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皮)면을 뚫고 자라난 너에게 보내는 시선

by 권혜연

코로나 시대로 청결이 강조되었다지만 그 이전부터 내겐 하나의 의식처럼 자리 잡아 스스로 수련인임을 드러내왔다. 피부의 먼지를 스폰지로 박박 문대고 뽀득한 소리가 날 정도로 씻고 나면 몸이 깨끗한 것만으로도 성지(聖地) 입성의 조건을 갖춘 양 자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몸에 난 털 하나도 곱게 보지 못하는 눈을 달고서 말이다.
내 샤워 의식 중 하나는 다리와 겨드랑이의 털을 깨끗이 밀어내는 것이다. 남성에겐 드러나도 그만이지만 여성에겐 약간의 부끄러움이 동반될 수 있는 겨드랑이털은 그렇다고 치자. 수련할 때는 발목까지 덮는 레깅스를 입으면서 다리털까지 뿌리 뽑지 못해 안달하는 마음의 상태를 10년이나 끌고 온 이유가 궁색하다. 나는 한 번도 털을 들여다본 적이 없다. 털을 거둬낸 맨피부만을 탐해온 것이다. 여기에는 “차가운 우월감”이 있다. 마치 성장의 과정에서 내가 남들보다 섬세한 무언가를 더 해왔기 때문에 당연히 결과가 나에게 좋은 것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픈 암묵적인 자기 암시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과장인 듯 과장이 아니다. 치마를 걸치거나 미를 중시하는 여성의 기준에서는 다리털을 관리하는 것은 필수 사항이다. 그러나 나에겐 미를 위한 목적성이 애초부터 없었다.
2020년 12월과 2021년 1월을 통틀어 6주 동안은 프리랜서들의 암흑기였고 나 또한 기약 없이 수업이 열리기만을 기다려야만 했다. 어쩔 수 없는 고립을 경험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누렸던 따뜻함이 점차 식어갔고 어느 날부터 맨피부가 서늘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겨드랑이든 다리든 어느 곳이든 내 피부가 살아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고 싶어졌고 그렇기만 하면 온몸을 감도는 냉기가 좀 줄어들 것만 같았다. 나는 그날부터 그냥 될 대로 내버려 두었다. 며칠간은 아무 변화 없이 잠잠했다. 특별히 지저분한 느낌도 없어서 10년간의 습관이 이젠 내 몸의 생명력을 끊어낸 듯한 착각마저 들어서 조금은 불안했다. 그러다가 간질~간질 짧은 털들이 피부를 뚫고 나오는 불쾌감이 고여있던 한기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모양을 갖추지 못한 그것들은 어설펐고 성나 보였다. 오래간만의 세상 구경으로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 줄만 알지 영 부자연스러웠지만 그래도 반가웠다. 작은 화분에 깊숙이 심어진 씨앗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느낌과 같았다. 생명력. 흙을 품은 대지에서나 느껴질 법한 감동을 몸의 피부에서 희열로 경험한 사람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털들은 자라고 싶은 만큼 자라나기 시작했고 모양을 갖추면서 얌전해졌고 주변으로 번졌고 맨피부를 감싸 주었다. 나는 이제 습관처럼 손바닥에 종아리 털을 문지르면서 위안을 얻고 살아있음을 확인받는다. 깔끔과 청결을 위한 척결 대상이었던 털은 이제 없다. 내 몸에 털이 없어 수련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털이 있어 못하는 것도 아님을 안다. 시선을 한번 정화하고 나니 그다음은 계속이다. 가치와 고정관념, 평가와 질타로 저평가된 다른 것들이 이게 다일까. 시선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마음과 생각을 정돈할 필요가 있다. 마음 안에 들여놓은 색깔들을 모조리 거둬내자. 생각의 진열들을 모두 흩트리고 날개를 달아주자. 이것과 저것의 배열을 끌어다가 묶은 밧줄을 풀어내고 자유를 마시게 하자. 그리하여 너에게 닿는 시선에서 나를 볼 수 있게. 그 시선 안에 들어찬 내가 답답하지 않게. 차가워지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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