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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속 허기도 잊게 만드는 나의 마법의 장소는?

내 몸과 마음의 위안을 주는 당신의 케렌시아는 어디인가요?

by 이유미


자신이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안식처, 그곳을 스페인어로 케렌시아라고 부른다. 내게도 그런 케렌시아같은 공간이 하나 있는 데 바로 서점이다. 서점에 들어가는 순간 코끝으로 훅 끼쳐오는 은은한 아로마 향기, 적막한 공간에서 귓가로 흘러드는 책장을 넘기는 소리, 서가 사이사이를 나지막이 흐르는 클래식 음악, 정갈히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 나는 이곳에서 내 온몸의 감각이 깨어나는 느낌을 받는다.

늘 가던 가까운 동네도서관 대신 어제는 불현 듯 서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인근 서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요 근래 안팎으로 좋지 않은 소식에 마음이 불안정하고 무기력한 상태여서 그런지 온몸이 어서 서점으로 가서 마음의 안정을 취하라고 마음 속 경고등을 울렸던 탓이다. 서점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은은한 허브향이 내 코끝으로 스쳐들어왔고 일순 바깥의 한기에 잔뜩 움츠러든 몸이 스르륵 녹아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한동안 고된 삶에 잠시 잊고 살았다. 바로 이곳이 내게 케렌시아라는 것을 말이다.

은은한 조명아래 빛나는 책들을 보니 내 마음 속에 크고 작은 불꽃들이 마구 샘솟기 시작했다. 신간코너에서 읽고 싶었던 책을 분야별로 하나씩 빼들어 서점 한 곳에 마련된 책읽기 코너에 자리를 잡고 층층이 책을 쌓아올렸다. 내 눈앞에 차곡차곡 쌓아올려진 책들을 보니 밥을 안먹어도 배가 불러왔다. 책장을 한 장 넘기는 순간 나는 금새 활자의 세계로 빠져든다. 휴대폰도 꺼두고 방금 전 까지 내 머리를 복잡하게 뒤 흔든 잡념도 다 떨쳐버리고 그저 책이 안내하는 세계로 나는 편안하게 빠져들었다.

서점에서 책을 읽으면 유독 집중이 잘되는 편이다. 서점에 있는 모든 책은 도서관과는 달리 대여도 불가능하고 오직 돈을 주고 사야만 한다. 자원의 희소성으로 인해 살 수 있는 책은 제한되어 있기에 최대한 단 시간안에 좋은 신간 책을 독파하려다 보니 물 한모금 마시는 찰나의 시간조차 아깝게 느껴진다. 뱃 속 허기를 느낄 여유조차 없다. 오직 이 곳에서만 읽을 수 있다는 제한성이 몰입을 더욱 강하게 부추긴다. 어제도 앉은 자리에서 3시간을 내리 책에만 집중했으니 이만한 몰입의 장소가 또 있을까?

책방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책방은 나의 엔돌핀을 마구 샘솟게 만든다. 자석의 N극이 S극에 이끌리듯 자연스레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책방으로 발걸음을 돌리게 된다. 나는 책방이 주는 그 안온함이 참 좋다. 그리고 그 책방에서만 읽을 수 있는 책들도 내 구미를 사정없이 당긴다. 신기한 사실은 언제든 집어 읽을 수 있는 집안의 책에서 본 구절은 순식간에 내 기억 속에서 흐려지지만 책방이나 서점에서 몇페이지 읽은 책이 내 머릿 속에 강하게 각인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곳에서만 이라는 제약성이 그런 강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

어제 간만에 나는, 나만의 케렌시아에 가서 몰입의 순간을 경험하고 와서 마음이 충만해져 한동안 배도 고프지 않았다. 가뭄에 시들어있던 꽃이 간만에 내린 단비를 혼신의 힘으로 빨아들여 촉촉함을 머금듯 나도 그간 메말라있던 마음에 책이라는 단비를 수혈하고 나니 온 세상이 밝고 맑아보였다. 내게 서점이라는 안온한 공간과 마음놓고 의지할 수 있는 책에 한없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일상을 바삐 살다보면 우리는 잠시 잊고 살게 된다. 지친 몸과 마음에 안식처가 되어 주고 다정한 위로를 해주는 장소나 행위가 무엇인지 말이다. 인생은 녹록지 않기에 우리는 우리만의 케렌시아를 부단히 찾아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어제 오랜만에 방문한 서점의 효과인지 주말 아침이 더없이 가뿐했다. 온 몸과 마음에 고스란히 새겨온 서점의 향취와 책에서 만난 아름다운 구절들은 한동안 나의 몸전체를 타고 돌며 일상을 생기있게 살아가는 큰 원동력이 되어 줄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안식처를 갖길 원한다. 우리집 8살 아들도 자신의 방 한 구석에 작은 텐트를 쳐놓고 가끔 그곳에 들어가서 안정을 취하고 나올 때가 있다. 숙제를 덜해 아빠에게 혼난 순간이나 동생이 귀찮게 굴어 성가신 순간엔 꼭 그곳에 들어갔다 나온다. 그곳에만 들어갔다 나오면 얼굴이 말갛게 변하는 걸 보면 아들에겐 그곳이 케렌시아인 셈이다. 삶이 공허한 순간, 일상의 고단함에 몸과 마음이 쪼그라드는 순간. 인생에 가끔 경종을 울리는 순간이 올 때면 나는 번개처럼 서점을 떠올린다.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묘하게 안정되어 오니까.

당신의 케렌시아는 어디인가? 그곳이 서점이든, 집안의 작은 구석공간이든 마음의 위안을 주는 케렌시아를 부지런히 찾아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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