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로서의 신발과 자신으로서의 신발
나는 남해안 어느 어촌에서 이 사진을 찍으면서 반 고흐의 “구두” 그림을 떠올렸다. 고흐의 구두 그림으로 부터 시작된 논쟁에 대해서 돌아 보게 만들었다.
제일 먼저 철학자 하이데거가 등장한다.
하이데거가 신발을 보는 관점
그는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예술작품은 전통 철학에서 강조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리”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리를 뜻하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아란 말은 탈은폐 (숨어 있지 않음)이다. 존재는 숨어 있지 않으나 인간의 협소한 눈에는 보이지 않거나 왜곡되어 보인다. 하이데거가 찬양하는 이 그림은 눈에 보이는 사물로서의 구두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도구적 연관을 맺고 있는 구두이다. 존재자가 아니라 인간의 삶이 녹아 있는 ‘존재 (being there)’ 그 자체이다. 반 고흐의 그림을 보면 우리는 심지어 이 구두가 어느 곳에 있는 것인지를 알 수 없다. 이 한 켤레의 촌 아낙네의 구두 둘레에는 그것이 귀속될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이, 다만 무규정적 공간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이 구두가 사용되었음을 암시해주는 최소한의 밭의 흙이나 길바닥의 흙조차도 묻어 있지 않다. 다만 한 켤레의 촌 아낙네의 구두가 있을 뿐 더 이상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두라는 도구의 밖으로 열린 내부의 어두운 구멍 틈으로부터 들일을 하러 나선 이의 고통이 응시하고 있다. 구두라는 도구의 실팍한 무게 가운데는 거친 바람이 부는 넓게 펼쳐진 평탄한 밭고랑을 천천히 걷는 강인함이 쌓여 있고, 구두 가죽 위에는 대지의 습기와 풍요함이 깃들어 있다. 구두창 아래에는 해 저물녘 들길의 고독이 스며들어 있고, 이 구두라는 도구 가운데는 대지의 소리 없는 부름이, 또 대지의 조용한 선물인 다 익은 곡식의 부름이, 겨울 들판의 황량한 휴한지 가운데서 일렁이는 해명할 수 없는 대지의 거부가 떨고 있다. 이 구두라는 도구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빵의 확보를 위한 불평 없는 근심, 다시 고난을 극복한 뒤의 말없는 기쁨, 임박한 아기의 출산에 대한 조바심, 그리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의 전율이다. 이 구두라는 도구는 '대지Erde'에 귀속해 있으며 촌 아낙네의 '세계Welt' 가운데서 보존되고 있다. 이 같은 보존된 귀속으로부터 도구는 자체의 자기 안식 Insichruhen이 생긴다. 그의 이 그림에 대한 상상력을 동원한 표현은 너무도 아름답다. 시골 아낙네의 발에 신겨져서 황량한 밭고랑을 누비다가 대지의 부름과 궁핍을 넘어서는 기쁨 그리고 죽음에 대한 전율이 느껴진다고 표현하면서 열린 세계와 닫힌 대지간의 투쟁이 이 그림에서 표현되고 있다고 강조하는 대목에서 절로 탄복이 터져 나온다. 그는 고흐의 그림에서 다름 아닌 진리의 본질을 본다.
사비로의 관점
그런데 고흐 그림에서 하이데거가 본 것은 사용 도구로서의 신발이었다. 신발은 인간에게 도구의 역할만 하는 유용성으로서만 존재하는가? 다른 존재일 수는 없는가?
바로 이런 점에서 고흐의 신발 그림을 보는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 미술사학자 샤피로이다. 그는 하이데거를 혹독하게 비판한다. 하이데거는 자신을 위하여 자신을 철저하게 속였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반 고흐의 그림을 보면서 능부와 토양에 얽힌 일련의 감동을 간직해 왔다. 하지만 농부와 토양은 그 그림 자체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원초적이고 소박한 것에 대한 강한 파토스pathos를 지닌 하이데거 자신의 사회적 관점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심지어 '모든 것을 상상했고 그것을 그 그림 속에 투사했다. 그는 반 고흐의 그림과 너무 적게, 그리고 너무 많이 접촉해왔다고 지적을 한다. 그러면서 1880년대 크누트 함순 Knut Hamsun이 쓴 소설 『굶주림』에서 그가 신발에 대해 묘사한 문장들을 인용한다. .
'”마치 내 신발을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것처럼 나는 내 신발의 모양새와 특징을 관찰하기 시작했고, 내가 발을 움직일 때 신발의 형태와 닳은 윗부분을 연구해보았다. 나는 내 신발의 주름과 하얀 실이 신발을 표현한다는 점을, 다시 말해 인상을 준다는 점을 발견했다. 내 고유한 본성의 무언가가 이 신발 속으로 들어갔고 신발들은 마치 또 다른 나의 유령, 내 자아의 숨 쉬는 일부인 것처럼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
함순의 글과 반 고흐의 그림을 비교할 경우, 우리는 하이데거와 다른 방법으로 그림을 해석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신발 그림 속에서 농부가 살아 온 세계의 진실을 발견한다. 함순은 신발 착용자를 바라보는 자의식을 통해 경험된 실제 신발을 보았다. 반 고흐의 상황은 생각에 잠겨서 스스로를 관찰하는 함순의 소설 속 인물에 더 가깝다. 고흐는 자신의 신발을 그린 것이다.
노동하는 예술가로서 반 고흐에게 자신의 신발은 그를 깊게 감동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사물들은 그의 몸에서 분리될 수 없으며 자기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인상적인 것이다. 그는 캔버스에 그려진 자신의 낡은 신발에서 분리되어 그 신발의 관찰자가 된다. 그는 신발을 자화상의 한 부분으로 여기는데, 그것은 우리가 걸치고 땅을 밟는 의복의 일부이며 움직임과 피로, 압박, 무거움(즉, 땅과 접하여 직립한 몸에 가해지는 부담)이라는 부담이 깃든 부분이다. 신발은 땅 위에서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위치를 표시한다. '누군가의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그와 같은 곤경에 처한다거나 그의 삶의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화가가 낡은 신발을 그림의 주요 주제로 재현한 것은 자신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숙명에 관한 표현이다. 반 고흐가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사용 도구로서의 신발이 아닌 (함순의 말대로) '자신의 일부분'으로서의 신발인 것이다.
고흐의 관점
실제로 아를에서 수개월 간 반 고흐와 함께 생활했던 고갱은 반 고흐의 신발과 깊게 연관된 이야기를 회고한 적이 있다.
“작업실에는 커다란 징이 박힌 신발이 있었는데, 완전히 낡고 진흙이 뒤범벅된 신발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놀라운 정물화로 만들었습니다. 이 오래된 유물에 대해 사연이 있다고 왜 의심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느 날 용기를 내어 굉장히 미안한 말이지만, 보통 사람들 같으면 버렸을 것 같은 넝마 같은 신발을 보관하고 싶은 이유가 있는지 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목사셨고 그의 바람에 따라 미래 직업을 위해서 나는 신학을 공부했네. 신임 목사가 된 나는 어느 화창한 아침, 가족에게 말하지 않고 벨기에로 떠났고 거기 공장에서 내가 배운 대로가 아닌 내가 이해한 내용으로 말씀을 전했다네. 이 신발들은 보시다시피 그 여행의 고단함을 꿋꿋하게 견뎌 주었네”
이 그림은 고흐의 자화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고흐가 그린 구두는 1886년 파리 벼룩시장에서 샀는데 맞지 않아서 그림 소품으로 사용한 것이다.
데리다의 관점
하이데거는 반 고흐가 그린 구두를 농촌 아낙네의 구두로 귀속시키고 이 구두를 통해 존재자의 존재를 개시함으로써 예술은 진리의 비은폐성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반면 미술사학자 샤피로는 반 고흐의 구두는 농촌 아낙네가 아닌 반 고흐 자신의 투영물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들과 다르게 구두의 소유권은 그 누구에게도 반환되지 않은 채, 최종적인 불확실성의 상태로 남는다고 주장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진리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예술은 '모방'도 아니고 '실재'를 복사하는 '기술'도 아니며 '재현'도 아니다. 반면, 샤피로의 경우는 실제 신발을 불러낸다. 그에게 그림은 신발을 모방하고 재현하고 재생산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신발의 귀속은 실제나 혹은 실제로 여겨지는 주체에게, 그리고 개인에게 속하는 것으로 결정되어야만 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더 이상 신발끈은 없으며, 더 이상 눈에 보이는 매듭도, 구멍이나 신발끈을 꿰매는 작은 구멍도 없고, 완전히 발과 붙어 있는 신발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 '잘 알려진 그림'이 무엇인가를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순간에도, 그 그림의 상태는 우리를 최종적인 불확실성 안에 남겨둔다. 우리는 증거가 생산되도록 도전하면서 언제나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그림에 대해 말하고자 의도하지 않으며, 그것을 이렇게 기술하지도 않고, 제품(농부의 신발)의 예시로부터 예시의 예시(특정 그림의 특정 신발)까지, 나아가 예시를 보여주는 것 exemplarity으로부터 제품-존재까지, 양 방향에서 규칙적으로 통과하며, 제품-존재의 속성을 골라내고 다른 것을 떨쳐내도록 한다고 말이다
나의 구두 사진
데리다는 왼짝이 두 개로 구성된 구두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그림을 볼 때 그림이 말을 걸어 올 때까지 경건하게 기다려야 한다고 충고한다. 먼저 말을 하면 결국 자신의 말만 듣는 셈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내가 찍은 사진은 실제로 바닷가 어부의 집 담벼락에 버려진 구두 한 켤레 이다. 하이데거 표현대로 어느 어부가 그 신발을 신고 갯벌을 누비거나 배를 타고 고기를 잡았다. 새벽 어둠이 걷히지 않는 시간에 물때를 맞추어 나가서 이리저리 다니며 바다 식량을 거두어 들이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돌보았던 고단이 묻어 있는 신발이다. 석양 노을이 물드는 저녁 시간에 갯벌이 잔뜩 묻은 신발을 나뭇잎에 문지르면서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희망했던 것이다. 때로는 저조한 어획고에 절망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조여 매었던 생활을 견디었다. 고흐의 구두나 내가 찍은 구두나 모두 한낱 사물일 뿐이다 그런데 인간이 볼 때에는 사물 이상의 존재 가치가 있다. 특히 사람의 발에 신겨져 있을 때 보다 벗겨져 내팽개쳐져 있을 때,다시 말해 구두로서의 사명을 다 한 후에 버려진 구두는 사람을 떠나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현시한다. 사람으로부터 잊혀져 독자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사람의 발에 신겨져 있을 때에는 그 누구도 신발의 존재를 망각하고 만다. 그러나 사람의 입장에서 벗어나 스스로 존재할 때 구두라는 사물은 스스로 독립성을 획득한다. 버려진 구두는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눈-앞에-있음 이 아니라 손-안에-있음이다 용도를 다하고 버려져 있을 때, 즉 작동하지 않을 때 사물은 그 실재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한 켤레 구두의 정확한 재현은 그것이 덮어야 할 벗은 발과 빈틈없이 닮아야 한다. 그런 신발이 막상 벗겨져 있으니 새삼 신발의 고마움이 절절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차마 폐기 처분하지 못하고 담벼락에 모셔 놓은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