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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 윌리엄 해즐릿

by Choi 최지원

오해하기 딱 좋은 제목. 혐오가 왜 즐겁지?


직전에 읽은 <악마와 함께 춤을 시기 - 크리스타 K. 토마슨> 에서 분노, 경멸, 시기처럼 불쾌한 감정을 너무 쉽게 ‘버려야 하는 것’으로 취급한다는 착각을 짚어냈다. 부정적인 감정이 악명을 얻고, 좋은 삶을 위해서는 그런 감정들을 없애야 한다는 각종 조언에 둘러싸여 살아왔던 내 삶의 오해가 조금 풀리는 경험이었다. 그 감정들을 억누르거나 이용하려 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마주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인상 깊었다. 그런데 한술 더떠서 나에겐 야생적 감정과도 같은 혐오가 즐겁다니, 오해하기 딱 좋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도 딱 좋은 제목이다.


윌리엄 해즐릿은 18세기 후반 영국의 문학 비평가이자 스타 기고가였다. 이혼 후 여인숙을 전전하며 생계를 위해 빠르게 쓰고 대중의 눈길을 끌 수 있는 글이 필요했다. 그러니 다소 자극적인 이 제목 역시 그의 전략이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자기만의 방의 저자인 버지니아 울프가 무려 8개월에 걸쳐 그의 저작을 읽고 찬양의 에세를 남겼다는 것이다. 그녀는 해즐릿을 이렇게 묘사했다.

"까다롭지만 고상하고, 심술궃지만 고결하고, 독선적이지만 인류의 권리와 자유를 진심으로 열망하는 인물."

윌리엄 해즐릿의 생애를 모르고 글을 읽더라도, 그가 분명 신날한 비평가이며 다소 독선적인 사람이지만, 한번쯤 곱씹어보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통찰을 전하는 사람일 거라는 인상이 자연스레 남는다.


p.18

자유의 시대가 왔으며 왕정 독재는 끝났다는 그의 신념과 정치적 희망은 수포로 돌아갔다. 친구들은 정부에 투항했으나 해즐릿은 평생 소수파로 남아서 자유와 동포애의 혁명의 신조를 옹호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독선이 필요했다.

그가 살아온 18세기 후반 시대적 배경을 보면, 프랑스혁명으로 계몽주의가 절정에 이르고 자유, 평등, 박애의 가치가 유럽 전역을 흔들던 격변기였다. 왕정은 무너졌지만 혁명은 곧 혼란과 폭력으로 이어져, 희망과 좌절이 공존하는 시대가 펼쳐졌다. 해즐릿은 자유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신념을 품었지만, 결국 체제에 타협하는 친구들을 지켜보며 평생 소수파로 남는 고독한 선택을 했다. 그 선택은 그를 더욱 독선적이고 비타협적인 비평가로 만들었고, 글에서도 드러나듯 그의 삶에서 행복은 늘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p.39

인간은 순수한 선에 금방 싫증을 내고 변화와 활기를 원한다. 고통은 씁쓸하면서도 달콤하며, 이 맛은 물리지 않는다. 사랑은 조금만 탐닉해도 무관심이나 역겨움으로 변한다. 혐오만이 죽지 않는다. 어디를 가나 이 원칙이 작용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p.40

우리는 무관심하고 권태로운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물질이 그런 것처럼 마음은 진공 상태를 싫어하는 듯하다.


윌리엄 해즐릿의 글은 너무나 시니컬해서 읽는 내내 공감이 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덕분에 혐오라는 감정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흔히들 말하는 ‘악플도 관심이다’, ‘제일 무서운 건 무관심이다’라는 말을 떠올려보면, 혐오 앞에는 관심, 즉 애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사랑해야만 혐오할 수 있는 셈이다. 그래서 혐오는 어쩌면 즐거울 수밖에 없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혐오할 대상이 없으면, 생각과 행동의 원천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애증이 섞일 때 오히려 그 사람을 더 깊이 사랑했던 것 같다.


해즐릿은 혐오를 단순히 도덕적 악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혐오를 인정하면서도 그 힘을 사회의 역동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요소라고 보며 생산적인 행동의 밑받침으로 삼아야 함을 시사한다.


이 챕터까지는 그의 글이 냉소적인 관조 아래 쓰여 있어서 은근히 불쾌했지만, 이어지는 챕터에서 나오는 그의 익살스러운 표현들 덕분에 그에 대한 오해가 조금씩 풀리고 책을 점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또, 그래서 얼마나 혐오하고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데? 라는 물음이 생겼지만, 명확한 Do에 대한 솔루션을 명시하지 않고 독자로 하여금 직접 사유해서 찾게끔 만드는게 아래 학자들의 무지에 대하여의 챕터와 맞물리는 지점이 있어 이 또한 그의 글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죽음의 공포에 관하여

p.63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삶에도 시작과 끝이 있음을 생각해 보는 것이리라. 자신의 존재가 없었던 때가 있었것만 아무도 그 사실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때가 온다는 사실에 대체 왜 심란해지는 걸까?

p.68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지금 있는 그대로, 세상도 우리 마음에 드는 그대로 남아 있었으면 한다.

p.79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내려온 뒤 우리가 그렇게 빨리 잊힌다고 놀랄 필요는 없다. 무대 위에 있을 때에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으니 말이다. 지구 반대편까지 알려지기는 커녕 바로 옆 골목에 사는 사람들조차 우리 이름을 모른다. 우리는 세상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살기 때문에 서로에게 공통된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추론이다.


죽음은 인간이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학파의 논리, 종교적 해설을 다 끌어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논쟁은 언제나 흥미롭지만, 사실 쓸데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죽음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은 없고, 앞으로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챕터에서 해즐릿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태어나기 전 세상에는 관심도 미련도 없었으면서, 죽은 뒤를 왜 심란해하느냐고 묻는다. 특히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현재를 소유하고 싶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강력한 일침으로 다가왔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지만, 그 의미 없는 두려움에 대해 주저 없이 비판하는 그의 시선에서 살아 있는 통찰이 느껴졌다.


해즐릿은 죽음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을 없앨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삶에 적절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삶에 적절한 가치 부여하기, 아마 평생의 숙제겠지? 죽을 때까지 풀 수 있는 숙제이기나 할까?




학자들의 무지에 관하여

p.132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저자와 독자는 모든 타인에 대한 이해가 가장 부족한 부류다. 읽고 쓰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보다 차라리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는 게 낫다.

p.133

즉 자기 자신의 생각이 없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의존해야 한다. 습관성 음주가 위 기능을 손상시키듯이, 이질적 출처에 생각을 의존하는 습관은 생각의 내재적 힘을 약화시킨다. 사고력은 오래 계속 쓰지 않으면 또는 관습이나 권위에 속박되면, 무기력하고 열의가 사라져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일에 부적합해진다.

p. 143

저 유명한 대학교의 학생이나 학장들과 일 년 열두 달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런던과 옥스퍼드를 오가는 역마차의 조수석에서 더 유익한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사유의 부재를 눈감고 모른 척했던 나에게 정말 뜨끔한 챕터였다. 나는 내 생각보다는 이미 정해진 정답을 따라가기 바빴다. 그런데 지난 주 칸딘스키의 추상화를 몇 점 공부하며, 사유의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겠다고 반성했다.


미술사조와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작품을 해석하고, 작품의 소재 하나하나에 명확한 의미를 부여해야 직성이 풀렸던 내가, 칸딘스키가 음악을 듣고 표현한 추상화를 보니 그 어떤 것도 매칭할 수 없었다. 단지 그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한 것이기에 어떤 해석도 강요될 수 없었다.


내가 얼마나 사유의 무지와 생각의 빈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깨달았다(ㅠㅠ) 나는 그림을 내 스스로 보는 것이 아니라, 책에서 본 대로 정답과 편견 안에서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고가 자유로운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는데, 그의 글을 읽으며 마음 한켠이 많이 뜨끔했다. 내가 과연 진정히 작품에 대한 이해와 느낀 바를 획득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냥.. 앵무새가 되어가고 있는지 자문해 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처음 예상한대로, 윌리엄 해즐릿은 굉장히 시니컬하고 자조적인 사람이면서도, 본인의 주장을 힘차게 그리고 일관되게 내세우는 뚝심있는 사람이었다. 버즈니아 울프는 그의 능력을 "조예가 깊은 비평가들마저 곧찰 놓치고 소심한 비평가들은 절대로 획득하지 못하는"것이라고 평가했다.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프랑스혁명의 여파가 유럽을 뒤흔든 시기에 격변의 시대 속에서, 해즐릿은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의 작동 방식을 포착했다. 윌리엄이 묘사한 혐오, 질투, 죽음에 대한 공포, 지식의 한계에 대한 통찰은 2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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