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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준 Dec 18. 2024

28화. 기억

<흑마법서> 소설 연재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점점 꺼져가는 정신 속에서 그는 자신이 악몽을 꾸는 것인지 깨어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온 몸을 적신 공포가 목구멍 위까지 차올라 혜성은 숨이 막혔다. 어쩌면 정말로 숨이 막히는 것일 수도 있겠지. 관 속의 공기가 점점 떨어지고 있을 테니까. 이렇게 죽는구나. 나는 이렇게 죽는구나.

 위대한 작품을 쓰지 못하고 결국 이렇게 죽는구나.

 혜성의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갔다. 저 멀리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그의 고장 난 뇌가 만들어내는 소리 같았다.


 하지만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그 소리는 마치...... 흙을 퍼내는 소리 같았다.

 연이은 삽질로 흙을 퍼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더니 마침내 퍽 하고 딱딱한 뭔가가 관 뚜껑을 때렸다. 관 뚜껑 밖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여기 있어!”

 다시 흙을 퍼내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삽질이 계속되면서 관 뚜껑을 때리는 소리가 점점 잦아졌다.

 이윽고 누군가가 관 뚜껑을 두드리며 외쳤다.

 “사장님! 들리세요?”

 그 사람이 옆 사람에게 말했다.

 “그것 좀 줘, 빨리!”

 잠시 후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관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 틈새로 흙 부스러기와 얕은 빛이 함께 들어왔다.

 날카로운 금속처럼 생긴 그것은 관 뚜껑 밑으로 비집고 들어와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더니 힘을 주는 소리와 함께 못이 뽑혀 나갔다.

 관 뚜껑이 살짝 열렸다. 바깥에서 쇠지레로 뚜껑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관 뚜껑의 사방에 박혀 있던 못들이 하나씩 뽑혀 나갔다. 그러더니 잠시 후 뚜껑이 활짝 열렸다.

 “사장님!”

 김구름이 울부짖었다.

 이태민이 건장한 팔뚝으로 기절한 혜성을 들어올렸다. 그는 혜성을 구덩이 위로 끌어올려 땅 위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김구름과 박준식이 양 옆에서 혜성을 흔들었다.

 “사장님, 정신이 드세요? 사장님!”

 김구름이 울면서 외쳤다.

 “이미 죽은 것 아니야?”

 박준식이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태민이 혜성의 입을 벌리고 인공호흡을 했다. 몇 번을 하고 나자 혜성은 숨을 토해냈다.

 “사장님! 살아계셨군요!”

 김구름이 혜성을 껴안으며 외쳤다. 그는 혜성의 품에 파묻혀 한참을 울었다.

 혜성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태민과 박준식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옆에는 양기범도 삽에 기댄 채 서 있었다. 다섯 사람 모두 흙투성이였다.

 혜성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떨면서 중얼거렸다.

 “잘못했어요......”

 “네?”

 김구름이 물었다.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사장님, 다 끝났어요.”

 김구름이 그를 끌어안고 다독였다.

 “다 끝났어요.”

 혜성은 자신을 안고 있는 김구름의 부드러운 하얀 털을 만졌다. 그러자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저는......”

 그리고 그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 후의 일들을 혜성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하루 종일 흐리멍덩한 눈으로 앉아 있었고, 자신의 눈앞에서 세상과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가는 걸 멍하니 지켜볼 뿐이었다.

 박준식이 혜성에게 지난 일들을 설명해주었다. 혜성이 끌려간 뒤 그들은 폭도들을 쫓아갔다. 혜성이 광장에서 수모를 겪고 관에 갇혀 산 채로 땅에 파묻히는 동안에도 그들은 멀찍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접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혜성을 묻은 후에도 광장 안의 군중들은 한동안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날뛰며 소리를 지르다가 시간이 좀 지나자 다른 사냥감을 찾기 위해 다른 곳으로 몰려갔다. 광장에서 사람들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는 해가 진 뒤였다.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세 직원은 혜성을 파내기로 했다. 그들은 양기범까지 데려와서 폭도들이 혜성을 파묻은 뒤 버리고 간 삽으로 열심히 땅을 팠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도 혜성은 멍한 얼굴이었다. 직원들은 걱정이 되어 혜성을 흔들어보고 말도 걸어봤지만 그는 미동이 없었다.

 “큰일 났네. 정신이 나가 버린 거 아니야?”

 박준식이 말했다.

 “깜깜한 관 속에 갇혀 있어서 공포 때문에 미쳐버렸나 봐.”

 김구름은 옆에서 혜성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이태민도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혜성을 구한 다음날 서점 직원들은 혜성을 데리고 정신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혜성을 진찰한 뒤 극심한 공포 때문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것 같다며 한동안 쉬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으라고 했다.

 병원에서 돌아온 뒤 혜성은 서점 안의 성 안의 자기 방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주문도 쓰지 않았다. 텅 빈 눈으로 방구석을 응시하며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서점 직원들이 말을 걸어도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잘 때는 방 안의 불을 환하게 켜 놓은 채로 잤다.

 김구름은 매일같이 혜성의 방 안으로 들어와 바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해 줬다. 만세 운동은 계속해서 일어났지만 제국 역시 시위를 강력하게 진압했다.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김구름은 그런 말을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 그리고 양기범에게는 약속대로 가족을 찾아줬습니다.”

 김구름이 말했다.

 “새 삶을 살라고 돈도 약간 주고 풀어줬죠. 물론 그가 언젠가 우리를 또다시 공격할지도 모르지만......”

 김구름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될 대로 되라죠.”

 혜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셔서 계속 주문을 쓰셔야죠. 평생의 꿈인 흑마법서를, 무한히 위대한 작품을 만드셔야 하잖아요.”

 김구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장님, 혹시...... 포기하실 건 아니죠?”

 혜성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김구름의 까만 눈이 천천히 젖었다. 그는 눈시울을 훔치며 말했다.

 “포기하시면 안 돼요. 저를 위해서라도......”

 혜성은 침묵 속에서 낮과 밤을 보냈다. 그의 정신은 언어가 닿지 않는 어둠 속을 지나 빛도 어둠도 아닌 어딘가를 누볐다. 그렇게 정처 없이 생각 속을 헤매다 보면 어느새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 시절의 기억 속에서 엄마와 아빠는 젊은 모습이었다. 그는 부모님의 손을 잡고 소풍을 가던 날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의 그는 공원의 꽃과 나무를 보며 즐겁게 재잘거렸다. 그를 안고 쓰다듬는 엄마와 아빠를 보면서 그는 부모님이 자신만큼이나 젊다고 느꼈다. 저 사람들도 저렇게 젊은 시절이 있었구나. 그는 슬픔에 목이 메었다. 하지만 공원에서의 소풍은 항상 그 부분에서 끝났다. 곧이어 공원 안으로 제국인 폭도들이 들이닥쳤다. 그는 혼란과 절규 속에서 엄마 손을 놓치고 말았다. 아수라장 속에서 그는 부모님을 애타게 부르다가 결국 쓰러졌다. 그리고 그 이후는 끝없는 암흑이었다. 그는 발버둥 치며 살려달라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혜성은 손에서 피가 날 때까지 관 뚜껑을 치면서 꺼내달라고 외쳤다. 하지만 자신의 목소리에 답하는 건 자신뿐이었다.

 “살려주세요......”

 그는 중얼거렸다.

 “제가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그는 떨리는 손으로 딱딱한 나무 뚜껑을 밀어내려고 했다. 그 때 뭔가가 손에 닿았다. 관 뚜껑이 아닌 부드러운 손이었다. 누군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혜성아.”

 혜성은 고개를 들었다.

 하윤이었다. 여왕은 황금색 눈에 눈물이 고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해. 네가 위험할 때마다 널 지켜주지 못해서.”

 여왕은 혜성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많이 무섭고 아팠지?”

 혜성은 여왕의 맑은 황금색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그 눈이 그에게는 관 뚜껑을 열고 보는 태양처럼 느껴졌다. 혜성은 눈을 감고 자신을 쓰다듬는 여왕의 손길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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