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 자신의 상처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 두 번째, 나와 유사한 상처를 가진 이를 돕는 것.『대온실 수리 보고서』속 주인공 영두는 두 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아픈 상처를 수리해 나간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희미해지기를 바란다. 힘들거나 수치스럽거나 부정하고픈 순간들이 대게 그렇다. 서른을 넘기고 보니, 시간의 힘은 크지만 그것만이 온전한 답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가는 세월에 기대 마음 속 깊이 묻어두려 해도,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불현듯 머리가 쨍하게 아파오며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건 어쩔 수 없으니 말이다. 상처의 크기와 이유를 떠나,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그런 기억이 있지 않을까. 그러니 담담하게 표현된 영두의 과거의 상처가 더 아프게 느껴졌다.
강화 소녀 영두는 중학생 때 서울로 전학을 오며 돌아가신 할머니의 지인 집인 낙원하숙에 머물게 된다. 창경궁 돌담길 옆 위치한 작은 이 하숙집이 소설의 주 무대이자 상징적 배경이다. 같은 집에 머물게된 동갑내기 리사 때문에 영두는 억울한 일을 겪는다. 그 일을 계기로, 낯선 서울살이 속에 버팀목이 되어준 첫사랑 순신과도 이별하며 낙원하숙에서의 기억 모두를 통째로 잊고 30대가 된다.
순신의 자전거 뒷자석에서 둘 만의 오붓한 조용한 드라이브를 즐기며, "나 너 사랑해!"라고 뜬금 없이 고백해버리는 영두와 핸들바를 놓고 뒤돌아 꼭 안는 순신이 너무 엉뚱하고 솔직해서 로맨틱하기까지 했다.
순신은 원서동에서 가장 먼저 반소매 티셔츠를 입었고 가장 자주 삼선슬리퍼를 신었으며 가을이 다 갈 대까지 반바지 차림인 애였다. 그렇게 가볍게 동네를 누비는 몸에서는 이제 더이상 나를 쓸쓸하게 만들지 않는 한강의 아침 냄새가 났다. ~ 사랑하는 사람이 엄마처럼 죽지 않고 이렇게 특별한 자기 냄새를 내며 내 옆에 살아 있는게 좋았다.
가장 좋았던 문장.
한강 야경은 우리 나라 으뜸 명소이지만 불과 몇해 전만해도 나에겐 이방인임을 느끼게 하던 씁쓸한 광경이었다. 서울에 상경한 나는 이제는 일터도 지리도 서울이 더 익숙하지만, 고향이 아니라는 생경함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문장을 읽으며 그 시절 이런 내색을 할 때면 마음 붙일 수 있게 손 잡아주던 이와 위안받던 내가 떠올랐다.
시간이 흘러 창경궁 내 대온실 수리 보고서 담당자가 된 영두는 자신이 맡은 일에 열정적으로 임한다. 일제시대 대온실 공사 책임자였던 후쿠다의 일생까지 파고들며 대온실 내 숨겨져 있던 장소, 지하 배양실 발굴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영두에게 문화재 발굴은 출토 그 이상의 의미였겠지. 그곳의 시간과 사연을 밝히면서 묻혀있던 낙원하숙에서의 영두의 기억을 끄집어내며 치유하지 않은 채 덮었던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 본 것이다.
p340
"그럼 뭐, 댜들 욕먹을 각오는 하시고요. 과거를 끄집어 낸다는 거 되게 용기가 필요한 일이거든요." 백실장이 싱긋 웃어보이며 장비를 정리했다.
대온실의 역사를 따라가며 영두는 해방 직후 지하 배양실에서 벌어진 일을 알게 된다. 살아남는 것만이 절박했던 그 시절에 낙원하숙의 주인 문자 할머니가 어린 동생과 겪었던 고통을 마주하게 되고, 할머니의 마지막 염원을 간접적으로나마 풀어주며 영두도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수리하고, 마침내 회복에 이른다. 문자 할머니와 영두의 세대를 넘은 다층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이야기의 층위가 넓어진다.
p383
어쩌면 나는 대온실로 이끌어 인생을 수리할 기회를 준 것도 마마무였으니까.
매해 3월이면 홍매화가 피는 창덕궁을 향해(창경궁이 아님을 이번 소설을 통해 알게되었다^-^!) 이번 한 해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하는 나만의 의식을 치른다. 이곳은 서울에서 마음 붙일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 이곳이 영두에겐 상처와 치유가 공존하는 곳이라니. 신기하고 반가웠다. 담벼락 너머에 낙원하숙이 진짜 있을 것만 같은 기시감이 느껴졌다. 내년 3월 창덕궁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겠군.
정~말 책 읽을 시간 없이 바쁜 한 주였는데, 통근 지하철 안에서 졸음을 물리치고 재미난 소설의 세계로 몰입하게 해준 책 추천이에게 감사의 인사를 돌리며! 리뷰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