ,엄마 선물. 엄마 녹차라떼 좋아하잖아. 엄마는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 못받으니까 내가 대신 선물 줄게."
갑자기 가슴 안 쪽 연한 살같은 부분이 톡 하고 건드러져 눈자위가 붉어짐을 느낀다. 아들의 깊은 속내에 나는 몇 번이고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엄지를 들어보이며 크게 추켜올려준다.
"우리 아들 최고, 사실 엄마도 어른이지만 선물 받고 싶은데 아들이 이렇게 주니 더 행복하네. 엄마 녹차라떼 많이 사먹고 행복해질게."
요즘들어 부쩍 심해진 장난끼에 혼내기 일쑤인 일상인데 나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살았다. 아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속을 가진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크리스마스 선물을 못받을 엄마를 생각하며 이를 안타까이 여기고 자신이 얼마 전에 생일 선물로 외할아버지께 받은 거금 5만원을 턱 하니 내놓을 수 있는 그 마음이란. 크리스마스를 38번이나 통과해 온 나보다 더 한 수 위다. 어린 시절의 나는 내 크리스선물에만 골몰하느라 그것을 준비하기만 하고 받지 못했을 부모님생각은 눈곱만치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지금의 아들과 유년시절의 나를 비교하며 괜히 마음이 숙연해진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선물을 두 번 받은 느낌이다. 아들의 선물을 고르며 어린 시절 내 소망을 이루어 준 것. 그리고 아들의 정성스러운 편지와 용돈. 그 어느 때보다도 충만한 크리스마스다. 해가 갈 수록 심드렁해진다는 크리스마스를 우리 아들 덕분에 매해 충만하게 보낼 수 있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며, 내년 크리스마스가 벌써 기대가 된다.
매해 빠짐없이 돌아오는 크리스마스, 어른이 되면서 그 설렘이 희석되어 예전같지 않다고들 말하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