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 년간 내가 반 아이들과 꾸준히 해오던 감사일기 쓰기
새해 첫 날인 어제 아들의 그림일기를 보고 화들짝 놀라고야 말았다. 그간 뭐가 그리 바빴던 지 그간 아이의 일기장 한 번 느긋이 들춰보지 못한 못난 엄마라니. 주말에 있었던 일을 학교에서 아침시간에 쓰는 모양. 기껏해야 한 두줄정도 적었겠거니 지레짐작했던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생각보다 하루에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적었을뿐더러 마지막엔 하루의 총평과도 같은 느낀점도 꼬박 적혀있었던 것이다. 주말에 있었던 일을 아들의 시선으로 적은 글을 보니 마음이 몽글해졌다.
그중에서도 단연코 기억에 남은 내용은 레고랜드에 갔던 일. 새벽같이 출발해서 저녁 9시에 돌아온 대장정. 대전에서 춘천이라는 4시간의 장거리 운행에서 아이는 내내 뒷좌석에서 지겹다고 아우성이었던 일이 선연히 떠오른다. 하지만 일기장에서는 그 아우성이라는 장막 뒤에 숨은 기특한 생각이 여과없이 드러나있었다. 8개의 놀이기구를 신나게 탄 세세한 기록 뒤에 이어진 마무리 문장. “긴 시간 운전하느라 아빠가 많이 수고한 날이었다”
순간 뒷통수를 한 대 턱 하니 맞은 느낌이었다.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아이는 레고랜드에서달콤한 추억을 만들기 위해 애쓴 아빠의 노고를 가슴깊이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그 문장에서 한 동안 시선이 머물렀고 입가에 미소를 띤 채 “표현 좀 하지 귀여운 녀석, 알아주니 고맙네” 라며 아들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자신의 노고를 알아주는 아들로 인해 장시간 운전을 할 때 마다 그 전과는 다른 가뿐함을 남편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빠르게 스쳤다.
그 외에도 아들은 주말에 있었던 일을 세세히 기록해두었다. 배구경기에 가서 주차 혼잡으로 고생했다느니, 얼마 전 독감에 걸렸던 사실을 기억하고 엄마의 표정이 안좋아보여서 자신의 마음도 안좋았다느니, 생일에 아웃백에 가서 직원들이 생일파티를 해주며 탬버린을 흔들어주어서 부끄러웠지만 속으로는 신이 났다느니. 장난스러운 웃음 뒤에 가려진 아들의 깊은 속내가 동글동글 귀여운 글씨체를 통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이런 귀한 아들의 일기를 이제야 발견하다니. 반 아이들의 일기장은 매주 검사하며 장문의 댓글을 달며 소통해왔지만 정작 아들의 일기에는 단 한마디 피드백도 전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잠시 가슴이 뭉근해져온다.
작년 한 해를 돌아보니 24년의 나는 그 누구보다 학급 경영을 열심히 해왔다고 자부할 수 있다. 하지만 집안에서만큼은 아니었다. 학교에서는 아침마다 세줄쓰기에 독서록, 매일 감사일기,배움노트, 그리고 일주일 한 번 내는 일기 숙제에서는 성심성의껏 댓글을 달며 아이들과 소통해왔다. 모든 기력을 학교에서 소진한 탓일까? 집에서는 학교에서 반 아이들과 한 활동을 아들과 함께 해 볼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퇴근하면 정신없이 저녁을 해 먹이고 집안일을 정돈하느라, 아이에게 그림책 한 권 조차 진득하니 읽어준 기억도 손에 꼽을 정도니 말 안해도 비디오다.
한해를 마무리 하며 반 아이들의 피드백을 통해 다양한 활동으로 아이들과 나 사이에는 단단한 실이 엮였구나 생각에 마음이 충만해져왔지만 정작 우리 아이와 나 사이에는 무엇이 남았을까? 살짝 허탈해져 왔고, 아들에게 내심 미안했다. 엄마의 방관이라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혼자서 숙제도 척척 해내고 학원도 불평없이 다니고, 주말일기도 세심히 쓰며 자신의 일상을 충실히 기록으로 남긴 아들이 그제서야 떠올라 가슴 한 구석이 시려왔다.
지나간 시간을 복기하며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가 문득 마음 속에 반짝 불빛이 하나 번뜩였다. 올해는 학교에서 하는 활동의 일부라도 아들과 꾸준히 해보며 둘 사이의 마음의 실을 단단히 엮어야겠노라고. 그래서 오늘 아침, 아들에게 공책을 한 권 내밀며 앞으로 엄마와 감사일기를 써보자고 제안했다. 빳빳한 새 공책 맨 위에 오늘의 날짜를 적고, 먼저 엄마의 감사한 일을 적어내려간다.
엄마: 오늘 아침 서진서아가 건강히 일어나서 엄마가 해 준 계란찜을 잘 먹어준 일이 감사하다.
아들은 잠시 머뭇하더니 연필을 꼭 쥐고 무언가를 열심히 써내려간다.
“엄마가 맛있는 것 많이 해주고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해주세요”
감사일기라기 보단 새해소망인 느낌이지만 첫 출발이 산뜻했다. 엄마와 아들 위 아래로 나란히 적힌 감사일기를 보니 가슴이 뜨거운 무언가로 가득 차오른 느낌이 들었다. 늘 생각으로만 해오던 것을 실행하고 나니 속이 개운해진 느낌마저 들었다.
우연히 본 아들의 일기를 기점으로 시작한 감사일기. 반 아이들과 함께 이런저런 활동을 하며 마음의 끈이 이어졌듯, 올해는 우리 아들과도 함께 하며 단단한 마음의 실을 엮어가야겠다는 생각을 굳게 해 본다. 기록을 하는 행위는 당연한 게 당연한 일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는 참으로 유의미한 행위라는 사실을 아들의 일기를 통해 또 한 번 깨닫는다. 레고랜드에서 잊지 못할 추억이 아빠의 수고로움 덕분이라는 사실을 연필로 꾹꾹 눌러쓰며 알아냈듯이 앞으로의 감사일기도 매일 쓰며 일상 속 무탈하게 흘러가는 하루가 나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애씀으로 함께 만들어진다는 사실도 꼭 깨닫길 바라며.
2025년 12월 31일엔 감사로 가득찬 일기를 함께 읽으며 아들과 나를 이어주는 마음의 실이 한층 더 단단하게 엮이어져 있기를. 그 단단한 실이 앞으로의 우리의 삶을 흔들리지 않게 지탱하는 큰 무언가가 되기를 바라며. 꾸준히 이어가보련다.
2023년 아이들과 함께 한 감사일기에 대한 오마이뉴스 기사
내년에도 미약하나마 이어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