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특별함이란 타인의 것이 아닌 유일무이한 나로서 사는 삶
“이달의 일기왕은 바로, 이00. 나오렴”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이 한 마디를 듣기 위해 39년 인생 통틀어 일기를 가장 열심히 썼던 시기였다. 그 당시 담임선생님께서는 매달 일기왕을 뽑아 아이들 앞에서 칭찬과 함께 담임상장을 주시곤 했었는데, 그것이 내 마음에 작은 불씨를 일으켜 매일 밤 손끝이 저려오고 새끼손가락 한 마디가 흑연으로 까맣게 물들도록 책상 앞에 앉아 일기를 쓰곤 했다.
그렇게 일기에 열과 성을 다했던 건 지금에와 돌아보면 글쓰기를 좋아했다기 보다 일기왕이라는 타이틀이 내게 안겨주는 특별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태생부터 내성적인데다 수줍음이 많아 교실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 공기같은 존재였던 내가, 일기왕 발표 때 만큼은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나를 향해 비추는 것같은 그 특별함이 가슴 벅차게 좋았으니까.
일기왕 선발에 더해 선생님께서는 매 달 잘 쓴 일기 한 편을 친구들 앞에서 무심한 목소리로 읽어주시곤 했다.한 번씩 내 일기가 선생님의 입을 통해 교실 안 가득 울러퍼지는 순간엔 잔뜩 움츠러들었던 내 두 어깨가 활짝펴지고 가슴이 웅장해지기 까지 했다. 그 시간이 끝나면 친구들의 부러움 섞인 시선이 나를 향해 쏟아졌고 쉬는시간이면 자주 혼자였던 내게 친구들이 삼삼오오 다가와 관심을 크게 보여줬으니 일기에 점점 강하게 집착할 수 밖에 없었다. 매일 밤 어떤 특별한 일기로 친구들의 관심을 끌까 고민하다 잠을 뒤척인 적도 많았다.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평범한 여자아이에게 주어지는 매일의 삶이 특별할 수만은 없는 법. 집 학교를 반복하는 일상 속 주목받을 특별한 소재를 찾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참신함이나 번뜩이는 표현 하나 없이 그냥 내 일상을 열심히 만 쓴 일기는 선생님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그 스포트라이트는 한동안 다른 아이에게 비추어졌다. 일기왕 타이틀이 멀어지기 시작하면서 나는 파도에 좌초되어 아래로 가라앉기만 하는 배처럼 무기력해졌다. 내 존재가 그렇게 잊힐까 두려운 나머지 한동안 일기장을 펴놓기만 한 채 손톱만 쥐어뜯다 생채기만내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3학년 시절 내내 단짝으로 지내다 몇 달 전 전학 간 친구의 집에 초대되어 방문한 일이 있었다. 우연히 들어간 친구의 방 책상 위에 놓인 일기장에 호기심이 생겨 별 생각없이 펼쳐본 한 페이지에서 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얼얼한 충격을 받았다.
“동생의 감기를 빼앗아간 마법의 알사탕”.
제목부터가 내 시선을 잡아끌었고,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집으로 돌아와 몇 일째 방치된 일기장 위에 무서운 기세로 일기를 써내려갔다. 어느새 흰 지면이 빼곡한 글씨로 채워져있었고 정신을 차리고 찬찬히 읽어보니 아까 본 친구의 일기가 한 겨울 눈송이가 지붕에 내려앉듯 내 일기장으로 고스란히 내려앉아있었다.
잠시 내 마음에 요동이 쳤지만 어떻게 온 기회인데 라고 속으로 읊조리며 나는 친구의 일기를 하늘에서 내려준 동아줄처럼 꽉 부여잡고 놓지 않았다. 그렇게 완성된 일기를 다음 날 선생님께 곧장 제출했고, 빼앗겼던 일기왕의 자리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속에서 날카로운무언가가 콕콕 찔러댔지만 다시 받게 된 스포트라이트에 파도에 좌초된 줄로만 알았던 나라는 배는 다시금 수면위로 떠오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석 달에 한 번 발간되던 학교신문을 받아든 순간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4학년 소식란 코너에 내 일기가 떡하니 올라가있는 것이 아닌가? 이미 모두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기세등등했던 나는 차마 그 일기가 내 일기가 아니라는 것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랬다간 겨우 찾은 일기왕을 내려놓는 문제가 아닌 전교생의 질타를 받으며 한순간 푹 고꾸라질 내 자신을 떠올리며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어안이 벙벙한 채로 내 글 아니 친구의 글이 실린 학교신문을 받아들고 한 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손에 든 학교신문을 최대한 보이지 않게 책상 안 깊숙이 넣으며 내 양심도 함께 쑤셔박아넣었다.
그 후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다음달 학교신문이 발간되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가끔 교과서를 꺼내다 발견한 책상 안 구겨져있는 학교신문을 볼때마다 내안의 깊숙한 여린살이 날카로운 무언가에 계속해서 찔리는 느낌을 받았고, 귓전에선 쉬지 않고 친구의 음성이 웅웅거리며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내 일기 내놔라, 너는 가짜 일기왕이야”
하루하루가 가시밭길 같았다. 한동안 그 음성이 내 귀를 울려대고 쉬이 떠나지 않았는데 어쩌면 친구의 음성을 빌려 내 안의 누군가가 말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귀신은 속여도 나 자신은 속일 수 없으니까.
내 일기가 학교신문에 실린 이후, 다른반 친구들과 선생님들은 나를 뭔가 특별한 존재로 봐주었지만 정작 내 자신은 평범한 존재보다 더 못한 무언가로 나를 인식하고 있었다. 밖에서 받는 스포트라이트가 밝을수록 내 안에서 쏘아대는 빛은 점점 사그러들고 잿빛으로 변해갔달까?
그 시절의 나는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썼다는 이유로 가슴에 묵직한 무게를 안고 무겁게 한 발 한 발 띄며 학교생활을 했던 것 같다. 그 일기가 씌어진 일기장을 볼때마다, 교실게시판에 두어달 붙어있던 학교신문을 볼 때마다 나는 가슴께가 묵직하게 아파왔고 식은땀이 났던 것이 어제 일처럼 생생한 걸 보면 말이다.
내 자신이 특별해지려고 했던 찰나의 잘못된 선택이 결국 나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임을 어린나이에 일찍이 깨달았다. 다른 누군가는 속일 수 있어도 결코 속일 수 없는 것은 내 안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나라는 사실을. ”가짜 일기왕”타이틀이 지금까지도 생생한 기억으로 자주 떠오르며 부지런히 나를 과롭히는 것을 보면 그 댓가는 꽤나 혹독한 것 같다.
다행히도 그 이후 지금껏 나는 더 이상 남의 글을 탐내지 않고 오로지 내가 보고 듣고 내 속에서 소화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매일 흘러가는 소소한 일상들 속에서 내가 깊이 감화한 일들을 지면에 붙잡아쓰면서 하루를 온전히 돌아보는 삶 말이다.
교사로서 아이들과 수업을 하며 맞닥드리는 일들, 두 아이 육아를 하며 벌어지는 전쟁같은 나날들, 하루를 지내며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있었던 일들. 오로지 나만의 렌즈로 볼 수 있는 풍경들을 붙잡아 쓰며 진짜 나로서의 삶을 살아가려고 부단히 노력해나가고 있다.
그러다보면 특별하지 않은 하루의 소소한 순간도 나만이 볼 수 있는 렌즈로 보고 쓰다보니 특별함의 색채가 덧입혀진 것 같았다. 그냥 흘려보내는 하루를 기록하고 내 안에서 길어올리는 진심을 더해 쓰다보면 속이 개운해지는 느낌을 덤으로 받기도 하고. 남이 아닌 내 스스로가 특별함을 만드는 순간이랄까.
오랜 경험으로 나는 인생의 소중한 교훈을 하나 얻었다. 특별함은 남의 탈을 쓰는 게 아닌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인 바로 나 자신이라는 탈을 써야 나올 수 있다는 것. 누군가의 삶, 그리고 작품이 탐나서 내 것 인양 가져온다 한들 그것은 잠시의 반짝임일 뿐 오래도록 내 삶을 빛나게 해주지는 못한다는 것도 깨닫는다. 희뿌연 어둠에 휩싸여 한 치앞을 알 수 없는 삶을 살아감에 있어 그 삶을 헤쳐나가도록 만드는 힘이란 잠시 반짝이고 말 스포트라이트가 아닌, 오래도록 앞길을 비춰나가게 해주는 은은한 조명이어야 하니까.
영상 속 되감기버튼 처럼 인생에도 되감기가 있어 초등학교 4학년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일기의 제목을 이렇게 수정하고 싶다.
“알사탕 하나 가지고 벌어진 세 남매의 싸움”
그랬다면 언제 들킬까 노심초사하며 잠을 뒤척이는 대신 사탕하나로도 치열하게 싸우곤 했던 두 동생들과의 소소한 사연을 가감없이 일기장에 써내려간 뒤 개운한 마음으로 기분좋게 잠자리에 들었을테다. 물론 일기왕 타이틀은 바로 돌려받지 못했을수도 있지만 그날의 일기는 내 기억 속 아픈 무언가가 아닌 지금껏 오래 떠올릴 따스한 추억으론 남았겠지.
되감기는 할 수 없으니 재생버튼을 힘껏 눌러 지금이라도 온전히 내가 살아낸 일을 내 힘으로 부단히 기록하며 앞으로 나아가보련다. 남의 것이 아닌 진솔한 내 삶을 기록하며 한때 반짝이고 말 스포트라이트가 아닌 , 오랫동안 은은하게 빛나는 조명처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암흑같은 인생의 어둠을 밝혀줄 그런 글을 말이다.
그러다보면 인생의 후반부에서 그 수십개의 은은한 조명들이 모여 눈부시게 밝은 스포트라이트로 나를 밝혀주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품으며 오늘도 나는 내 하루를 내 손으로 기록하며 진짜 일기왕을 향해 한 발짝 나아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