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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흙으로부터 (from the earth)

by Choi 최지원

종로에서 업무를 마친 운 좋은 어느 날, 곧장 학고재 갤러리로 향했다.

마침 종로는 한국 작가들 전시가 한창이다.


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예술의 중심지는 단연 종로였다. 한남동에 타데우스 로팍 같은 해외 유명 갤러리가 들어서면서 종로의 자리가 흔들리는 듯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동양작품 전시의 성지로 자리매김하며 위상을 이어가고 있다.


종로의 역사와 분위기 덕분에 전통적 미감을 품은 추상회화 전시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종로에서 한국 작품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동양주의 정신이 작품으로 발현되던 시절, 한국 작가들이 걸었던 그 길 위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당시 종로는 수많은 청춘이 모이던 거리였다고 한다.

김환기와 김향얀이 종로 한 빌딩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변돌림은 종로에서 이상을 만나 부부가 되었다.


지금 내가 마주한 종로는 번잡한 도심 빌딩 속 우뚝하니 한국의 역사를 지키고 있는 뚝심 깊은 동네지만, 이렇게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보고 난 뒤 마주한 종로는 그 당시 작가의 꿈과 아름다움이 스며 있는 어제와는 또 다른 종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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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인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질문이다. 한국에서 자생한 문화적 창조물들이 전 세계로 확산되고, 혼종적 정체성이 존중받는 시대에, 과연 한국성을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단순히 앞에 ‘K’만 붙인다고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송길영 작가의《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를 떠올리면 답의 한 방향이 보인다. K의 오리지널리티는 From Korea가 아니라 Made by Korea라는 것. K-POP, K-CULTURE의 ‘K’는 단순히 국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정서에서 비롯된다.


K를 국가라는 물리적 경계 안에 가두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요소를 수용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단순히 문화재처럼 보존하고 전승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합의를 만들어내며 확장되는 과정을 일상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십분 공감한다. 한국적인 문화적 창조물도 마찬가지다. 한국 작품을 감상할 때,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넘어, 더 근원적이고 거시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한국적이라는 말은 고정된 정의가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확장되는 살아 있는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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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번에도 역시 환기 선생의 작품을 편애하며 줄곧 세 작품만 들여다 보았다.

서양 색채를 이리도 동양 화풍에 잘 담을 수 있다니. 그의 작품에는 항시 서양과 동양의 적절한 조화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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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를 보면 부재의 미가 느껴진다.

아름답게 표현하려는 욕망을 절제하고, 마음을 비워 무욕의 아름다움을 성취한 놀라운 작품같달까?

텅 비어 있는 듯 내면에 흐르는 깊고 단아한 백자의 감성이 수십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이유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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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끝에서 전해져 오는 그릭 요거트 같은 꾸덕한 느낌과 물감을 머금은 붓이 종이 위를 스무스하게 스치면서 남긴 도구의 촉각적인 물성이 느껴져 굉장히 매혹적으로 다가온 그림이었다.


Finkel, Michael - 예술 도둑》읽고나서 작품을 감상할 때, 소유 하고 싶다는 욕심을 내려놓기로 마음 먹었는데.. 우리 집 소파 위 빈 벽에 걸면 얼마나 예쁠까 생각하며 봤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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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빼곡히 저 흰 선을 채워나가지 않고 왜 남겨두었을까?

이게 완성을 다하지 않은 게 아니라, 80%까지만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다는 동양 예술가의 마음이 깃들지 않았을까 싶다. 인생의 모든 것에 100%, 110%를 채우려고 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 아닐까? 그 여운과 깊이를 즐길 줄 아는 수용적인 자세를 갖춘 것이 동양화가 아닐까 싶다.


동양화라는 것이 참 재미난 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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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학고재 좀 신기한게 캡션이 없더라고?

현장에서 QR코드로 작품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UI가 직관적이지 않아 작품 위치와 설명을 매칭하며 보는 것이 조금 어려웠다. 덕분에 현장에서 캡션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면, 누구의 작품인지 기억에 잘 남지 않는 아쉬움이 있었다. 개선되면 좋겠다.


와중에도, 박광수 작가 작품은 어찌나 기묘하던지 뇌리에 선명히 박혔다.

마치 진격의 거인 같다. 미지의 세계에서 생명이 탄생하던 태초의 시대, 그 거인이 자신의 존재를 느껴가듯, 그림 속 생명도 살아 있음을 드러내는 느낌이다.


금번 전시 '흙으로부터'라는 대명제와 이 작품의 상관성에 의문이 들어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내가 모르는 어떤 부분에서 연결 지점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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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꾸락 8개야..

2개 더 그려주세요.. 작품 감상에 집중이 안돼..



오늘의 미술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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