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왜 어떤 예술가만 기억하는가,
예술가의 이름이 드러나기 시작한 르네상스 시기, 활동하던 화가와 조각가의 수는 수 백명에 달한다.
하지만 당시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는, 이른 바 훌륭한 예술가는 스무 명 남짓에 불과하다.
그중에서도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예술가는 더 적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정도?
이는 근현대로 넘어와도 상황은 비슷하다.
수많은 인상주의자 중 파리 여행객들이 줄 서는 작품은 클로드 모네의 수련, 팝아트 예술가 중에선 앤디 워홀만 기억된다.
다시, 세상은 왜 어떤 예술가만 기억하는가?
기억되려면 우선, 유명해져야 한다. 예술가라 하면 자기만의 길을 가는 외골수를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현실에서는 어떤식으로든 존재감을 알려야 예술가의 삶을 지속할 수 있다. 자신만의 철학을 잘 담으면서도 사람들의 반응을 끌어내는 것이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가들의 과제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미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라, 작품을 보면 새로운 영감이 떠오르거나 창작욕이 생기진 않는다. 그보다도 작품과 작품을 그린 작가 이면의 스토리가 궁금하다. 왜 이 작품은 유명할까? 작품의 탄생 비화는? 작가의 의도는? 과 같이 말이다.
그런 면에서 관객을 줄 세운 예술가는 하나의 브랜드처럼 느껴진다. 기억되는 이들에겐 강점, 개성과 함께 치말한 전략이 담겨있다. 이들의 전략에는 기획이 있고, 대중을 납득시킬만한 명분이 있다. 자신의 브랜딩 전략을 구사하기 위해 철저하게 미술사를 분석하고, 시장의 흐름을 읽어내고, 자신만의 포지셔닝을 구축한다. 때로는 스캔들을 의도적으로 활용하고, 기존 질서를 아예 뒤엎어버리는 방식으로 다양하게 전략을 구사하기도 한다. 결국 예술과 전략은 맞닿아 있고, 기억되는 작품 뒤에는 언제나 전략적 브랜드가 숨어 있다.
요즘 단어로 치자면, 일종의 퍼스널 브랜딩인 셈이다. 둘러싸인 환경을 레버리지로 삼아, 자신의 강점을 극대화해 드러내는 방식과 비슷하다. 그래서 요즘은 영특함과 유쾌함 사이의 균형을 잡아 자기 자신을 자연스럽게 노출시키는 사람이 가장 매력적인 것 같다.
줄을 선 건 '작품'이 아니라 '전략'이라는 이 책의 부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나도 항상 그리 생각해왔으나, 예술이라는 고귀한 단어 앞에 '전략'이라는 터부시되는 상업적 단어를 붙여도 될지 조심스러웠던 찰나, 나처럼 예술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을 담은 이 책이 호기심을 끌었다.
이 책에서는 11명의 예술가와 전략을 소개한다. 그중 가장 인상깊은 뱅크시를 소개하려 한다.
뱅크시는 원래 언더그라운드 문화인 그래피티 씬에 있었지만 배척당했다. 뱅크시의 스텐실 기법이 그래피티 정신과 맞지 않는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뱅크시는 정통 미술계로 넘어갔고, 자신을 자칭 아웃사이더이자 미술계 트러블메이커로 브랜딩했다. 일반적인 과정을 거쳐 출품하는 대신 박물관에 몰래 작품을 두고 가는 도둑 전시를 기획 했고, 경매 현장에서는 자기 작품을 파쇄해버렸다.
<스텐실은 미리 만들어 둔 툴에 스프레이만 분사하면 그림이 완성되어 다량의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기법이다. 위험을 감수하며 작품을 만드는 그래피티의 미학과는 상반된 방식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뱅크시의 스텐실 작업은 그래피티 안에서도 배척된다.>
16억 낙찰 순간 절반 파쇄…뱅크시 그림 3년만에 300억 됐다
(그렇다. 그 작품은 3년 만에 300억이 되었다,, 유명해지고 봐야한다^-^)
뱅크시는 활동 초반부터 예술은 소외된 자들에게는 평안을, 권력자들에게는 불안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작품 파쇄 또한, 이러한 그의 예술관에 비롯된 퍼포먼스다. 뱅크시는 이 작품을 친구에게 선물했고 친구가 작품을 경매에 무칠 것을 염두해 두고, 액자 안에 파쇄 장치를 넣어둔다. 자신의 예술이 부자들의 사전인 컬렉션이 되는 걸 혐오했기 때문이다.
방법은 바뀌었지만 그의 예술관은 변하지 않았다. 얼굴이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을 이용해 최근에는 기부를 하며 슈퍼히어로의 이미지로도 활동하고 있다. 여러 가지로 영특하게 전략을 잘 사용하는 작가이다.
뱅크시는 자신의 진짜 정체를 밝히지 않은 작가이다. 예술가로서 삶의 시작점이 되던 때에 사용한 가명으로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고, 본인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덕에 영화 속 주인공 처럼 구체적인 캐릭터 빌딩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 점을 뱅크시는 아주 영리하게 이용한다. 뱅크시라는 캐릭터의 서사를 만들기 위해 상처 받은 어린 시절과 예술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본인만의 예술적 방향성을 담은 몇권의 자서전을 출간한다. 그렇게 자신만의 예술관을 서사화하며, 뱅크시는 관객의 지지를 받게 된다.
아웃사이더 포지셔닝, 도발과 파괴를 통한 재창조 그리고 예술은 대중의 것이라는 일관된 메세지.
이 세 가지 전략이, 거리 예술에서 출발한 뱅크시를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로 만든 건 아닐까?
다음 주에 있을 국립중앙박물관 도슨트 실습 스크립트를 준비하면서, 어떤 이야기가 재미있을지 고민하다가 문득 내가 흥미를 느끼는 주제가 떠올랐다.
“아는 사람의 모르는 이야기”, “위대한 사람의 평범함 이야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작가와 작품의 몰랐던 전략을 전할 수 있는 도슨트가 되고 싶어졌다. 사업개발을 본업으로 도슨트를 사이드잡으로 포지셔닝한 나에게 가장 걸맞는 전략이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