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25년 최고 소설이라고 점쳐보며, 벌써 2명을 영업시킨 인생 소설
누구에게나 친구가 세상의 전부인 시절이 있다. 특히 친구의 질보다 양을 중요시하는 청소년기에 더 그렇다.
미모와 비올라가 서로를 통해 자신을 확장해 가는 이야기를 읽으며, 내 인생을 밝혀준 친구들을 떠올렸다. 감사하게도 손에 꼽을 수 있는 몇 명이 선명하게 스쳤다. 좁지만 깊었던 내 인간관계 속에서, 발자취를 남겨준 소중한 이들. 어떤 이는 여전히 곁에 있고, 어떤 이는 이제 옆을 떠났지만 그 모두에게 미모가 비올라를 사랑했던 것 이상으로 나도 사랑했다고, 그리고 진심으로 안녕을 바란다고 전하고 싶다.
이 책은 수도원에서 생의 끝을 맞이하는 '미모'의 시선을 통해, 현재와 과거가 교차되며 약 80년간의(1904년~1986년) 그의 생애가 서술된다. 영화 감독의 작품답게 표현 하나 하나가 굉장히 유려하고, 현재와 과거를 잇는 은근한 단초를 찾아 나가는 맛이 두둑한 소설이다.
주 무대는 1920-40년 파시즘이 득세하던 이탈리아. 그 시대 속 태생적 한계에도 굴복하지 않는 미모와 귀족 가문 막내딸의 운명을 넘어 자유를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비올라는 평범하면서도 영웅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그래서 이 책은 두 친구의 진한 우정을 담은 러브스토리이자 무겁지 않은 역사 소설이면서, 동시에 위대한 영웅담이기도 하다.
(아! 러브 스토리라고 하니 로맨스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그 쪽은 아니다. 사실 그보다 더 깊고 묵직한, 우정 이야기이다. 형태와 속성이 다를 뿐 지속되는 모든 관계에는 사랑이 밑바탕되므로 러브 스토리라고 해두겠다.)
그리고 은근한 반전이 있는 책이라 포기하지 말고 꼭..! 읽어내기를 추천한다.
스포가 될까 기록하고픈 많은 문장들 중 몇 개만 엄선해봤다.
p.148
그 애는 내 손을 잡더니 자기 가슴 위에 놓았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가슴 벅찬 순간 중 하나였다. 그 애는 가슴이 없었고 정말로 가슴이라고 할 만한 걸 갖게 되지도 않겠지만, 그 빈약한 가슴이 내가 훗날 관계를 맺게 될 몇몇 여자들의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내 손바닥을 가득 채웠다. 그 애는 내 가슴 위에 자신의 손을 갖다 댔다.
「미모 비탈리아니,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신 앞에서, 비올라 오르시니가 날도록 도울 것이며, 결코 추락하게 놔두지 않겠노라고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그리고 나, 비올라 오르시니, 나는 미모 비탈리아니가 그 와 같은 이름을 지닌 미켈란젤로에 필적할 만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조각가가 되도록 도울 것이며, 그가 결코 추락하게 놔두지 않겠노라고 맹세합니다.」
찰나 동안, 비올라와 나는 키가 같아진다. 우리는 거의 열 네 살이다. 정확히, 똑같은 키. 이 상태는 지속되지 않을 테고, 그 애는 그 사실을 알고 있고 나도 그러니, 우리 둘 다 알고 있 다. 나는 우리라고 말하기를 좋아하니까. 이 순간이 지나면, 비올라는 계속해서 키가 자라서 하늘을 향해 솟구치겠지. 나 는 여기, 땅바닥에 붙어 있을 테고. 그 순간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를, 서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묘지의 밤, 대낮의 열기에 그을린 색채로 가득한 밤에, 이러한 만남, 예기치 한 동등함에 거의 놀라다시피 하며. 찰나 동안, 나는 어느 결엔가 그 무엇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벌써 그 애를 쑥쑥 크게 하는 힘들이, 그러니까 쌓여 가는 세포들과 늘어나는 뼈들이 작동하고 있고, 분자가 하나씩 하나씩 늘어날수록 비올라는 나로부터 멀어진다.
가난하고 왜소증까지 지닌 미모. 그런 그의 내면의 숨은 조각가로서 자질을 가장 먼저 알아봐 준 이는 비올라였다.
귀족 가문의 막내딸로서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야하지만, 세상과 정의 그리고 앎에서 멀어지길 거부하는 그녀를 지탱해준이 또한 미모였다.
겉모습과 환경이 달랐고, 시간이 흐를수록 둘의 키차이 마냥 그 격차는 더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 놓인 우정은 그 차이를 잠시 지워버리고, 찰나 동안이나마 같은 선상에서 서로를 친구로 여기게 했다.
비올라는 자신이 읽은 책을 미모에게 건네며 지식을 전했고, 그를 성장시켰다.
그리고 정상성의 기준에서 벗어난 몸을 지니고, 늘 한계를 인식해야 했던 미모야말로 매 순간 여성으로서의 제약을 실감해야 했던 비올라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평생에 걸친 둘의 우정은 이렇게 시작된다.
드디어 나는 탐나 는 존재가 되었다. 사람들은 내게 침을 뱉으며 무시했고, 나는 일거리를 구하기 위해 평생 간청해야만 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꼭 소유해야만 하는 작품을 만드는 작가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새로운 말을 하나 배웠기 때문이었다. 아니요. 이 세 음절의 말이 갖는 권력은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내가 거절할수록, 심지어 차갑게 거절할수록, 사람들은 나를 오르시니 가문의 조각가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나의, 즉 오르시니 가문의 조각가가 만드는 작품을 더더욱 원했다.
어린 시절 오르시니 가문 사람들에게 발가벗겨진 채로 매질을 받던 미모가 대단한 조각가로서 명성을 날린다. 통쾌하다. 놀랍게도 미모는 온갖 제약 속에서도 자칫 오만할만큼 자신만만하다. 타고난 재능과 그것을 밀어붙일 힘까지 지닌, 영특하고 단단한 남자다.
그렇게 미모는 오르시니 가문에 정식으로 발을 들이고, 훗날엔 가족 일에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어엿한 가문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네가 사라지게 절대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어린 시절 비올라가 미모를 지켰더라면 이제는 미모가 비올라를 지킨다.
당당하기 그지 없고 매혹적이던 비올라는 불의의 사고로 자취를 감추게 되고, 들끓는 열정과 정의를 숨긴채 살아간다. 그런 그녀가 다시금 '비올라답게' 존재할 수 있도록 그 옆을 지키는 미모.
「미모 비탈리아니와 오르시니 가문은 여러분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사랑하는 친구들!」 나는 시끄러운 소리를 누르기 위해 고함을 질렀다.「우리는 이 암살자들의 정권을 위해 결코 다시는 일하지 않을 겁니다!」나는 문지방을 넘기도 전에 체포되었다. 곁눈으로 보니 두 명의 남자가 깜짝 놀란 스테파노를 양옆에서 에워싼 채 출구로 끌고 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얻어맞지 않았지만, 그 뒤로는 모든 것이 암흑이 되어 버렸다. 아마도 아주 오랜만에 처음으로, 바로 직전 순간에 내가 환한 빛을 발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책은 예술가와 귀족, 종교와 권력 등 다양한 사회적/역사적 맥락을 유기적으로 엮어내며 개인의 운명과 시대의 흐름을 교차시긴다. 특히 이 대목에서 미모가 비올라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싶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파시즘이라는 시대적 배경 안에 전쟁의 상흔, 종교와 권력의 결탁이 얼마나 팽배하게 자리잡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수동적이고 평범한 삶을 거부하며,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비올라의 모습에서 문득 '삶의 한가운데'의 주인공 니나가 떠올랐다. 돌이켜보니, 그 작품에서도 니나는 평생 그녀를 사랑한 슈타인의 시선을 통해 그려졌었다. 마치 이 소설에서 비올라가 미모의 시선을 통해 형상화되듯, 두 이야기는 묘하게 닮아 있다.
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만큼, 이 책은 실로 다양한 주제를 품고 있다.
단 한 번의 읽기로는 다 담아낼 수 없다. 그래서 뉴질랜드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다시 펼쳐들 작정이다.
그리고 글을 읽으며 선명히 스쳐가는 내 소중한 인연, 수현이와 수경 언니에게도 이 책을 권했다. 두 사람은 과연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다 읽고 이야기 해주기! (실명까지 박제했으니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읽어야겠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