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서> 소설 연재
그렇게 해서 발전소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다. 복구 작업은 한 사람이 하루에 4시간씩 노동을 하고 교대하는 방식이었다. 초반에는 당연히 반발도 있었지만, 도깨비들은 늘 그렇듯이 국가에 큰 피해가 닥쳤을 때 도깨비들을 주로 동원해야 한다는 논리를 그럭저럭 받아들였다.
혜성이 서점에 돌아온 다음 날 연방 정부는 불사신 서점과의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통보했다. 그 전까지 연방 정부에게 마법서를 공급하고 얻던 약간의 마력원마저도 이제 끊긴 것이다.
“아니,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한 거예요?”
박준식이 펄쩍 뛰며 화를 냈다.
“사장님이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도 없는데 왜 괜한 말을 해서 계약을 끊은 거예요? 진짜 어이가 없네.”
“죄송합니다.”
혜성은 서점 직원들에게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전 그게 거래가 될 줄 알았어요.”
“그게 말이 돼요? 아니, 발전소 복구에 필요한 마법서가 우리 서점에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사장님이 그런 말을 하면 그 높으신 분들이 어이쿠 하면서 사장님 말을 들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 때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했어요.”
혜성의 대답에 김구름이 웃으며 말했다.
“순간적으로 의분을 이기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리셨군요.”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어차피 연방이 계속 마력원을 공급한다 해도 그걸로는 흑마법서를 만들기에 턱없이 부족했어요. 애초부터 연방과의 계약은 혹시 몰라서 들어놓은 보험이었잖아요.”
“근데 이제 그 보험마저 사라진 거 아니야!”
박준식이 소리쳤다.
“뭘 그렇게 흥분하고 그러냐? 붕새의 여의주를 찾으면 해결될 것을.”
“찾았냐?”
“찾겠지.”
“정말 편하게 말한다.”
그렇게 말한 뒤 김구름은 혜성의 등을 토닥였다.
“차라리 잘하셨어요. 어차피 우린 더 잃을 것도 없어요. 그러니 할 말은 하는 게 낫습니다. 전 사장님이 그래서 좋아요.”
“나랑 반대군. 난 사장님의 그런 점이 싫어. 그 쓸데없는 정의감 말이야.”
“정의감까지는 아니에요.”
박준식의 말에 혜성이 대답했다.
“그럼 뭡니까?”
“그냥....... 그 순간에는 좀 아니다 싶어서 그랬던 것뿐이에요.”
“그게 정의감이죠. 사장님, 사업을 하시려면 그런 정의감은 포기하셔야 합니다. 에이, 모르겠다.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는데 이런 말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박준식은 연신 투덜거렸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태민이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붕새의 여의주를 찾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겠군요. 그러려면 석판의 나머지 절반을 찾아야 하고요.”
혜성이 대답했다.
“일단 우리가 가진 석판을 분석해봅시다. 그러면 나머지 절반에 대한 실마리가 있을지도 몰라요.”
발전소 복구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혜성과 세 직원은 서점 안에서 다양한 기계로 석판을 분석했다. 그들은 석판에 새겨진 문양과 재질 등을 분석했지만 석판을 원래 모양으로 합쳐야 주문이 완성된다는 사실만을 재확인했을 뿐이었다.
혜성은 고주월에게 석판을 가져가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고주월 역시 그들이 아는 것 이상을 말해주지는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혜성은 몸과 정신이 천천히 회복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주문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리하지는 않았다. 예전처럼 하루 종일 주문을 쓰는 대신 그는 하루에 한 두 시간만 작업을 하고 쉬었다.
혜성은 주문을 쓰다가 가끔씩 바람을 쐬고 싶을 때면 남쪽 발전소가 있는 곳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도깨비들이 노동을 하는 모습을 구경하곤 했다. 그는 얕은 언덕 위에 앉아 도깨비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노동의 과정은 그에게 알 수 없는 평온함을 주었다. 비록 그는 그 노동 자체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땀 흘려 일하는 모습은 그에게 평화로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것은 어쩌면 하루 종일 앉아서 책만 쓰는 그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갈망하는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도깨비들은 혜성이 자신들을 구경하는 것을 언제부터인가 알아보고 그에게 손을 흔들곤 했다. 그들이 혜성의 정체를 아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혜성도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혜성은 도깨비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노예가 되어 석정궁 2호점에서 혹사당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는 도깨비들에게 안쓰럽고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물론 그가 더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도깨비들의 고생에 자신도 조금은 책임이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앉아 있던 그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김혜성 공자님?”
혜성은 옆을 돌아보았다. 처음 보는 도깨비 여자가 서 있었다.
“김혜성 공자님 맞으시죠?”
“예, 맞습니다만......”
“반갑습니다. 전 오승희라고 합니다.”
여자가 손을 내밀어서 혜성은 가볍게 악수를 했다. 악수를 한 뒤 오승희라는 사람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마흔이 좀 넘어 보이는, 도깨비치고는 몸집이 작달만한 여자였다.
“서점에 전화해서 공자님을 뵙고 싶다고 하니까 아마 여기에 계실 거라고 하더군요. 정말 여기 계시네요?”
오승희가 붙임성 좋은 말투로 말했다.
“마법서를 계약하려고 오셨나요?”
혜성의 물음에 오승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저 개인적으로 뵙고 몇 마디 나누고 싶었을 뿐입니다. 혹시 제가 시간을 빼앗고 있는 건 아니죠?”
“물론이죠. 보다시피 한가해서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 걸요.”
오승희는 혜성의 시선을 따라서 도깨비들의 무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물었다.
“발전소 복구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보고 계신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그냥,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보는 거예요.”
“여기 앉아서요?”
“네.”
혜성은 멋쩍게 웃었다.
“그냥 심심해서 앉아 있을 뿐이에요. 혹시 매려 궁전에서 오신 분인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저를 공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궁전 직원들밖에 없거든요.”
오승희는 그 말에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아, 그래서 그러셨구나. 물론 전 매려 궁전에서 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궁전 직원이나 매려 왕국의 시민이 아니더라도 공자님을 ‘공자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많아요. 무려 여왕 폐하의 약혼자이신데, 그렇게 불러드리는 게 당연하죠. 특히 대부분의 도깨비들은 그렇게 부른답니다.”
“그런가요?”
“그럼요. 모르셨구나? 인터넷에서 본인 이름을 검색해보지 않으세요?”
혜성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짓은 절대 안 해요.”
“왜요? 전 제가 유명한 사람이 된다면 그렇게 할 텐데.”
“전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거든요. 그런 건 싫어서......”
“하하, 정말 소박한 분이시구나.”
그렇게 말하며 오승희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노예 인권 단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혜성은 명함을 받았다.
“공자님을 예전부터 뵙고 싶기도 했고, 또 감사의 말씀도 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감사요? 저한테?”
“네.”
“왜 저한테......”
오승희는 눈앞의 노동 현장을 가리켰다.
“발전소 복구 작업에 도깨비들을 강제 동원하는 걸 반대하셨잖아요.”
“그걸 어떻게 아세요?”
“신문에 났으니까요. 모르셨어요?”
“전혀 몰랐는데. 기자들은 그런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오승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말이에요. 아마 정부 인사가 기자에게 귀띔해주지 않았을까요? 아무튼 그 일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뭘 그런 걸 가지고......”
“본인하고 상관없는 일임에도 그런 자리에서 그렇게 분명히 반대 의사를 밝힐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그러고 보니 공자님께서는 제국과의 계약도 거절하셔서 큰 불이익을 겪으셨잖아요?”
혜성은 그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공자님께서는 과연 매려 여왕의 배필이 될 만한 분이십니다. 정말 대단해요. 전 공자님이 연방의 도깨비 강제동원에 반대하셨다는 기사를 읽고 나서 공자님을 만나 뵙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답니다. 공자님은 도깨비들의 친구라고 할 수 있겠네요.”
“도깨비들의 친구라...... 부통령은 저한테 명예 도깨비라고 하던데요.”
그 말에 오승희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명예 도깨비? 진짜 그런 말을 했어요?”
“네. 바로 사과하긴 했지만.”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어떠셨나요?”
혜성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뭐...... 그렇게 나쁘진 않던데요.”
“그건 공자님이 정말로 도깨비들의 친구라서 그래요. 이참에 그냥 진짜로 명예 도깨비를 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요? 도깨비 여왕의 약혼자이기도 하니까.”
두 사람은 같이 웃었다.
“그러고 보니 공자님도 한 때 노예였던 적이 있으시죠?”
“저에 대해서 정말 잘 아시네요.”
“아, 그건 유명한 사실이죠. 공자님이 석정궁에 끌려가서 노예가 되셨다가 탈출하신 건 다들 알고 있는 일이니까요. 석정궁이 그 일을 언론에 열심히 떠들기도 했고. 사실 저도 한 때 노예였던 적이 있답니다.”
“정말요?”
“네. 그리고 공자님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한 때는 나름대로 한 가닥 하던 사람이었답니다.”
언덕 아래에서 도깨비들은 지시에 따라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오승희는 그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혜성이 그녀에게 물었다.
“어떤 일을 하셨는데요?”
“노예 해방 일을 했어요.”
“노예 해방?”
“네.”
그렇게 말하는 오승희의 눈빛은 꿈꾸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슬퍼 보이기도 했다.
“지금 저는 자유인 신분으로 노예 인권 단체에서 일하고 있지만 한 때는 저도 노예였어요. 정말 힘든 하루하루였죠.”
혜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한 소년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 사람 덕분에 저는 노예에서 풀려났고, 그 사람과 함께 일하게 됐죠.”
오승희는 혜성에게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 사람도 공자님처럼 아주 잘생긴 소년이었답니다.”
“그게 누군데요?”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에요. 아마 공자님도 잘 아실 걸요?”
혜성은 눈을 깜박였다.
“글쎄요,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그러다가 혜성은 헉 하는 소리를 냈다.
“설마 김지훈?”
“맞아요.”
오승희는 활짝 웃었다.
“정말이에요? 정말 김지훈과 일하셨어요?”
“네. 저는 그의 최측근이었어요.”
혜성은 더욱 놀랐다.
“그럼 노예해방전선의 지도부였다는 말씀이잖아요?”
“그런 셈이었죠.”
입을 다물지 못하는 혜성을 보며 오승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도 다 옛날이야기예요. 노예해방전선은 와해된 지 오래되었으니까요. 아무튼 신문에서 공자님이 도깨비 강제동원을 반대하셨다는 기사를 읽고 정말 오랜만에 우리의 대장이었던 김지훈이 생각났어요. 그래서 공자님을 찾아온 거예요. 대장은 비록 공자님과 달리 도깨비이긴 했지만 공자님처럼 마르고 앳된 소년이었죠.”
“김지훈이 그의 본명이었나요?”
“네. 어쩌다 보니까 이름이 유출되었죠.”
“김지훈이 본명이었구나.....”
“그런 사람의 이름치고는 흔한 이름이죠. 참, 제가 대장의 사진을 갖고 있는데 보여드릴까요?”
오승희는 그렇게 말하며 지갑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예전에 찍은 대장의 사진이에요.”
사진 속에는 총명해 보이는 도깨비 소년이 미소 짓고 있었다. 평범하고 수수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노예해방전선같은 전설적인 조직을 이끌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너무 어렸다.
“정말 어리네요.”
“맞아요. 십 대 후반이었으니까요.”
“근데 저한테 이렇게 사진을 보여주셔도 되는 거예요?”
“뭐 어때요. 공자님은 도깨비의 친구인데.”
그렇게 말하며 사진을 보는 오승희의 눈은 추억과 슬픔으로 빛나고 있었다. 혜성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김지훈은 어떤 사람이었어요?”
그러자 오승희는 웃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정말 어려운 질문이네요. 뭐라고 짧게 표현할 수가...... 그렇지만 굳이 억지로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저는 그를 영웅이라고 하겠어요.”
“영웅......”
“그래요, 영웅.”
“하긴 그 분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저도 옛날부터 많이 들었어요.”
그 말에 오승희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신출귀몰한 사람이었죠.”
“심지어 소화 황제조차도 그를 두려워했다면서요.”
“글쎄요, 그건 제가 황제한테 물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제국이 그 때 우리를 잡으려고 혈안이었던 건 사실이죠.”
“그 분하고는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노예였던 저를 대장이 구해줬어요. 그 때는 노예해방전선이 만들어진 초기였고, 저는 초기에 구출된 노예들 중 하나였죠. 전 대장의 뜻에 매료되었고 대장이 하는 일에 동참하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저와 몇몇 동료들이 합류한 직후부터 조직은 빠르게 커져 갔지요.”
“선생님도 정말 대단한 분이셨군요.”
“저요?”
오승희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한 때는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지금 이렇게 공자님 같은 분이랑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랍니다.”
“제가 영광이죠. 그런데 노예해방전선은 어떻게 된 거에요? 어느 날 갑자기 활동을 중단했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왜요?”
“대장이 실종됐거든요.”
“실종?”
“네. 어느 날 갑자기 행방불명되고 말았어요. 그리고 대장이 사라진 후 노예해방전선은 휘청거리다가 결국 활동을 중단하고 말았죠. 우리 조직은 순전히 대장의 능력 하나만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요.”
오승희는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그냥 사라졌다고요?”
“네. 하지만 다들 대장이 살해당했다고 생각해요.”
혜성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에게 당한 걸까요? 제국?”
“그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널렸죠. 말씀하신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국이 그를 죽인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 생각은 좀 달라요.”
오승희는 진지한 표정으로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전 매자가 그를 죽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매자?”
혜성은 그 이름을 듣고 눈을 찌푸렸다.
“매자라면,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데.”
“굉장히 잔인한 노예 매매 회사에요.”
“아! 맞다. 이제 기억나네요.”
그는 자신과 친했던 두 사람, 안정식과 진연대와의 대화를 오랜만에 떠올렸다.
“제가 있던 석정궁 2호점의 공사장이 원래 매자 소유의 땅이라고 들었어요. 그곳이 원래는 초고대 인간 왕국의 유적지였는데 매자가 그 땅을 석정 가문에게 판 이후 그곳에 석정궁 2호점이 세워졌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정확합니다. 대장은 행방불명되기 직전에 바로 그 매자와 거래를 하려고 했어요.”
“거래라고요?”
“네. 대장은 뭔가를 넘겨주는 대가로 매자가 가진 노예들을 풀어달라는 거래를 하려고 했죠. 그런데 그러던 중에 행방불명되고 만 거예요.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제 짐작에 불과하지만, 전 그래서 매자가 의심스러워요.”
“무엇을 조건으로 거래를 하려고 했던 거죠?”
“그 때 매자에서는 어떤 석판 같은 걸 찾고 있었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대장은 바로 그 석판의 일부를 가지고 거래를 하려고 했지요. 정확한 건 우리한테도 제대로 말을 하지 않아서 잘 몰라요. 그 직후 행방불명되었으니까.”
“석판이요?”
혜성은 깜짝 놀라 물었다.
“지금 석판이라고 하셨나요?”
“네. 전 그렇게 들었어요.”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석판인지 아세요?”
“글쎄요, 구체적인 것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대장이 우리에게 그것에 대해서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거든요. 그럴 기회도 없었고. 제가 알기로 매자는 노예들을 동원해서 지금의 석정궁 2호점이 있는 자리에서 어떤 유물을 찾고 있었대요. 그러니 그 석판이 바로 매자가 찾던 유물이 아니었을까요?”
“혹시 그 석판을 직접 보신 적 있나요?”
“아니요.”
오승희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혜성을 응시했다.
“그 석판에 대해서 왜 그렇게 알고 싶어 하시죠?”
“왜냐하면 저도 어떤 석판을 찾는 중이거든요.”
혜성은 자신이 붕새의 여의주를 찾는 중이며, 그 여의주를 찾게 해주는 석판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설명했다.
“오, 그런 걸 찾고 계시다니.”
오승희는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그 석판이 공자님이 찾고 계시는 그것인지는 모르겠군요. 말씀드렸다시피 전 그 석판을 본 적도 없고, 대장이 제대로 말해주지도 않았거든요. 혹시 매자가 찾던 게 공자님이 찾는 석판과 같은 거라면, 매자에서도 붕새의 여의주를 찾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혜성은 그 말에 생각에 잠겼다.
“그랬을 수도 있겠네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는데.......”
혜성은 그 후로도 오승희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석판뿐만 아니라 김지훈이라는 전설적인 인물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오승희는 김지훈과 있었을 때의 다양한 일들을 들려줬지만 그와 함께 일했던 그녀도 그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게 많았다. 김지훈은 친절했지만 과묵한 성격이었고 특히 자신의 과거사나 가족에 대해서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했다.
한참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혜성과 오승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했다.
“오늘 이렇게 뵙게 돼서 정말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도깨비들을 위해 발언해 주신 거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오승희의 말에 혜성은 웃으며 답했다.
“대단한 것도 아니었는걸요, 뭘.”
오승희는 혜성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공자님은 볼수록 우리 대장과 닮은 것 같아요. 오늘 처음 만나지만 자꾸만 그런 느낌이 드네요.”
“에이, 그 분은 대단한 분이잖아요.”
“공자님도 대단한 분이잖아요.”
“전 그냥 속물이에요.”
그 말에 오승희는 눈을 치켜떴다.
“진심인가요?”
혜성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네. 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자 오승희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스스로에게 좀 더 칭찬을 해주세요. 공자님은 좋은 분이니까요.”
“그렇게 봐주신다니 감사할 뿐입니다.”
“좋은 분 맞아요.”
오승희는 손을 흔들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혹시 또 궁금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하세요.”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졌다.
오승희와 헤어진 뒤 혜성은 서점에 돌아오자마자 직원들을 불렀다. 그는 오승희에게 들은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줬다.
“오, 확실히 흥미롭군요.”
이야기를 다 들은 후 이태민이 말했다.
“근데 김지훈이 갖고 있었던 석판이 정말 우리가 찾는 나머지 절반일까요?”
박준식이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알 수 없죠. 하지만 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왜냐하면 붕새의 여의주가 봉인된 사건은 초고대에 일어났고, 도깨비 왕국이나 인간 왕국은 모두 초고대에 존재한 왕국들이잖아요. 매려는 지금도 기업의 형태로 유지되고 있지만 인간 왕국은 초고대에 존재했다가 사라진 걸로 알려져 있죠. 시대를 감안하면 맞을 것 같아요. 초고대의 도깨비 왕국과 인간 왕국이 함께 붕새의 여의주를 봉인하고 그 봉인을 여는 석판을 둘로 나눠서 각자 보관한 거죠. 이렇게 생각하면 정확히 들어맞지 않나요?”
“그럴듯하군요. 근데 그 말이 맞다면 매자는 붕새의 여의주에 대해서 어떻게 알아냈을까요?”
이태민이 물었다.
“글쎄요, 그게 의문이긴 한데......”
혜성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제 생각은 이래요. 두 개로 쪼개진 석판 중 하나는 우리가 열기 전까지 수천만년 동안 매려의 천하기둥 안에 있었으니 김지훈이 찾아낸 석판은 당연히 그건 아닐 거예요. 음, 물론 김지훈이 유적지에서 직접 석판을 발견한 게 아니라 다른 노예가 발견해서 김지훈에게 준 것일 수도 있지만, 어찌 됐든 그가 찾아냈다는 석판은 우리가 가진 게 아니라 나머지 절반이겠죠.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상상인데, 아마 매자는 처음부터 김지훈과 거래를 할 마음이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그를 납치한 다음 석판을 내놓으라며 그를 고문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고문 끝에 죽자 아무도 모르는 곳에 시체를 버렸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여태까지 김지훈의 시체조차 못 찾은 게 아닐까요?”
혜성의 말이 끝나자 다들 아무 말도 없었다. 혜성은 잠시 동안 김구름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이태민도 그걸 느꼈는지 잠시 김구름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다.
“정말...... 정말 끔찍한 일이군요.”
이태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입니다. 어쩌면 김지훈의 실종은 매자와 아무 상관이 없을 수도 있어요.”
혜성이 말했다.
“하지만 만약 사장님 말이 맞다면, 김지훈이 죽기 전에 매자에게 석판을 넘겼을까요?”
박준식이 물었다.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김지훈이 사라진 후에도 매자가 유물 발굴 작업을 계속했는지를 알아내야죠. 그러니까 지금부터 매자에 대해서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조사는 주로 인터넷으로 이뤄졌다. 혜성은 매자와 김지훈에 대해 검색하는 과정에서 최명준이라는 기자의 글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최명준 기자는 오래 전부터 노예 인권 문제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써온 기자로 알려져 있었다.
매자는 현재 제국령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노예 매매 회사들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잔인하기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조사 결과 매자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떤 유물을 찾기 위해 애썼지만 지금은 관둔 상태였다. 혜성은 매자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을 뒤져봤지만 매자가 찾던 유물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해봤는데요.”
혜성이 말했다.
“매자가 찾던 게 만약 우리가 찾는 석판의 나머지 절반이라면, 그리고 김지훈이 그걸 찾아냈다면 김지훈은 그걸 당연히 매자가 소유한 유적지에서 찾았을 거예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김지훈은 매자에서 다른 곳으로 팔려갔다가 그곳에서 노예 반란을 일으켰죠. 그 말은, 김지훈은 매자에서 팔려갈 때 노예의 신분으로 끌려갔기 때문에 몸에 지닐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을 겁니다. 특히 커다란 석판을 숨기는 건 더욱 불가능하죠. 그리고 김지훈이 팔려가게 된 회사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노예해방전선을 조직한 후 다시 매자의 유적지로 돌아갔다는 기록은 없어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말이에요. 그러니 만약 그에게 석판이 있었던 거라면, 다른 곳으로 팔려가기 전에 발굴 현장 어딘가에 숨겨뒀을 겁니다. 그가 석판을 발견한 게 맞다면 말이에요.”
“김지훈이 나중에 다시 몰래 그 석판을 회수했을지도 모르잖아요.”
이태민이 말했다.
“그렇죠. 하지만 그럴 경우라면 석판의 위치를 가늠조차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매자의 발굴 현장은 보안이 상당히 엄격했다고 하니까 그곳에 다시 접근하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 석판이 지금 석정궁의 공사장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다는 거네요.”
김구름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근데 그 넓은 곳의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찾아내지?”
박준식의 말에 혜성이 대답했다.
“우리가 천하기둥의 사원 안에 들어갔을 때 본 벽화를 생각해보세요. 거기서 두 개의 석판을 가까이 하면 석판들이 빛났잖아요.”
“아하! 그럼 우리가 찾아낸 석판을 들고 가면 되겠네. 그걸로 다른 절반의 위치를 알아내는 거지.”
박준식의 말에 이태민이 물었다.
“그런데 그게 될까? 얼마나 가까이 가야 빛나는지를 모르잖아.”
“일단은 해봐야죠.”
혜성이 대답했다.
“일단은 시도를 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