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희준 Dec 18. 2024

26화. 투항

<흑마법서> 소설 연재

 폭동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결국 대형 사고가 벌어졌다. 서울의 인드라망 발전소 중 한 곳이 소화 폭도들의 공격으로 폭발하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흥분한 폭도들이 발전소에 침입하여 중앙처리장치실의 기계를 함부로 건드렸는데 그 바람에 과부하가 일어나 발전소가 폭발해 버렸다.

 중요 인드라망 발전소 중 한 곳이 파괴되면서 서울의 인드라망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서울 일부 지역의 수도와 전기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고 전기가 아예 나가버린 곳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불사신 서점은 지점 안에 내장된 독자적인 마력을 통해서 전기와 수도가 돌아갔기 때문에 발전소 폭발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물론 소화인 및 친소파 폭도들이 불사신 서점을 그냥 놔둔 것은 아니었다. 서점이 있는 양천구 신정동 역시 폭동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신정동의 소화 폭도들은 어느 날부터인가 서점으로 달려와 서점의 유리창을 향해 돌을 던져댔다. 김구름이 재빨리 문을 잠갔기에 망정이지, 만약 문이 열려 있었다면 폭도들이 서점 안으로 밀고 들어왔을 것이다. 폭도들은 서점 유리창을 깨기 위해 열심히 돌팔매질을 했지만 유리는 끄떡없었다. 사실 불사신 서점의 유리창은 보기에만 투명한 유리일 뿐, 사실은 아주 강력한 특수 물질이었다. 이는 유리창뿐만 아니라 서점 전체가 마찬가지였다. 불사신 서점은 아주 강력한 방어력을 갖고 있었다. 전 세계의 모든 지점이 그러했다. 지구상 곳곳에 있는 온갖 흉악하고 잔인한 종족들과 그보다 더 위험한 자연환경들에서 서점을 열고 영업을 하기 위해서는 그런 강력한 방어력이 필수적이었다. 혜성이 불사신 서점의 역사서에서 읽기로 지금까지 불사신 서점은 수많은 공격을 받았지만 단 한 번도 파괴된 적이 없다고 했다. 돌멩이로 돌팔매질을 하는 정도로는 불사신 서점에 흠집도 낼 수 없었다.

 “우리 서점이 그렇게 튼튼하다니, 정말 놀랍네요.”

 혜성의 말에 김구름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름이 괜히 불사신 서점이겠습니까?”

 “아니, 근데 말이야.”

 박준식이 투덜거렸다.

 “저 사람들은 왜 우리한테 돌을 던지는 거야?”

 그들은 서점 안의 성에서 차를 마시면서 TV로 서점 밖의 풍경을 보고 있었다. 유리창 밖에서는 성난 군중이 유리를 깨뜨리기 위해 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있었다. 그들은 차를 마시면서 서점을 향해 돌을 던지는 폭도들의 모습을 감상했다. 유리창 바깥쪽에는 유리에 맞고 떨어진 돌멩이나 깨진 병들이 바닥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겁먹었나, 고양이? 걱정하지 마, 저 유리는 절대 안 깨져.”

 이태민의 말에 박준식은 가르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안전한 건 알겠는데 기분 나쁘잖아. 왜 가만히 있는 우리한테 돌을 던지냐고.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음, 제 생각에는,”

 혜성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때문인 것 같아요.”

 “사장님이요?”

 김구름이 물었다.

 “네. 저번에 저 사람들이 외치는 말을 들어보니까 저를 불순분자라고 욕하더군요. 아무래도 제가 제국과 계약하지 않은 걸 두고 그러는 것 같아요.”

 “불순분자라.”

 김구름이 코웃음을 쳤다. 이태민도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또 그 놈의 불순분자 얘기로군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소화 놈들한테 불순분자 소리를 안 들을 수가 있을까?”

 박준식이 물었다.

 “안 들을 수는 없어. 숨만 쉬어도 갖다 붙일 수 있으니까.”

 이태민이 대꾸했다.

 “사장님이 제국의 계약 요구를 거절한 것을 저들이 어떻게 알았을까요?”

 김구름의 물음에 이태민이 대답했다.

 “간단합니다. SNS에서 소문이 퍼졌어요.”

 “진짜요?”

 혜성이 물었다.

 “네. 사장님은 SNS 잘 안 하시죠?”

 “가끔 하긴 하는데......”

 “소화인들의 폭동이 터진 후에 친소 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를 중심으로 이른바 ‘불순분자 리스트’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폭도들이 그 리스트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테러를 저지르고 있어요.”

 “잠깐만, 그럼 그 불순분자 리스트에 저도 포함되어 있다는 건가요?”

 “물론이죠. 사장님은 그것도 ‘악질 불순분자’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제국의 계약 요구를 거절하셨잖아요. 그게 소화인들과 친소파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죠.”

 박준식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하여간 인터넷이 문제라니까. 지금 인터넷에서 소화인과 친소파를 중심으로 가짜 뉴스가 돌고 있어요. ‘한국인이 상수도에 독을 풀었다’ 이런 이야기가 퍼지고 있다니까요. 그런 것들이 소화 폭도들을 더 흥분시키는 것이고요.”

 김구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사장님, 점점 상황이 위험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밖에 나가지 마시고 조심하셔야겠어요.”

 김구름은 그렇게 말하며 작은 털북숭이 손으로 혜성의 등을 토닥였다.

 “사장님, 많이 상처받으셨죠? 힘내세요.”

 “고맙습니다.”

 혜성은 중얼거리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제가 불순분자 리스트에 올랐다면 윤이도 위험하지 않을까요? 걔는 제 약혼녀니까 윤이한테도 불똥이 튈 수 있잖아요.”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죠. 하지만 여왕이 사는 곳은 우리 못지않게 튼튼한 방어력을 갖추고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은 여왕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 사장님의 안위가 가장 중요해요. 저들이 직접적으로 노리는 건 여왕이 아니라 사장님이니까요.”

 폭도들은 이제 망치로 유리를 치고 있었다. 혜성은 유리를 두들기는 사람들을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김구름에게 눈을 돌렸다. 김구름의 새하얀 털로 뒤덮인 얼굴의 까만 두 눈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은 진심으로 혜성을 걱정하고 있었다. 혜성은 그 눈빛에 고마움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전 제 몸은 걱정하지 않아요. 이사님과 여러분이 있잖아요.”

 그 말에 박준식과 이태민이 웃음을 터뜨렸다. 박준식이 말했다.

 “갑자기 왜 그런 로맨틱한 말을?”

 “아니, 그냥 뭐...... 옛날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혜성은 민망해서 김구름의 손을 놓았다. 하지만 김구름은 활짝 웃으며 그를 껴안았다.

 “사장님은 멋지고 훌륭한 분이에요. 우린 모두 사장님이 좋아요.”

 “감사합니다.”

 혜성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이사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전 진심이랍니다.”

 김구름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김구름, 적당히 해. 사장님은 이미 약혼녀가 있다고.”

 박준식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그들이 그렇게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김구름의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김구름의 표정이 변했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김구름은 전화를 끊더니 말했다.

 “사장님, 제가 한 달쯤 전에 탐정을 고용한 거 기억하시죠? 양기범을 추적하라고 고용한 사람이요.”

 “네. 연락이 왔나요?”

 “찾았다고 합니다.”

 “오!”

 혜성이 물었다.

 “이런 시국에 양기범을 찾았다고요?”

 “이런 시국이라서 찾는데 한 달이나 걸린 것 같습니다.”

 이태민이 물었다.

 “지금 어디 있대요? 살아있대요?”

 “지금 제국중앙은행에 갇혀 있답니다.”

 “네?”

 “제국중앙은행 노예 수용시설 안에요.”

 김구름은 노트북을 꺼내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는 탐정이 보낸 메일을 읽으며 말했다.

 “음, 양기범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이 전부 그곳에 갇혀 있다는 군요.”

 “어쩌다가 노예가 된 거예요?”

 “우리 때문이죠. 우리 예상대로 SJ는 완전히 망했대요. 그런데 문제는 SJ는 당시 제국중앙은행에 사업자금을 대출받은 상태였는데, 우리 때문에 보유한 노예들을 모두 잃자 파산해버린 겁니다.”

 혜성은 눈을 찌푸렸다.

 “근데 양기범은 매려 궁전에서 저를 습격했잖아요.”

 “그렇죠. 회사가 파산하고 대출을 갚지 못하게 되자 양기범의 가족 모두가 노예로 끌려갔다는군요. 그런데 끌려가는 과정에서 양기범 혼자만 간신히 탈출했다고 합니다. 홀로 도망친 양기범은 사장님에게 복수하기 위해 매려 궁전에 들어와서 사장님을 공격하다가 천하기둥 안으로 들어가 버렸죠. 그 기둥 안에 얼마 동안 있었는지는 탐정도 알지 못하지만, 녀석은 어떻게 해서 결국 기둥 밖으로 다시 나왔다고 합니다. 물론 사장님이 석정궁 2호점 공사장에서 천하기둥을 소환하기 전에 말입니다. 기둥에서 나온 양기범은 홀로 떠돌다가 제국은행의 노예 사냥꾼들한테 발견되어 잡혀간 것이죠.”

 “그랬구나......”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는 혜성에게 이태민이 말했다.

 “사장님, 혹시라도 죄책감을 느끼신다면 그러지 마세요.”

 ‘죄책감이라...... 들켰네.’

 혜성은 생각했다.

 “양기범이 노예가 되는 건 아무래도 괜찮지만...... 가족들까지 전부 노예가 되는 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죄책감이 들 수밖에 없죠.”

 혜성의 말에 박준식이 코웃음을 쳤다.

 “죄책감! 또 사장님의 그 죄책감이 발동했군! 사장님, 그런 일로 죄책감을 느낄 거라면 애초부터 양기범의 사업을 방해하지 마셨어야죠. SJ한테 노예와 구미호를 풀어주라고 할 때는 이런 일이 생길지 예상 못 하셨습니까?”

 “못 했어요.”

 혜성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진짜 못했어요. 그 때는 상황이 급해서 빨리 구미호들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만 했죠. 그리고 내친 김에 노예들까지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사장님은 구미호들만 구하려고 하셨지만 제가 옆에서 노예들까지 전부 풀어주라고 시켰잖아요. 제 책임도 있습니다.”

 김구름이 말했다.

 “하지만 저 역시 양기범의 가족이 노예가 된 게 우리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양기범의 아내와 아이들은 양기범이 노예 매매 회사를 해서 번 돈으로 평생 호의호식하며 살아왔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그들이 양기범의 죄와 무관하다고 하면 안 되죠.”

 “이사님은 양기범의 가족이 노예가 된 게 정당하다고 생각하세요?”

 혜성은 그렇게 말한 뒤 재빨리 덧붙였다.

 “그냥 궁금해서요. 이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게 궁금해서......”

 “정당하냐고요?”

 김구름은 조용히 웃었다.

 “물론 정당하지 않지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양기범은 지금껏 노예 매매를 ‘합법적인 일’이라고 정당화하며 사업을 불려왔습니다. 구미호 타운 습격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리고 그가 빚을 갚지 못해서 그의 일가족이 모두 노예로 끌려간 것 역시 합법적인 일입니다. 물론 우리가 양기범을 협박하고 그의 사업을 망하게 한 건 불법이지만, 대출을 못 갚았을 때 가족도 노예가 되는 건 엄연히 제국의 금융법이에요. 양기범은 마약 밀매를 제외하고는 아마도 평생을 ‘합법적인 일’을 하며 살아왔을 테니, 그와 그의 가족도 합법적으로 처리된 것일 뿐입니다.”

 혜성은 김구름의 말이 너무 냉혹하다고 생각했지만 대꾸하지는 않았다. 김구름은 미소를 거두고 말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가 있지 않나요?”

 “네?”

 “천하기둥 안에 있던 석판 말입니다.”

 “아!”

 혜성은 정신이 들었다.

 “맞아요, 기둥 안의 사원에 있던 석판을 틀림없이 양기범이 갖고 나갔을 거예요. 그렇다면 그가 갖고 있던 석판도 은행에서 가져갔을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김구름이 대답했다.

 “탐정이 알아내기로는 양기범은 사냥꾼들에게 잡혔을 당시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지갑과 휴대폰마저 없었다고 해요. 그러니 당연히 커다란 석판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태민이 말했다.

 “양기범은 기둥에서 나온 뒤 석판을 버리거나 어딘가에 숨겼겠군요. 그런 뒤 사냥꾼에게 발견된 것이고요.”

 “어쩌면 석판을 팔아버렸을 수도 있지.”

 박준식이 말했다.

 “음,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겠네요. 제 생각에는 양기범이 석판을 아무데나 버리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그는 천하기둥 안에 들어가서 사원의 벽화를 봤을 테고, 무엇보다도 석판이 제단 위에 모셔져 있었으니 그것이 귀중한 물건이라는 것을 눈치 챘을 거예요. 그러니 기둥에서 나갈 때 석판을 가져간 것이겠죠. 그런 귀중한 물건을 그냥 버리진 않았을 겁니다. 또 탐정의 말에 의하면 잡혔을 당시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했으니 석판을 판 것도 아닐 거예요. 만약 그가 석판을 팔았다면 수중에 돈을 지니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러니 아마 석판을 누군가에게 맡기거나 어딘가에 숨겨둔 것 같아요.”

 혜성은 그렇게 말한 뒤 덧붙였다.

 “제 생각에는 누군가에게 맡겼다기보다는 어딘가에 숨겼을 가능성이 더 큰 것 같아요. 노예 사냥꾼에게 쫓기고 있는 양기범을 도와줄 사람이 있었다면 그에게 조금이라도 돈을 주지 않았을까요? 양기범이 돈과 휴대폰도 없는 상태로 붙잡힌 걸 보면 그는 석판을 갖고 기둥을 나온 후로 도와줄 사람을 찾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죠. 물론 그가 잡혔을 때 어떤 상태였는지 제가 직접 보지 않아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요.”

 혜성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물었다.

 “그럼 이제 양기범과 가족들은 어떻게 되는 거죠?”

 김구름이 대답했다.

 “대출금을 갚지 못했으니 은행 소유의 노예가 된 거죠. 제국중앙은행의 노예 수용시설은 현금 대신 노예들을 저장해두는 거대한 금고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곳에 있다가 이제 곧 다른 곳으로 팔려가겠죠”

 “노예 상인이 노예가 되는 경우도 있구나.”

 박준식이 중얼거렸다.

 “양기범을 데려와야 합니다. 우리가 그를 돈 주고 사오는 수밖에 없겠네요.”

 혜성이 말했다.

 “우리가 노예로 만든 양기범을 우리가 구출해야 한다니, 이거 참. 세상일이 참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것 같아요. 안 그런가요, 사장님?”

 박준식의 말에 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접실의 TV 화면으로 보이던 서점 밖의 폭도들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도저히 부술 수 없는 유리를 한참 두들기다 지쳐서 다들 물러간 것이다. 서점 밖에는 돌멩이와 깨진 유리 조각, 버리고 간 망치 등이 잔뜩 쌓여 있었다. 혜성은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


 다음날 혜성과 김구름은 제국중앙은행 노예수용시설에 가서 일반적인 도깨비 노예의 값을 주고 양기범을 샀다. 수용시설에 갇혀 있던 양기범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을 본 양기범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양기범 씨, 오랜만입니다.”

 혜성이 말했다.

 “왜 날.....”

 그들은 입을 여는 양기범을 무시하고 그를 차에 태웠다.

 수용시설을 나와서도 양기범은 수갑을 차고 목에는 얇지만 튼튼한 고리가 채워져 있었다. 수용시설에서 노예를 넘겨받을 때부터 걸려있던 것이었는데, 노예를 산 주인은 노예와 함께 작은 리모콘을 하나 받았다. 노예가 반항할 때 리모콘을 누르면 목에 걸린 고리에 전류가 흘러서 노예를 감전시켜 꼼짝 못하게 하는 장치였다.

 그들은 양기범과 함께 곧장 서점으로 향했다. 양기범을 데리고 서점 안의 성으로 들어가자 이태민과 박준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 진짜 양기범이다.”

 박준식이 신기한 물건을 보듯 말했다.

 그들은 양기범의 수갑을 풀어줬지만 그가 갑자기 공격적으로 나올 때를 대비해 목에 걸린 전기 고리는 벗기지 않았다. 그들은 성 안에 있는 어느 방 안으로 양기범을 데려간 뒤 밥을 차려줬다. 양기범은 눈치를 보면서 쭈뼛거리며 식탁에 앉았지만 이내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는 그동안 노예 수용시설에서 싸구려 사료만 먹었던 것이다.

 그들은 밥을 먹는 양기범을 말없이 지켜봤다. 그리고 양기범이 식사를 끝내자 그와 함께 차를 마셨다.

 한동안 조용히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양기범이 입을 열었다.

 “날 왜 꺼내준 거지?”

 “노예에서 해방시켜주려고요.”

 혜성이 대답했다.

 “진짜? 날 해방시켜줄 거야?”

 “물론이죠. 당연히 그럴 생각으로 돈을 지불한 거예요.”

 “이유가 뭔데?”

 “죄책감을 느꼈어요.”

 “죄책감?”

 혜성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내려놓았다.

 “우리가 당신을 협박해서 당신네 회사를 망하게 한 것 말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전 그 일 자체는 후회하지 않아요. 아무리 노예제가 합법이라 해도 그건 정말 잔인한 제도입니다. 당신도 노예가 됐으니 제 말에 동의하겠죠?”

 양기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린 그 때 그저 순수하게 구미호와 노예들을 풀어주고 싶어서 당신을 협박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 뒷일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당신이 제국은행에서 대출을 받았을 줄은 몰랐던 거죠. 그래서 당신뿐만 아니라 죄 없는 당신 가족들까지 모두 노예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되고 죄책감을 많이 느꼈어요. 그래서 당신을 풀어준 겁니다.

 양기범 씨, 우리가 미안합니다. 사과할게요.”

 “석판 때문이 아니고?”

 양기범의 말에 혜성은 순간 허를 찔린 느낌이었다.

 양기범은 혜성을 응시하며 엷은 비웃음을 지었다.

 “죄책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네가 원하는 건 천하기둥 안에 있던 물건이잖아. 애초에 그것 때문에 우리 회사를 망하게 했겠지. 내 말이 틀린가?”

 이번에는 혜성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난 처음에 너희가 왜 구미호와 노예들을 풀어주라고 한 건지 이해하지 못했어. 그리고 네가 도깨비 여왕과 약혼했다는 뉴스를 봤을 때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더군. 그리고 그 후는 너도 알지? 네가 천하기둥을 연 순간 실수로 내가 들어가 버렸잖아.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지만, 그 안에 들어가서 거기 있던 물건을 본 순간 모든 퍼즐이 맞춰지더군. 네 목적은 그 석판이었던 거야. 그걸 손에 넣으려고 도깨비 여왕과 약혼한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 회사의 노예들을 풀어 주라고 협박했던 거지. SJ의 노예를 해방시키는 게 이무기를 물리치는 것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확실한 건 이거야. 네 최종적인 목적은 바로 천하기둥 안에 있던 석판이라는 거.”

 양기범은 집게손가락으로 혜성을 가리키며 미소 지었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그것 말이야.”

 혜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세 직원도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마도 천하기둥을 되찾았나 보지? 그러니 날 데려왔겠지. 천하기둥은 찾았지만 정작 그 안에 있던 석판이 사라진 걸 발견했을 테니까. 죄책감? 웃기고 있네. 넌 애초에 노예 해방 같은 것에 관심 없었잖아. 구미호와 노예들을 구해준 것도 인권 때문이 아니라 그 석판 때문이었잖아.”

 그렇게 말하며 양기범은 혜성에게 몸을 내밀었다.

 “좀 솔직해지지 그래? 석판이 어디 있냐고 솔직하게 물어봐. 같잖은 죄책감 같은 소리하지 말고.”

 혜성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그 석판은 지금 어디에 있죠?”

 “그걸 내가 왜 알려줘야 해?”

 양기범이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죄책감을 느낀다고? 그 반대 아니야? 넌 죄책감 같은 걸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잖아. 그러니까 우리 회사를 망하게 하고 우리 가족을 노예로 만들어놓고는 다시 날 이용하려고 날 꺼낸 거잖아. 그게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 할 행동이냐?”

 “그건 진짜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당신 가족이 노예가 될 줄은 전혀.......”

 “몰랐다고? 남의 회사를 완전히 박살냈으면서 그렇게 될 줄 몰랐다고? 넌 사이코패스야. 죄책감이나 동정심 자체를 느끼는 못하는 인간이지. 그러니까 그런 짓을 했던 것이고 지금도 이러는 거 아니겠어?”

 “사이코패스는 당신이겠지.”

 옆에 있던 박준식이 불쑥 끼어들었다.

 “노예를 팔아먹던 인간이 지금 누굴 훈계하고 있는 거야?”

 그 말에 양기범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뭐라고?”

 “사실이잖아. 넌 노예를 팔아먹는 놈이었고 우린 노예를 해방시켜준 사람이야. 지금도 노예로 잡혀간 너를 해방시켜줬잖아.”

 “차장님, 그만하세요.”

 혜성이 옆에서 박준식의 어깨를 잡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장님, 제 말이 틀렸나요? 지금 이 전직 노예 장사꾼이 노예를 해방시켜준 사장님한테 사이코패스라고 하고 있잖습니까. 이런 적반하장이 어디 있어요?”

 “노예를 사든 팔든 그건 합법이야.”

 양기범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반면 너희는 멀쩡한 회사를 협박죄로 망하게 만들었지.”

 “마약 밀매는 합법이 아닐 텐데.”

 이태민의 말에 양기범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 좋아. 말이 나온 김에 내가 마약을 거래하고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 문제는 상관없는 거예요.”

 혜성이 손을 저었다.

 “넘어가죠.”

 하지만 양기범은 재차 물었다.

 “누구의 제보를 받았던 거야?”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문제지. 그거 때문에 내가......”

 “양 대표님, 그건 이미 다 끝난 일이에요.”

 “대표? 난 더 이상 대표가 아닌데? 네 덕분에 대표에서 노예가 되었잖아. 잊었어?”

 박준식이 다시 끼어들었다.

 “그리고 우리 덕분에 수용시설에서 풀려났지.”

 양기범은 박준식을 보며 눈을 치켜떴다.

 “아, 맞아, 그렇지. 이거 고마워서 어떡하나? 노예에서 해방시켜준 것도 모자라 진수성찬까지 대접하다니, 절이라도 해야 하나?”

 “양 대표님, 아니 양기범 씨.”

 혜성이 달래는 목소리로 말했다.

 “화가 많이 나신 거 압니다. 저희도 그 문제는 정말 죄송하게 생각해요. 이 자리에서 사과드립니다.”

 “뭘?”

 “당신의 가족을 노예로 만든 일 말이에요.”

 혜성은 최대한 정중한 목소리를 유지하며 말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혜성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양기범은 팔짱을 낀 채 무표정하게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그 석판이 뭐길래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석판 때문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가족 분들이 모두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되어서......”

 “그런 시답잖은 말은 집어치우고. 그 석판의 정체가 뭐야? 어디에 쓰는 물건이야?”

 혜성은 난처한 얼굴로 세 직원에게 눈길을 던졌다. 세 직원들도 그와 같은 표정이었다. 혜성은 김구름의 표정에서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읽을 수 있었다.

 ‘눈치가 아주 빠른 자군요.’

 혜성은 잠깐 숨을 고른 뒤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죠. 우리는 그 석판이 필요해요. 어디에 쓰는 거냐면, 복잡하고 기술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그냥 서점 운영에 필요한 거라고 할게요.

 이렇게 합시다. 그 석판, 당신이 어딘가에 숨긴 거 맞죠? 그걸 우리에게 주면 지금 은행에 갇혀 있는 당신의 가족들까지 모두 우리가 데려온 다음에 전부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줄게요. 그리고 당신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약간의 경제적 도움도 줄 생각입니다.”

 양기범은 혜성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 방식은 여전하구만.”

 “네?”

 “상대의 약점을 잡아서 원하는 걸 얻어내는 방식 말이야. 근데 만약 이번에는 나한테 네 협박이 안 통하면 어떻게 할 거야?”

 “아무것도 안 할 건데요.”

 혜성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시간은 우리 편이에요. 잊지 말아야 할 게, 당신은 지금 자유인이 아니에요. 우리가 당신을 샀기 때문에 당신은 여전히 노예입니다. 우리 소유의 노예죠. 그러니 우리가 당신의 부인과 자식을 사오지 않는다면 당신은 영원히 가족을 만날 수 없어요. 우리 허락이 없으면 당신은 서점 밖으로 나갈 수도 없죠.”

 혜성의 말을 듣는 양기범의 눈빛이 점점 매섭게 변했다. 하지만 혜성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우리에게 협조하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당신은 점점 더 가족을 만나기 힘들어져요. 가족들이 언제 다른 곳으로 팔려갈지 모르니까요. 그리고 만약 당신 가족들이 외국으로 팔려가기라도 한다면, 그 때는 절대로 찾지 못하는 거예요. 그 때가 되면 당신이 마음을 바꿔서 협조한다고 해도, 우리는 당신 가족들을 찾아줄 수가 없습니다. 그걸 어떻게 찾겠어요?

 선택하세요. 가족을 구하고 자유인이 되어 새 인생을 시작할지, 아니면 여기에 평생 갇혀 있을지.”

 말을 마친 혜성은 팔짱을 끼고 눈앞의 양기범을 지켜봤다.

 양기범은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차분함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눈빛이 점점 흔들렸다. 그는 다시 혜성에게 당했다는 분노로 정신이 어지러운 듯했다.

 “너 이 새끼......”

 그의 눈빛에서 살기가 배어나왔다.

 “그 때 널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이 더러운 새끼......”

 “나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솔직히 더러운 건 네가 더 심하잖아.”

 혜성이 대꾸했다.

 “차장님 말대로 넌 노예 장사꾼이었잖아. 사람을 사고파는 놈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그건 합법이라고!”

 양기범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김구름이 재빨리 리모콘을 들어올렸다. 양기범은 리모콘을 든 김구름의 손을 보고 멈칫했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가 뭐라고 하든 노예제 국가에서 노예 매매는 합법이야. 난 법을 지키면서 사업을 했을 뿐이야.”

 “한 마디로 법대로 했을 뿐이라는 거네?”

 “그렇지.”

 “그래서 그 법대로 너도 지금 노예가 된 거잖아. 빚을 못 갚았으니 노예가 된 거지. 어때, 노예가 되고 난 후에도 노예제가 합법이니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나?”

 “우리 가족이 노예가 된 건 다 너 때문이었어, 네 놈의 범죄 때문이었다고!”

 “그러게 누가 마약 거래를 하래? 나 참, 또 아까랑 같은 말을 반복하는군. 그래, 이런 얘기는 그만 하자.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잖아.”

 혜성은 손을 저었다.

 “난 할 말 다했어. 네가 선택해. 우리한테 석판을 가져오던가, 아니면 평생 노예로 남던가. 네 선택에 너뿐만 아니라 네 가족들의 운명도 걸려 있다는 걸 잊지 마.”

 그런 뒤 그는 덧붙였다.

 “서준이랑 서아 생각도 해야지.”

 그리고 다음 순간 혜성은 괜한 말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자식을 언급하는 건 너무 심했나?’

 그는 자신이 진짜로 악당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그는 책을 만들기 위해서 악당을 연기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양기범의 자식들 이름을 내뱉은 순간, 그는 자신이 진짜로 악당 같다고 느꼈다.

 양기범 역시 혜성의 말에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혜성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양기범의 눈빛이 상처받은 여린 짐승 같다고 느꼈다.

 “잔인한 새끼......”

 혜성은 양기범에게 미안함을 느꼈지만 애써 그런 기색을 숨겼다.

 “뭘 그렇게 상처받고 그래? 노예 매매하던 사람이 속이 너무 여리군.”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쯤 말했으면 알아들었겠지. 여기 있다가 마음을 정하면 우릴 불러.”

 혜성을 따라서 세 직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는 양기범을 내버려둔 채 그가 있는 방문을 잠그고 나와 위층의 응접실로 올라갔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박준식이 혜성의 등을 찰싹 때리면서 외쳤다.

 “와우, 정말 잘했어요! 제가 못 참고 중간에 끼어들어서 저 때문에 망치게 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놈을 아주 무섭게 몰아붙이던데요?”

 혜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너무 잔인하게 말한 것 같지 않나요?”

 “맞아요.”

 이태민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 정도는 말해야 놈에게 효과가 있을 겁니다.”

 “그래요, 잘하셨어요.”

 김구름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악당처럼 말씀하시더군요.”

 “하하, 그거 칭찬인가요?”

 “물론이죠.”

 혜성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자식들 이름은 꺼내지 말 걸 그랬어요. 그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놈은 더 잔인한 놈입니다. 여태까지 수많은 사람을 노예로 사고팔았던 놈이잖아요. 그런 말 정도는 들어도 싸죠.”

 이태민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 사장님은 죄책감 갖지 마세요.”

 혜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런데 저 녀석이 과연 우리 요구를 받아들일까?”

 박준식이 물었다.

 “혹시 저 녀석이 우리 요구를 거절하면 어떡하죠?”

 “글쎄, 난 그러지는 않을 거라고 봐.”

 김구름이 말했다.

 “양기범은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야. 우리가 내민 손을 거절한다면 다른 방법이 전혀 없어. 자기한테는 아무 쓸모도 없는 석판을 우리한테 넘기기 싫다고 가족들을 평생 노예로 살게 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만에 하나 그럴 수도 있잖아.”

 박준식이 말했다.

 “우리에 대한 분노가 너무 큰 나머지 우리한테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복수를 할 수도 있잖아.”

 “가족을 희생해서 말이야?”

 이태민이 물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낮겠지. 그래서 만에 하나라고 했잖아. 만에 하나, 저 녀석이 진짜 사이코패스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노예상이였으니까 사이코패스일 가능성이 높지 않겠어?”

 그 말에 혜성이 대답했다.

 “차장님 말씀을 들으니 좀 불안해지는군요.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쩔 수 없죠. 우리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잖아요? 우린 그저 놈이 사이코패스가 아니길 바라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사실 할 수 있는 일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이태민이 말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입니다만......”

 “놈을 고문하자는 말씀인가요?”

 혜성이 묻자 이태민이 웃으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물론 사장님은 반대하시겠죠.”

 “부장님은요?”

 “저도 내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일주일이 지나고 이 주일이 지났는데도 놈이 우리에게 협조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저 녀석이 그 얘기를 꺼낼 거라고 생각했죠.”

 이태민이 박준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박준식은 펄쩍 뛰었다.

 “왜 나한테 그래! 내가 그런 사이코패스로 보여?”

 “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고양이야.”

 “닥쳐!”

 “자, 여러분, 싸우지 마세요.”

 혜성이 손을 저었다.

 “우리끼리 지레 짐작하면서 싸울 필요 없어요. 양기범한테도 말했듯이 시간은 우리 편이에요. 시간이 지날수록 양기범은 가족들이 팔려갈까 봐 불안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하면서 느긋하게 기다리자고요. 우리가 유리한 고지에 있는데 안달복달할 필요는 없죠.”

 “맞는 말씀입니다.”

 김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은 이제 뭘 하실 건가요?”

 “저야 당연히 주문을 계속 써야죠.”

 혜성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전 이제 그만 제 방으로 가보겠습니다.”

 응접실을 나가는 혜성의 등에 대고 박준식이 중얼거렸다.

 “오타쿠 같으니.”

 혜성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아 다시 공책에 주문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곧 그 일에 빠져들었다. 주문은 이제 완성이 가까워졌지만 아직도 채워야 할 것이 많았다.

 그가 한 시간 정도 주문을 쓰고 다듬고 있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했다. 김구름이었다.

 “사장님, 주문은 많이 쓰셨나요?”

 “아니요. 이제 막 시작했는데요.”

 “그렇군요. 우리가 아무래도 잘못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김구름의 말에 혜성은 몇 초간 가만히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양기범? 무슨 일이에요?”

 순간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양기범이 자살했나?’

 그런 생각을 하자 혜성은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양기범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요?”

 김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녀석이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걱정하면서 몇 주나 기다려야 할지 얘기했잖아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방금 양기범이 투항했습니다.”

 “네? 벌써요?”

 “네. 내려가서 한 번 얘기를 들어보시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