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요리에 편견은 없는데
비싼 항공료를 생각해 자유여행 일정을 ‘3박 4일 런던 핵심 관광지 정복 패키지여행’ 수준으로 빡빡하게 계획했다. 스스로 짠 일정이라 징징거리지도 못하고 무거운 다리를 끌며 V&A 박물관을 돌고 있었다.
“저기 좀 앉자.”
엄마 말에 냉큼 돌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더 돌아봐도 머리만 나오지 않을까?”
우리가 앉아 있는 벤치 앞에도 머리만 남은 불상이 세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애써 약탈품을 둘러볼 필요가 없다는데 마음이 기울었다.
“박물관 근처에 있는 식당 예약을 5시에 해놨는데, 취소하고 숙소 근처에서 먹을까.”
“그러자.”
그렇게 해서 체크인 한 호텔 근처에 있는 피자집에 갔다. 이제 막 영업을 개시한 듯, 종업원이 대걸레로 바닥을 닦는 중이었다. 우리가 테이블에 앉자, 종업원은 걸레자루와 물받이를 벽에 기대놓고 주문을 받았다. 까르보나라와 치킨 리조토, 콜라 한 병. 얼마 후에 한 손님이 어린애 두 명을 데리고 가게에 들어와서 피자를 시켰다. 주문은 우리 쪽이 먼저 했는데, 그쪽 테이블로 음식이 먼저 나왔다. 작은 콜라 한 병을 엄마와 나눠마시며 ‘기다리다 굶어 죽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대접에 한가득 파스타면과 리조토가 담겨있었다.
“양은 진짜 푸짐하다.”
“먹자.”
엄마와 나는 앞에 차려진 음식을 한 입씩 먹고 눈빛을 교환했다. 까르보나라는 수분 감 없이 골판지 씹는 것처럼 퍽퍽했고, 리조토에서는 올리브 유가 뚝뚝 떨어졌다. 이게 소문으로만 듣던 ‘영국 요리’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먹었던 까르보나라, 리조토가 ‘한국요리’ 였던 것인가 긴가민가했다. 옆에 피자 먹던 일가족은 토핑이 없는 부분을 산더미처럼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잇자국이 남은 피자조각을 의심스럽게 쳐다보며 우리 앞에 할당된 몫의 음식을 입에 퍼넣었다. 종업원이 우리 테이블로 와서 음식이 어떻냐고 물었다. 서툰 영어로 리조토가 너무 기름진 것 같다고 말했다. 엄마는 부족한 언어적 표현을 거들기 위해 리조토에서 퍼낸 잉여 기름을 티슈 위에 따라냈다. 축축하게 기름으로 젖은 티슈를 본 종업원의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자리를 떴다. 곁눈질해 보니, 불만사항을 주방장에게 전달하는 듯했다. 주방장이 성난 목소리로 종업원에게 몇 마디 했다. 종업원은 퉁명스럽게 주방장에게 대꾸했다.
주방장의 거친 손짓과 날 선 목소리로 추측하건대, 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을까 싶다.
‘손님이 리조토에 기름이 많다고 해요.’
‘뭐? 기름이 많아?’
‘기름이 많긴 한가 봐요. 숟가락으로 떠서 티슈에 들이붓던데요?’
‘요리에 대해 뭘 안다고 지껄여.’
‘제가 그러는 게 아니라, 손님이 기름이 많다잖아요.’
한참 주방장과 언쟁하던 종업원이 비장한 표정으로 우리 테이블로 돌아왔다.
“조리사의 말에 따르면, 이 기름 사태(This Oil Situation)는…”
안 그래도 영어가 짧은데, 주방 쪽에서 주방장이 거친 손길로 팬을 화구에 패대기치는 소리에 정신이 팔려 종업원의 설명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문맥상 ‘원래 그렇게 조리하는 요리다.’라는 의미인 듯싶었다. 마음 같아선 유창하게 ‘내가 아는 리조토는 기름에 말아먹는 밥이 아닌데?’라고 항의하고 싶었지만 투 머치 오일이 표현의 한계였고, 조리법을 건드리면 요리사가 주방에서 쫓아 나올 것 같았다. 하우 아 유?라고 물으면 무조건 아임 파인이라고 대답하듯, 이해했다고 하고 종업원을 돌려보냈다.
남은 음식을 퍼 먹는 내내 주방에서 들리는 소리가 신경 쓰였다. 피자 손님이 나간 후로는, 가게에 손님이라고는 나와 엄마 단 둘 뿐이었는데, 주방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큰 식칼로 도마를 퍽퍽 내려치기도 하고, 피자 도우가 쿵쿵 소리를 내며 조리대에 내리 꽂혔다. 그 모든 소리가 “요리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분노한 주방장의 화풀이처럼 들렸다.
주방 바로 앞에 계산대가 있었는데, 파티션이 없는 개방형 주방이라 계산하는 내내 주방장과 눈이 마주칠까 봐 무서웠다. 카드를 내밀자, 종업원은 서비스가 어떠셨냐고 물었다. 계산대에서 나누는 모든 대화가 주방장에게 들어갈 터라, 혀에 기름을 치고 음식이 딜리셔스 했고 당신의 서비스가 나이스했다고 대답했다. 종업원은 또다시 ‘Oil Situation’을 언급했다. 질겁하고 신경 쓰지 마세요 네버 마인드 네버 마인드를 반복했다. 성난 주방장 손에 피자 도우처럼 납작해져 화덕에 들어가지 않으려면 그게 최선이었다.
설연휴 첫날, 점심은 떡국이었다. 위에 참기름이 안 뿌려져 있어서 아쉬워하던 차에 몇 년 전의 ‘기름 사태’가 떠올랐다. 생각난 김에 그 피자 가게 리뷰를 찾아봤는데, ‘메뉴판엔 판다고 적혀 있는데 리조토를 안 팔아요ㅠ’ 3개월 전 한국인이 남긴 별 한 개짜리 후기가 있었다. 그 ‘오일 시추에이션’ 이후로 한국인에게 리조토를 팔지 않게 됐다고 여기는 건 자의식 과잉이겠지. 스크롤을 내려 6개월 전에 작성된 다른 사진 리뷰를 보니, 여전히 그 괴팍한 주방장이 근무 중인 듯했다. 해산물 리조토가 올리브 오일에 둥둥 떠다녔다. 주방장의 한결같은 요리 철학에 감탄하며, 1점짜리 리뷰에 좋아요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