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서> 소설 연재
그들이 도착한 곳은 북한산이었다. 양기범은 자신이 기둥에서 나왔을 때 그곳이었다고 했다. 양기범이 빠져나온 후에 천하기둥은 다시 하늘로 멀리 날아가 버렸다고 했다.
혜성과 김구름과 이태민은 양기범을 따라 산을 올라갔다. 양기범은 산 중턱쯤에서 등산로를 이탈하여 산 속으로 들어갔다.
“장소를 제대로 기억하는 거 맞아요?”
이태민이 물었다.
“이런 산 속에서 어디에 숨겼는지를 어떻게 기억하지?”
“걱정하지 마. 난 장소를 기억하는 능력이 좋거든.”
양기범이 대꾸했다.
나무가 점점 울창해지면서 사위가 조금씩 어두워졌다. 하지만 양기범은 신경 쓰지 않고 성큼 걸음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한참을 걷던 양기범이 커다란 나무 옆에서 멈췄다. 그는 나무에서 몇 걸음 떨어진 작은 바위 옆을 가리켰다.
“여기야.”
혜성과 이태민은 들고 온 삽으로 양기범이 가리킨 땅을 파기 시작했다. 무른 땅은 오래 팔 것도 없었다. 삽질을 한 지 얼마 안 되어 삽 끝이 딱딱한 뭔가에 닿았다. 혜성과 이태민은 장갑 낀 손으로 흙을 조심스럽게 털어냈다. 그러자 하얀색의 뭔가가 드러났다.
“그거야.”
양기범이 말했다.
혜성과 이태민은 흙 속에 파묻혀 있던 석판을 끄집어냈다. 석판은 분필처럼 하얀색으로 가로가 50센티, 세로가 80센티, 두께는 10센티미터 정도 되는 크기였는데 크기에 비해서 생각보다 가벼웠다. 석판의 왼쪽 단면은 반듯했지만 오른쪽 단면은 구불구불하게 끊어진 자국이 나 있었다. 하나의 긴 석판을 반으로 쪼갠 자국이었다. 혜성과 이태민은 석판을 양쪽에서 잡고 천천히 땅에 내려놓은 뒤 석판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석판의 넓적한 표면에는 복잡한 작은 글자가 가득 새겨져 있었다.
“이건...... 마법 문자네.”
혜성이 말했다.
“그러게요. 우리가 지금 쓰는 마법 문자랑 같은 거예요.”
김구름이 말했다. 혜성과 직원들은 석판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어떤 패턴인지 알 것 같습니다. 주문이 완성되면 내재된 정보를 알려주는 암호인 거죠.”
이태민이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혜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마도 다른 한 쪽의 석판을 가져와 합치면 저절로 암호가 풀릴 거예요.”
“제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군요. 단순하지만 풀 수는 없는 암호입니다. 암호를 푸는 유일한 방법은 주문을 완성하는 것, 즉 남은 반쪽의 석판을 구해서 붙이는 것뿐이겠죠.”
김구름은 그렇게 말하더니 양기범에게 물었다.
“당신이 천하기둥 안에 들어갔을 때 석판이 정말 이거 하나밖에 없었나?”
“그래, 그것뿐이었어.”
양기범은 그렇게 말하고는 덧붙였다.
“이제 됐지? 약속을 지켜야 해. 우리 가족을 구해줘야지.”
“물론이죠.”
혜성이 대답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네 사람은 석판을 들고 다시 산 아래로 이동했다. 그들은 한참을 걸어 내려가 산 아래의 주차장에 있는 차에 도착했다.
혜성과 이태민은 땀을 뻘뻘 흘리며 석판을 차 트렁크 안에 집어넣었다.
“됐다.”
혜성은 트렁크를 닫으며 손을 탁탁 털었다.
“드디어 이걸 손에 넣었군요. 이걸 얻으려고 지금까지 그렇게 고생했다니......”
그는 그렇게 말하다가 옆에서 시무룩하게 서 있는 양기범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혜성이 보기에 그는 가족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머지 반쪽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태민이 묻자 김구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나머지 반쪽을 구하는 것도 일이네요.”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합시다. 일단 절반을 구했잖아요.”
그 때 양기범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제 은행으로 가. 가서 내 아내랑 애들을 풀어줘.”
“아...... 그럴까?”
이태민의 말에 혜성이 가로막았다.
“먼저 이걸 서점으로 옮기고 그 다음에. 석판을 옮기는 게 먼저야.”
혜성이 단호하게 말하자 양기범은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그래도 알겠다고 대답했다.
네 사람은 차를 타고 다시 서점으로 향했다. 이태민이 운전대를 잡았고, 옆자리에 앉은 혜성은 기분이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사장님, 드디어 목표에 절반 정도 도달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운전을 하면서 이태민이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들도 지금까지 고생 많으셨어요. 제가 제국과 계약했다면 애초에 이런 고생을 하지 않으셨겠지만.”
혜성의 말에 김구름이 고개를 저었다.
“저희가 고생하긴요. 사장님이 혼자서 고생하시고 수많은 위험을 이겨내신 거죠.”
“아니에요. 여러분이 도와주신 덕분에 석판을 찾은 거예요. 다들 정말 감사합니다.”
혜성은 그렇게 말하고 뒤를 돌아보며 양기범에게 말했다.
“양 대표님도 도와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양기범은 대답 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점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들이 신정동에 접어들었을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혜성은 그들이 들고 있는 제국기를 보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소화인들과 친소파에요.”
“폭도들이군요.”
이태민이 대답했다.
이태민은 차를 조용히 몰고 군중을 피해 일부러 멀리 돌아서 서점에 도착했다. 하지만 서점 근처에도 제국기를 든 사람들이 있었다.
“빨리 들어가죠.”
혜성은 그렇게 말한 뒤 차가 멈추자마자 차에서 뛰어내렸다. 혜성과 이태민은 재빨리 트렁크를 열고 석판을 꺼냈다. 그들은 석판을 양쪽에서 잡고 서점의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기다리고 있던 박준식이 서점 문을 열고 나왔다.
“이거에요?”
박준식이 다가와 말했다.
“신기하게 생겼네.”
그 때였다. 서점 뒤편에서 갑자기 도깨비 한 명이 뛰어나왔다. 혜성 또래의 젊은 남자였다. 남자는 혜성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김혜성이다! 여기 김혜성이 있다!”
혜성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놈은 혜성을 잡으려고 서점 뒤에 숨어서 기다리던 폭도였던 것이다.
남자의 고함 소리에 제국기를 든 폭도들이 그들에게 달려왔다.
“이런 젠장.”
이태민이 중얼거렸다.
“빨리 가야겠군요.”
박준식이 재빨리 달려가서 서점의 문을 열었다. 나머지 세 사람은 석판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문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폭도들이 더 빨랐다.
순식간에 그들에게 달려온 폭도들 중 한 명이 혜성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혜성은 그의 손을 쳐내려고 했지만 도깨비의 억센 팔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김혜성이잖아!”
폭도가 외쳤다.
“김혜성이야! 불사신 서점의 김혜성이라고!”
그 말에 다른 폭도들도 몰려들었다. 혜성과 직원들은 순식간에 군중에 휩싸였다.
“김혜성이다! 불순분자 새끼다!”
사람들이 혜성의 옷을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혜성은 넘어지고 말았다.
“사장님!”
김구름이 혜성에게 다가오려 했지만 폭도들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이태민이 석판을 내려놓고 사람들을 밀쳤다.
“이거 놔! 사장님!”
하지만 다른 폭도들이 이태민의 멱살을 잡고 땅에 팽개쳤다. 혜성보다 덩치가 훨씬 큰 이태민도 도깨비 여러 명이 달려들자 힘을 쓰지 못했다.
“아니 이런 미친놈들! 사장님!”
박준식이 외쳤다. 하지만 그 때 이미 혜성은 사람들에게 팔다리를 묶여 꼼짝 못하고 있었다. 혜성은 힘껏 발버둥 쳤지만 몸을 빼낼 수가 없었다.
혜성은 땅에 쓰러진 이태민이 다시 일어나 자신에게 다가오려고 하자 외쳤다.
“석판 먼저 가게 안으로 옮겨요!”
“사장님......”
“석판 먼저 옮기세요!”
혜성은 자신을 붙잡고 있는 도깨비와 인간들의 손에 끌려가며 외쳤다.
“석판을 빼앗기면 안돼요! 석판 먼저......”
하지만 폭도들의 고함소리가 더 커서 그가 외치는 소리는 묻히고 말았다.
폭도들은 혜성을 끌고 근처에 세워진 트럭으로 가서 화물칸 안으로 그를 던져 넣었다. 혜성은 바닥을 구르며 신음했다. 어두운 화물칸 안에는 혜성 말고도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웅크린 채 떨고 있었다.
화물칸의 문이 닫히고 잠시 후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는 얼마간 달리다가 멈춰 섰다. 문이 열리면서 햇살이 들어오자 혜성은 눈을 찌푸렸다.
혜성과 다른 사람들은 화물칸 밖으로 끌려 나왔다. 그들은 화물차 앞에 있는 창고 안으로 끌려가 바닥에 팽개쳐졌다. 창고 안에는 이미 열댓 명의 사람들이 혜성처럼 바닥에 앉아 있었다. 포로들은 대부분 옷이 찢어지고 머리가 산발이었고, 어떤 사람은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혜성은 바닥이 차가워 몸을 떨었다.
혜성과 다른 포로들 주위에는 제국기를 몸에 두르거나 두건으로 멘 폭도들이 손에 몽둥이나 망치를 들고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폭도 몇 명이 다가와 포로들의 몸을 밧줄로 묶었다. 혜성 역시 밧줄에 몸이 묶였다. 밧줄로 결박된 후에는 포로들의 목에 커다란 나무판자가 걸렸다. 나무판자에는 붉은 페인트로 글자가 적혀 있었다.
‘불순분자.’
혜성의 목에도 판자가 걸렸다. 판자에 걸린 밧줄의 껄끄러운 촉감이 혜성의 목을 옥죄었다.
폭도들은 포로들을 일으켜 세워 한 줄로 묶은 뒤 밧줄을 끌고 창고 문을 나섰다.
그들은 소화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한 바퀴 돌며 행진했다. 길가에 선 소화인과 친소파들은 그들에게 욕을 퍼부으며 침을 뱉었다.
혜성은 포로들 중 가장 마지막에 묶여서 끌려갔다. 포로들에게 돌멩이를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혜성의 바로 앞에 있던 사람이 머리에 돌을 맞아 피를 흘렸다.
마을을 한 바퀴 돈 뒤 포로들은 마을 중앙에 있는 광장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폭도들은 밧줄에 묶인 포로들을 앞에 있는 사람부터 한 명씩 풀어서 광장 한복판으로 데려가 사람들 앞에 세웠다.
“여러분, 주목하십시오!”
제국기 두건을 이마에 멘 젊은 청년이 외쳤다. 폭도 무리를 이끄는 대장 같았다.
“이 자는 오래전부터 제국과 황제 폐하를 능멸하는 글을 언론에 휘갈기던 놈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더러운 놈!”
“제국의 적!”
“은혜도 모르는 놈 같으니!”
청년은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잦아들자 묶여있는 언론인에게 말했다.
“자, 지금부터 자아비판을 시작한다. 네놈이 자아비판을 얼마나 잘하는지가 네 놈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언론인은 초췌한 도깨비 남자였다. 남자는 알 한 쪽이 깨진 안경을 쓴 채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남자는 떨리는 입술로 뭐라 중얼거렸다.
“뭐라고?”
청년이 물었다.
“더 크게 말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게 자아비판을 하란 말이다!”
언론인은 고개를 들고 그를 둘러싼 성난 사람들을 둘러봤다. 혜성이 보기에 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연약해 보였다.
언론인은 입을 달싹거리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내가 쓴 모든 글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 기세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서져 내릴 것만 같았던 언론인이 사자처럼 포효한 것이다.
“연방과 아시아의 평화를 빼앗은 너희 소화 놈들을 죽어서라도 저주하겠다!”
옆에 서 있던 대장이 당황해서 그의 뺨을 갈겼다.
“이게 지금 미쳤나?”
하지만 언론인은 계속 소리를 질렀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그는 마치 자신의 몸뚱이 전체를 쥐어짜내듯 소리를 질러댔다. 그것은 고함이 아니라 벼락이었다. 혜성은 전율했다.
“대한 독립 만세!”
“입 닥쳐!”
대장이 들고 있던 몽둥이로 언론인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러자 언론인은 땅으로 푹 고꾸라졌다. 쓰러진 그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더러운 놈 같으니.”
대장이 손짓을 하자 부하들이 남자의 시신을 끌고 갔다.
“다음.”
대장의 말에 부하들이 다른 포로를 끌고 왔다.
그 의식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자아비판을 했고 어떤 사람은 거부했다. 거부한 사람들은 처음의 언론인처럼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자아비판을 열심히 한 사람들은 죽지는 않았지만 다른 곳으로 끌려갔다.
‘큰일 났네.’
혜성은 생각했다.
‘보통 마지막 사람이 쇼의 주인공이던데. 하필이면 내가 마지막이라니.’
마침내 혜성의 차례였다. 혜성은 광장의 중앙으로 끌려갔다.
“이 놈이 마지막입니다! 그리고 이놈은 앞선 모든 불순분자들 중에서 가장 악질입니다!”
혜성을 가리키며 대장이 외쳤다.
“이 녀석은 불사신 서점 지구 지점의 사장으로, 우리 제국의 대아시아 진출에 필요한 마법서를 공급하라는 계약을 거절한 자입니다! 그냥 달라는 것도 아니고 제국 정부에서 제대로 값을 쳐서 사겠다고 했는데도, 제국군에게는 단 한 권의 마법서도 공급할 수 없다면서 거절했습니다. 이 자의 이름은, 여러분도 익히 알고 있을, 그 유명한 김혜성입니다!”
군중들 사이에서 놀라움이 번져 갔다.
“김혜성?”
“저 녀석이?”
대장이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이 자가 바로 그 유명한 김혜성입니다. 도깨비 여왕의 약혼자로도 유명한 놈이지요. 도깨비 여왕 역시 제국에 협조하지 않는 걸로 유명한데, 비슷한 새끼들끼리 만난 겁니다!”
“아주 악질이구만!”
누군가가 외쳤다.
“그렇습니다. 악질 중의 악질이지요. 제국의 원대한 계획을 우습게 보고 업신여긴 놈입니다. 자, 지금부터 이 더러운 놈의 자아비판을 듣겠습니다. 김혜성!”
대장이 혜성에게 몸을 돌렸다.
“너는 네 죄를 아느냐? 지금부터 자아비판을 시작한다!”
혜성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지?”
“제국군과 계약하지 않아서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멍청했습니다. 근데 전 정말로 어떤 나쁜 뜻이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니고, 그냥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별 생각 없이 제국의 계약을 거절한다는 거냐?”
대장의 말에 혜성은 머뭇거렸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냥, 단지......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정치 같은 건 전혀 몰라요.”
“아무것도 모른다고? 요즘 세상에 아무것도 모르는 게 자랑이냐?”
“그러게 말입니다. 전 정말 멍청한 놈입니다. 전 정말이지 멍청하고 단순한 놈입니다. 그냥 남들이 좋다고 말하면 좋은 줄 알고, 나쁘다고 하면 나쁜 줄 아는 단순한 녀석이에요. 전 단지 책을 쓰고 싶을 뿐인 속물 마법사일 뿐입니다.”
혜성은 열심히 주워섬겼다.
“속물이라고? 네 놈은 네가 속물이라고 생각하나?”
대장이 그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외쳤다.
“네, 저는 속물입니다. 그저 돈이랑 책 생각밖에 안 하는 놈입니다.”
혜성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속물이라면 왜 제국과 계약하지 않은 거지? 제국 정부가 분명히 너에게 제대로 값을 쳐서 책을 사주겠다고 했지 않느냐?”
“그건......”
혜성은 침을 삼켰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정말 멍청했습니다. 앞으로는 제국과 계약하겠습니다. 제국의 충직한 신민이 되겠습니다.”
대장이 몸을 돌려 사람들에게 외쳤다.
“여러분, 들으셨죠? 이 녀석이 앞으로는 제국과 계약하겠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이놈을 살려줄까요?”
군중들이 야유했다.
“말도 안 돼!”
“거짓말이다!”
군중 사이에서 이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런 악질은 쉽게 변하지 않아!”
누군가가 외쳤다.
“그저 지금 당장 살아 보려고 거짓말을 하는 거다!”
그러자 대장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맞습니다. 이 자는 우리가 불사신 서점으로 몰려가서 시위를 했을 때 꿈쩍도 하지 않았죠. 그런데 지금 우리 앞에 꽁꽁 묶여 있게 되자 갑자기 제국과 계약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을 믿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믿을 수 없어!”
사람들이 고함을 질렀다.
‘왜 이러는 거야......’
혜성은 불안에 떨었다.
“죽여라!”
갑자기 누군가가 소리쳤다.
“저런 자는 죽여야 한다!”
그 말이 군중들의 흥분에 불을 댕겼다. 다시 달아오른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죽여라!”
“불순분자는 죽어야 한다!”
누군가가 던진 계란이 혜성의 머리에 맞고 깨져 흘러내렸다. 혜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죽여라!”
“죽여라!”
군중이 한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대장이 옆에 서 있던 사람에게 손짓을 하자 부하들이 커다란 뭔가를 들고 왔다.
그것은 검은색의 두꺼운 관이었다. 관 뚜껑 위에는 붉은색 페인트로 ‘불순분자’라고 적혀 있었다.
대장이 손을 들자 소리를 지르던 군중이 잠시 조용해졌다. 대장이 말했다.
“여러분, 이 자는 일반적인 불순분자와는 차원이 다른 놈입니다. 이런 자에게 다른 불순분자들과 같은 죽음을 허락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모두 주목하십시오!”
대장은 혜성에게 몸을 돌리고는 엄숙한 표정으로 외쳤다.
“김혜성, 너는 제국의 위대한 원정을 비웃고 제국을 능멸했다. 네가 불사신 서점의 사장이자 도깨비 여왕의 약혼자라는 대단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네놈의 죄는 더욱 무겁다. 따라서 네놈에게 생매장이라는 형벌을 내리겠다!”
그러자 군중은 다시 미친 듯이 환호했다. 대장이 외쳤다.
“여러분, 이 자를 관에 넣고 산 채로 땅에 파묻어 버립시다!”
폭도들이 관 뚜껑을 열었다. 혜성은 관 쪽으로 끌려갔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혜성이 외쳤다.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제국과 계약하겠습니다!”
혜성은 미친 듯이 몸부림을 쳤지만 그를 양쪽에서 붙들고 있는 덩치 큰 도깨비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혜성은 울부짖었다.
“제발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하지만 폭도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밧줄에 묶인 혜성을 관 안으로 던져 넣었다. 혜성이 정확히 관 속으로 들어가자 군중은 환호성을 질렀다. 관에서 빠져나오려는 그를 여러 개의 손이 짓눌렀다.
사람들이 관 뚜껑을 들고 다가왔다. 관에 누운 혜성은 악을 썼다.
“살려주세요!”
그 소리에 사람들은 깔깔거렸다.
관 뚜껑이 닫히자 온 세상이 어둠에 휩싸였다.
“살려주세요, 제발! 잘못했어요!”
혜성은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그러다가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라서 울음을 그쳤다.
못을 박는 소리였다.
관 뚜껑 위에서 동시에 여러 개의 못을 박고 있었다. 혜성은 밧줄에 묶인 몸을 일으켜 뚜껑을 밀어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두꺼운 뚜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못을 다 박자 사람들이 관을 들어 올렸다. 관 안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던 혜성은 이윽고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미리 파 놓은 구덩이였다.
잠시 후 관 위로 흙을 덮는 소리가 들렸다. 여러 개의 삽들이 퍼 나르는 흙이 관 뚜껑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혜성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멈춰, 제발!”
그는 관 뚜껑에 이마를 마구 짓이겼다.
“살려주세요! 사람 살려!”
그는 온 몸을 비틀며 고함을 질렀지만 좁은 관 안에서는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너무 어두워서 눈을 떠도 눈을 감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혜성은 흐느꼈다.
“제발......”
흙을 덮는 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깊은 구덩이를 완전히 메운 것이다.
혜성은 울다가 숨이 막혀서 캑캑거렸다. 그는 묶인 손과 머리로 관 뚜껑을 밀어내려고 애썼지만 헛수고였다. 마구 소리를 지르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목에서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극도의 공포와 절망감 때문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혜성은 울다가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는 점점 붕괴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