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와의 안전거리

책 대출을 하려면 이름은 알려줘야지

by 김몽콕

처음 작은 도서관에 가게 된 데는 불순한 의도가 있다. 무직자가 되자, 집 밖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사 마셔야 하는 차 한 잔 값도 부담됐다. 며칠은 큰 교회에 딸린 카페와 맥도날드에서 시간을 보냈다. 교회 카페에서 파는 아메리카노에서는 잿가루를 물에 갠 듯한 맛이 났다. 싼 값을 감안해도 마셔주기 힘든 수준이었다. 맥도날드 드립 커피는 그에 비하면 향긋했다. “내 노래야! 따라 부르지 마!” 케데헌 Golden의 파트 분배로 다투는 유치원생 하며, “이 집안 며느리들은 왜 다들 싸가지가 없지?” 흥미진진한 집안싸움의 서막까지. 앉아 있는 동안 백수의 감정에 몰두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사방에서 들려온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적당히 조용하면서 맛대가리 없는 커피를 사 먹지 않고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은 도서관뿐이라는 결론이 났다. 이 동네에 산 지 꽤 오래됐지만, 이제껏 근처 도서관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버스 타고 15분 거리에 있는 시립도서관이었다. 버스비 마저 아껴보려 이리저리 검색한 결과, 집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작은 도서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동네 작은 도서관은 주민센터 건물 꼭대기층에 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미닫이문을 열면 위에 달린 종이 짤랑 울리는 소리에 한 번, 의도보다 세게 닫히는 문 소리에 두 번 놀라게 된다. 대출, 반납 데스크가 출입문 바로 옆에 있어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나면 사서가 모니터에서 목을 빼고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한다. 전체 넓이는 중고등학교 교실 정도. 벽 둘레로 세 면에 책장이 배치되어 있고, 가운데 공간에 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책상 두 개와 앉은뱅이 책상이 있었다. 오른쪽 벽엔 큰 창문이 있어서 책장 높이가 낮지만, 빛이 잘 들어 전체적으로 환하다.



도서관에 처음 간 날은 사서 데스크에서 가장 먼 육인용 책상에 앉아서 읽지 않을 에세이집 한 권 펴 놓고 무직자의 일을 시도했다. 두 시간 앉아 있는 동안, 도서관 이용객이라곤 나 빼곤 한 사람 봤다. 그 마저도 예약한 도서만 받고 가버렸다.



거실보다 크고 조용한 공간을 전세를 낸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멀리 맞은편 모니터 뒤에 앉아있는 사서의 존재가 무척이나 의식됐다. 사서가 백수 비즈니스를 방해한다기보다는, 이제까지 사서만의 공간이었던 것을 백수인 내가 침탈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가까웠다. 이용객 수는 적지만, 사서는 분주해 보였다. 10년간 단 한 번도 대출된 적 없는 자료를 솎아내고, 타관 리모델링으로 버리는 앉은뱅이책상이 실려오자 환경 미화를 해치지 않게 가구를 배치하느라 혼자 씨름했다. 한 공간에 단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인지, 아직 직장인 물이 덜 빠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소파에 자빠져 TV를 보고 있는데 엄마가 바닥을 닦겠다며 걸레를 들고 거실에 나타나는 상황에 놓인 것처럼 불편했다. 닫힌 문 너머로 들리는 통화소리로 사서가 새벽마다 수영교실에 간다거나, 주말에 위내시경을 받으러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도 했다.



내가 사서를 의식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사서 역시 매일 두 시간 비슷한 시간에 자리에 앉아있는 내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 왔다. 기왕 도서관을 오가게 됐으니, 책 표지와 책소개만 읽다 책을 돌려줄게 아니라, 제대로 대출해서 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처음 대출하려고 사서에게 이름이랑 전화번호 뒷자리를 대니,

“이름이 예쁘네요.”

“이 책 신간인데.” 하고 책을 빌려줬다. 첫 대출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바일로 상호대차 신청을 했다. 한 번은 신청도서가 왔다는 문자를 받기 전에 백수 비즈니스를 보려고 도서관에 갔다. 사서는 문 열리는 소리 듣자마자 내 얼굴을 보더니, “마침 신청 도서 도착 문자 보내려고 했는데. 타이밍이 딱 맞네.” 하고 책을 건넸다. 신청 도서를 지체 없이 수령한 건 좋았는데, 고작 한 번의 대출로 사서가 내 이름과 얼굴을 기억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두 번째로 예약 도서를 받으러 갔을 때, 내 실수로 타관에 책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신청한 도서관으로 가봐야 할 것 같네요. 안녕히 계세요.”

사서는 “아? 오늘은 더 있다가 안 가세요?”라고 말했다. 사서는 내 이름, 얼굴, 매일 두 시간 동안 도서관에 앉아있는 내 습관을 안다. 매일 도서관에 왔으니, 사서가 나를 모른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만, 단 시간에 너무 많은 정보를 상대방에게 넘겨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친해지기에 앞서서 간파당했다.’



한 달 만에 도서관에서 백수 비즈니스로 시간 보내는 것을 그만뒀다. 아예 도서관에 발 길을 끊은 것은 아니고, 무직자 비즈니스는 독서실에서, 도서관에선 일주일에 한 번 책을 대출하고 반납하는 걸로 바꿨다.


사서가 내 얼굴 이름을 안 다는 사실은 매일 2시간 동안 동안 멀찍이 떨어져 말 한마디 없이 앉아있을 때는 부담이었지만, 잠깐 책을 주고받는 사이에서는 편리한 점이 있다. 회원 번호나 대출카드가 없어도 책을 빌릴 수 있다거나, 전에 눈독 들였던 책이 반납되면 사서가 직접 책장에서 책을 찾아준다 던가 하는 일이 그렇다. 요즘은 책을 빌리거나 반납할 때, 책에 대한 가벼운 대화를 나눈다. 질문하는 쪽은 대체로 사서다.

“그 책 무슨 얘긴데요?”

“12살에 올 된 사람 얘기요.”

“그거 재밌나요?”

“마지막까지 큼지막한 사건이 펑펑 터져서 긴장을 놓을 수가 없어요.”

“그거 나중에 제가 대출해야겠네요.”

책에 대한 관심 정도가 딱, 내가 안전하게 느끼는 선이다. 도서관에 오고 간지 3개월, 질문 많은 도서관 사서에게 적응이 된 듯도 하다. 다시 비용 절약을 위해 도서관에서 시간 보내기는 할 수 없겠지만, 이번엔 내 쪽에서 “사서 선생님의 추천 도서는 뭔가요?” 물을 정도로 안전거리를 당겨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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