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랑쇼와 말라르메에게 꽃이란
김춘수는 "꽃" 이란 사물에 이름을 불러주면 비로소 나에게 의미가 된다고 나긋나긋하게 (제가 지켜 본 바로는, 본인의 생김새와 본인의 실제 언어와는 다소 다르게) 이야기했다.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런데 꽃에 이름을 불러주면 의미가 될 것인가? 메릴로-퐁테는 "의미란 그 자신을 산출해주는 어떤 '관계 자체'이며, 따라서 이것은 고착된 결정성이 아니라 개방된 생명성인 것이다. 당연히 이 의미는 변모하면서 구현된다"고 말한다. 의미는 표상적 진리의 질서에 속하지도 않을 뿐더러, 사물들에 의해 확증된, 기의와 기표 사이의 의미 조작 차원에서 발생하지도 않는다. 결국 의미는 기호들과 언어작용langage에 내재적인 것으로 남는다.그러니 김춘수에게 의미다가온 꽃의 의미는 시간에 따라 얼마나 어떻게 변했을까?
여기에 꽃의 의미에 대한 전혀 다른 이야기를 소개한다.
"시적인 말은 다만 일반적 언어에만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마찬가지로 사유의 언어에 대립된다"
블랑쇼는 이렇게 말한다. 물론 언어는 형태상으로 보면 기표와 기의의 결합으로서 어떤 의미를 지정하는 부정의 언어이기는 하다. 문학에서의 행위가 가져오는 효과의 측면에서 보면 궁극적으로 모든 의미는 에 괄호를 치면서 모든 의미 규정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는 중성적인 것의 언어가 된다. "특별히 이렇게 말해야만 한다. 이 언어에서 기표와 기의 사이의, 또는 우리가 부당하게 형식이라 부르는 것과 내용이라 부르는 것 사이의 관계는 무한해지게 된다"
모든 의미 규정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무한성의 기표를 증명하는 언어의 궁극적 자율성을 반증하는 그러한 시적 효과에 대해 말라르메는 '꽃fleur'이라는 단어를 예로 들어 간결하게 말했다. "말의 놀이에 의해 하나의 자연적 사실을 떨림 속에서 거의 사라지게 하는 이 경이로운 전이는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그 전이로부터 유사하고 구체적인 것을 불러일으키는 환기에 개의치 않고 순수 개념이 산출되지 않는다면 나는 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내 목소리가 어떠한 윤곽도 떨쳐내 버리는 망각 바깥에서, 알려진 모든 꽃들과 다른 것이, 모든 꽃다발의 부재인 그윽한 관념idée 자체가 음악적으로 떠오른다."
'꽃'이라는 단어는 하나의 관념을, 꽃의 관념을 불러 세운다. 그러나 여기서 꽃의 관념은 의식에 다시 나타난 꽃의 재현re-présentation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보이는 꽃들을 환기시키지 않으며, 꽃 일반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이해할 수 있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요구되는 의식의 일반적 표상이 아니다. 꽃의 관념은 꽃 일반을 대신하지 않으며, 오히려 “알려진 모든 꽃과는 다른 것"이고, 모든 꽃의 "부재"로서의 꽃의 주어짐(존재) 자체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꽃들을 지칭하고 그에 따라 꽃들을 유사하게 재현(모방)하는 표상 représentation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꽃들을 "떨림 속에서 거의 사라지게 하는 꽃 자체의 역동적·동시적 현시 présentation이다. 말라르메가 '관념'이라는 말을 빌려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단어가 쓰이는 맥락에 따라 지칭된 사물에 대한 재현을 초과하는(그 초과를 말라르메는 "모든 꽃의 부재"라고 말한다), 존재의 현시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의 언어의 핵심은 사물을 의미를 밝혀 '고정시키는데,' 규정하는 데 있지 않고, 단어의 발화와 더불어 생성하는 사물의 '존재'와 인간의 탈존이 접촉하는 지점, 사물이 지워지고 ("모든 꽃다발의 부재") 탈존이 익명적인 것이 되는 역동적인 지점, 역사가 아닌 순간에 드러나기에 현재하는 동시에 부재하는 지점을 그리는 데 있다. 시는 하나의 사물을 가리키고 그 사물의 의미를 드러내는 작용을 넘어서서 사물과 인간의 보이지 않고 표상될 수 없는 접촉점을 지시하는 언어의 움직임을 그린다. 그러한 언어의 움직임에 대해 말라르메는 언어에 그려지는 꽃을 예로 들고 '관념'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꽃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꽃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 꽃이 말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사건(존재)과 그에 대한 말하는 자의 응답의 사건(탈존)을 개시하며, 보이는 사물인 꽃을 보이지는 않지만 감지되는 울림으로, 내면의 규정될 수 없는 흔적으로, 즉 '관념'으로 전환시킨다. 그때 비로소 언어는 사물을 단순히 가리키지 않게 되고 그 스스로 "감각 앞에서 지워지게 된다. 그때 비로소 언어는 "단어 없는 시"로 생성된다.
블랑쇼나 말라르메에게 꽃은 눈에 보이는 사물로서의 존재 보다는 감지되어 내면에서 울리고 지나가는 흔적으로서, 지워지고 사라져 가는 언어로서, 언어가 없는 언어로서 현전한다. 그것은 기표 중의 기표이고 이미적 언어이고 바깥이다. 한마디로 꽃의 의미는 없다. 춘수는 틀렸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