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기록(2026.02.16)
시골에 내려가지 않는 명절은 엄마와 나의 데이트 날이다. 엄마와 나의 취향 교집합을 찾아 코스를 짜면 매번 공연이다.
뭐랄까, 요즘 엄마와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나는 점점 어른이 되어가고 엄마는 점점 소녀가 되어가면서 중간에서 만나는 느낌? 서로를 향해 걸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빨래 뮤지컬을 봤다. 나는 서울에 상경한 스무 살 그 시절 엄마가 짠해서 울었고 엄마는 지금의 내가 마음에 걸려 울었단다. 같은 무대를 보며 서로의 시간에 울었다.
그리고 엄마는 아주 호기심 가득, 그리고 입안 가득 오마카세를 만족해하셨고 지금은 기쁨의 잠을 취하셨다. 나는 여전히 엄마가 좋으면 나도 좋다! 그래서 더 선하게 더 크게 살고 싶다!
지원 일기에서
길기도 길었던 이번 연휴 돌아보니 또 이렇게 짧다. 엄마와 이틀 내리 데이트를 하고 돌아와 쓸고 닦고 소일거리를 하다 보니 벌써 연휴 마지막 저녁이다. 난 Holiday Blue가 쉴 때 쉼에 몰입하지 않으면 오는 편인데, 이번엔 엄마랑 어찌나 재밌게 시간을 보냈던지 내일 회사를 가고 싶은 마음이 막 몽실몽실 피어난다.
고작해야 일 년에 두 번. 가족들 다 같이 모일 수 있는 기회, 명절에 우리 대식구는 늘 할머니 집에 집합했다. 할머니 댁과 가장 가까이 살던 우리는 명절 내내 할머니 집을 지켰다. 명절 전에 도착하는 삼촌들을 맞이하고, 명절이 지나 돌아가는 이모들을 배웅하며 할머니 곁을 살뜰히 지켰다. 그 시절에도 어렴풋이 생각했던 거 같다. “우리가 크면 할머니 댁에 안 오겠지?”, “그땐 각자 명절을 보내겠지?” 상상이 현실이 되었다. 이제는 정말 커버렸다고, 각자의 자리에서 명절을 보내는 날들이 더럿 생겼다.
3월 초 할머니 생신이라 어차피 다 같이 내려가야 하는 거, 이번엔 언니 일을 핑계 삼아(?) 엄마와 나는 서울 남았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하루 종일 우리 둘만 씬-나게 데이트하기로 했다. 어딜 가나 함께인 우리 조카 셋, 사랑둥이들 때문에 행복하지만 (시끄러워서) 대화가 잘 안 되고, 행복하지만 (에너지가 넘쳐서) 금세 방전되던 날들.. 그 북적임을 뒤로하고 비로소. 마. 침. 내 엄마와 나 단둘이 데이트다. (막 휴가 받은 거 같은 기분은 왜지?)
엄마는 공연 보는 걸 무지 좋아한다. 큰 이모 말로는, 엄마는 아가씨 시절부터 혼자 공연 보러 다니는 걸 즐겼다고 했다. 어쩐지 내가 꼭 빼닮았다. 나도 공연, 그중에서도 뮤지컬을 특히 좋아해서 혼자서도 종종 보러 다니고 기회가 되면 엄마와 함께 본다. 엄마와 나의 취향 교집합을 찾아 코스를 짜면 매번 공연이다. 엄마와 함께 볼 때는 엄마가 더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을 고른다. 엄마의 시절이 묻어 있는 이야기나 엄마 청춘을 스쳐 지나갔을 법한 이야기들로! 이번 고른 작품은 빨래인데, 사실 나도 너-무 보고 싶었던 작품이라 냉큼 예매했다.
결론,
진짜 너!!!!!!!!!!! 무 재밌었다!!!!!!!!! 그리고 너!!!!!! 무 슬펐다!!!!!!!!!
최근에 봤던 대형 뮤지컬보다 더 더 더 재밌었고 더 더 더 감동적이었다. 화려한 무대 장치도, 압도적인 스케일도 없었지만 이야기와 사람의 힘이 이렇게 클 수 있구나 싶었다. 동영상 끝에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 옆에 앉아 계셨던 분이 커튼콜 마지막에 정말 육성으로, 진심을 다해 “Bravo!”를 외치셨다.
소극장이 주는 특유의 감성이 있다. 작고 가까운 무대 위에 정상급 연기자들의 향연이 펼쳐지면 이상하게 더 애틋하고, 더 깊이 몰입된다. 사실 소극장 공연은 규모 때문인지 큰 기대를 하지 않게 된다. 웅장한 무대와 화려한 장치에 익숙해지다 보면, 비좁은 무대 위 적은 인원의 배우들이 다중 역할을 맡아 소소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장면은 처음엔 조금 심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어제 본 빨래는 그 선입견을 아주 통쾌하게 부수어 버렸다.
어떻게 이렇게 자기 나이와 국적에 맞지 않는 역할을 저토록 훌륭히 잘 소화할 수 있을까 싶었다. 안두호 배우는 브라운관에서 꽤나 봤던 얼굴이라 반가웠다. 끝나고 찾아보니 빨래 무대에서 맹활약하는 터줏대감 배우들이었다. 어제의 여운은 웅장하게 휘몰아치는 감동은 아니지만, 정말 젖은 빨래처럼 천천히 오래 마음 한편에 널려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엄마가 좋아하니 나도 좋았다. 서른을 훌쩍(아니 약간) 넘긴 지금도 여전히, 엄마가 웃으면 나도 좋다.
나는 받는 사랑에 익숙한 사람이다.(천상 막내) 그래서 한때는 내가 받는 것보다 사랑을 주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평생을 함께해야지 생각했었다. 그래서 내가 받은 만큼 주고 싶어서 여전히 노력한다. 아무 기대 없이 백 퍼센트로 사랑을 주는 게 여전히 어렵지만, 엄마에게는 그게 된다. 요즘 우리 모녀를 생각하자니 기분이 묘해진다. 어느 날은 엄마가 친구 같고, 어느 날은 물가에 내놓은 동생 같다가도, 또 어떤 날은 여전히 엄마 같다. 웃기게도 요즘은 내가 엄마에게 잔소리를 더 많이 한다. 각자의 시간대에서 출발해 서로의 중간 어디쯤에서 만나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 애매하고도 다정한 지점 어딘가에서 말이다.
나는 언제까지나 엄마랑 이렇게 놀 수 있을까?
시간이 흘러 명절에 할머니 댁을 더 이상 가지 않게 된 것처럼 나도 언젠간 엄마랑 놀고 싶어도 놀지 못하는 그 순간이 올 텐데, 엄마랑 만약에 극장을 못하는 날이 올 텐데.. (나는 극 N이고 엄마는 극 S라 내 만약의 극장을 난감해 하지만 엄청 성심성의껏 대답해 준다 난 그게 너무 재밌다ㅠㅠ) 내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펼쳐놓는 만약에 극장을 더 이상 열지 못하는 날이 올까 봐 가끔 무섭기도 하다.
어린 시절에 엄마는 우리 세 자매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뒤늦게 운전면허를 땄다. 이제는 내가 운전대를 잡을 차례인 거 같다. 내 세대에는 당연히 여겨지지만 엄마에게는 낯설고 새로운 경험들을 함께 하는 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보답일 터이니..
엄마 내가 가끔 예민해도 이해해 주야 대? 엄마한테만 보이는 한정판.. 특급 모습이야..ㅎ
그리고 다음 날 엄마를 위한 특별 조식.
엄마 내 요리 실력 어때? 사과.. 잘 깎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