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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준 Dec 18. 2024

36화. 불

<흑마법서> 소설 연재

 혜성은 지나가는 새벽 택시 한 대를 잡았다. 혜성이 택시에 타자 기사가 경쾌하게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혜성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불사신 서점으로 가주세요.”

 “어이구, 마법서를 사시게요?”

 “그건 아니고 제가 거기 사장이에요.”

 그러자 기사는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 손님이 거기 사장이면 난 매려 왕이오!”

 그러고는 택시가 출발했다.


 택시에서 내린 혜성은 비틀거리며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서점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혜성은 서점 안쪽의 문을 열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혜성은 성 안의 넓은 복도를 지나 아래층 응접실로 내려갔다. 응접실에는 이태민과 박준식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미치겠군.”

 박준식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어떻게 하지?”

 이태민은 말없이 머리를 팔에 묻었다.

 “이태민, 뭐라고 말 좀 해봐.”

 그러자 이태민이 고개를 들었다.

 “난들 뭘 하겠......”

 그러다가 이태민은 혜성과 눈이 마주쳤다.

 이태민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입을 벌렸다. 하지만 입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잠시 그러고 있던 이태민이 소리를 질렀다.

 “사장님!”

 박준식이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는 비명을 질렀다.

 “사장님! 세상에!”

 그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혜성에게 달려와 그를 부둥켜안았다.

 “아, 저기, 숨 막혀요.”

 혜성이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왜 여기 계세요?”

 이태민이 그를 흔들며 물었다.

 “택시를 타고 왔어요.”

 “택시? 용산역에서 여기까지 택시를 타고 온 거예요?”

 “아니요. 그건 아니고, 사정이 좀 길어요. 그 전에 물 좀 마실 수 있을까요? 목이 너무 마르네요.”

 “오, 물론이죠.”

 이태민이 허둥지둥 물을 뜨러 갔다. 그러자 박준식은 혜성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렸다.

 “사장님, 정말 영영 못 보는 줄 알았어요.”

 “저도요. 두 분을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네요. 운이 좋았어요.”

 혜성은 이태민이 가져다 준 물을 마셨다.

 “이제 좀 낫네요. 좀 앉을게요. 힘들어서.”

 혜성은 응접실 탁자에 앉아서 자신이 겪은 일을 모두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이태민과 박준식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그러니까......”

 박준식이 더듬거렸다.

 “매려 여왕의 오빠가 매자의 진짜 대표라고요?”

 “맙소사.”

 이태민도 고개를 저었다.

 “만약 저를 도와주신 분이 없었다면 전 지금쯤 하선에게 고문당하고 있을 거예요.”

 혜성은 다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건 그렇고, 용산 역에서 이곳으로 대피시킨 사람들은 다들 어떻게 되었나요?”

 “서점에서 다른 곳으로 보냈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고,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들은 매려 여왕의 도움으로 일단 매려에 머물고 있어요. 아, 그러고 보니 사장님이 잡혔다는 말을 듣고 여왕이 매우 놀랐다고 하더군요.”

 박준식이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여왕에게도 전화 한 통 하시죠. 많이 걱정할 텐데.”

 “그러게요. 지금 해야겠어요.”

 혜성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소리쳤다.

 “아!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요!”

 “뭐죠?”

 “이건 윤이를 만나서 직접 얘기해야겠어요.”

 혜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려궁에 가야겠습니다.”


 여왕은 혜성이 왔다는 말을 듣고 회의실을 박차고 뛰어왔다. 그녀는 용포를 휘날리며 달려와서 혜성을 껴안았다.

 “난 네가 죽은 줄 알았어.”

 여왕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도대체 넌 왜 그래? 왜 맨날 이렇게 사람을 힘들게 해.”

 “미안.”

 혜성은 웃으면서 손등으로 여왕의 눈물을 닦아줬다.

 “자꾸 운이 안 좋네. 용산 역에서 대피시킨 사람들을 맡아줬다며? 정말 고마워.”

 여왕은 다시 혜성을 꼭 끌어안았다. 여왕의 심장박동이 혜성의 가슴에 전해졌다.

 “다시는 널 잃지 않을 거야. 맹세해.”

 그 말에 혜성은 어색하게 웃었다.

 “고마워. 근데 지금 중요한 할 말이 있는데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여왕이 혜성을 몸에서 떼어냈다.

 “중요한 말?”

 “응. 지금 상황이 아주 심각하거든.”

 여왕은 혜성을 데리고 복도에 있는 문들 중 하나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왕과 신하들이 회의를 하는 대회의실보다는 작은 회의실 같았다. 혜성은 자리에 앉자마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여왕에게 자신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다 듣고 난 여왕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오빠가 매자의 대표였다고?”

 “넌 몰랐어?”

 “전혀 몰랐어. 어떻게 그럴 수가......”

 혜성은 여왕의 손을 잡았다.

 “그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지금 제국이 하고 있는 일이야. 용을 소환하기 위해서 44만 4400명의 목숨을 바치려고 하고 있어. 막아야 해.”

 “제국이 그래서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이고 있었구나.”

 여왕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혜성이 처음 보는 여왕의 표정이었다. 혜성이 알고 있던, 항상 총명하게 빛나던 여왕의 눈이 아니었다. 오빠에 대해 듣고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왕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지금 당장 연방 정부에게 알릴게. 한시가 급한 상황이니 빨리 의논해야겠어. 같이 가자. 네가 본 것을 다시 설명해 줄 수 있지?”

 “물론이지.”


 혜성은 여왕의 리무진을 타고 함께 대통령 관저로 향했다. 그는 여왕에게 말한 것처럼 자신이 들은 것을 대통령에게 자세히 이야기했다. 물론 여왕의 오빠가 매자의 대표였다는 사실은 빼고 말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대통령 역시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제국이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요.”

 대통령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쟁에서 패할 위험에 처하자 황제가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이죠.”

 여왕이 대답했다.

 “대통령님, 당장 학살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가 늦으면 수십만 명이 죽을 겁니다. 더 나아가 만약 제국이 용을 만들어낸다면 이 전쟁의 양상 자체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당장 이 학살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 막을 수는 없어요. 제국이 우리 말을 듣지는 않을 테니.”

 “연합군 총사령관에게 이 사실을 전달하시죠.”

 여왕의 말에 대통령은 눈을 치켜떴다.

 “연합군에게?”

 “그렇습니다. 물론 제국이 알지 못하게 비밀리에 전달해야겠죠. 연합군에게 이 사실을 알려서 지금 당장 제국 본토를 공격하라고 말해야 합니다.”

 “연합군이 우리 뜻대로 소화를 공격할까요?”

 “그러니까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전해야겠죠. 최대한 빨리 막지 않으면 대학살이 일어날 것이며, 나아가 용이 만들어진다면 전쟁은 연합군에게 불리해질 것입니다. 지구상에서 용보다 강력한 무기는 없을 테니까요. 어차피 다른 추축국 동맹이 모두 패하고 소화만이 남은 이상, 소화 본토에 대한 공격은 예정된 일입니다. 단지 그 시기를 좀 더 앞당길 뿐인 거죠. 대통령님, 지금 바로 연합군 총사령관에게 알리시죠. 연합군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다면 틀림없이 본토를 공격하고 학살을 막을 것입니다.”

 대통령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전하죠.”


 그날 밤 혜성은 여왕과 함께 밤을 보낸 뒤 다음날 서점으로 돌아갔다. 여왕은 혜성이 계속 궁전에 있길 바랐으나 혜성은 사장인 자신이 서점을 비울 수 없다고 말했다.

 “자주 연락할게. 그리고 자주 놀러올게.”

 혜성은 여왕을 다독인 뒤 서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다시 주문을 쓰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열심히 주문을 구상하고 쓰게 되자 예의 그 편안함이 그를 찾아왔다.

 ‘다시는 주문을 쓰지 못할 줄 알았는데.’

 그는 주문을 쓰다가 지루해질 때면 뉴스를 틀었다. 뉴스에서는 용산에서의 대량 납치를 계속 보도하고 있었다. 용산에서 제국군에게 잡혀간 포로와 민간인들은 다시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 안에서 살육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연합군은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그들은 유럽에서 막 끝낸 전쟁을 정리하기도 숨이 찼던 것이다. 혜성은 연합군이 빨리 움직이지 않아서 제국이 용을 완성하면 어쩌나 불안했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뉴스를 끄고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그냥 책이나 쓰는 게 내가 할 일이야.’

 그는 이태민과 박준식이 정세를 논할 때도 같은 말을 할 뿐이었다.

 “사장님은 불안하지도 않으세요?”

 박준식이 따져 물었다.

 “제국이 용을 만들지도 모르잖아요? 그 미친놈들이 용을 만들어낸다면 그 때는 진짜 전 세계가 위험해질 거예요.”

 “어쩌겠어요. 우리가 뭐 할 수 있는 일도 없잖아요?”

 혜성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있다면 모를까, 우린 그냥 서점이잖아요. 전쟁은 군인들에게 맡깁시다.”

 “맞는 말이긴 하죠.”

 이태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근데 전 아직도 사장님의 속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제국과의 계약은 목숨을 걸고 거부하시고, 만세 운동은 참가하지 않으시고...... 정말 사장님은 알다가도 모르겠군요.”

 “제가 이중적으로 보이나요?”

 “그런 뜻은 아닙니다.”

 “괜찮아요. 근데 저한테는 딱히 무슨 신념 같은 건 없어요. 그러니까 그냥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뿐이죠.”

 혜성은 가볍게 웃었다.

 “전 예나 지금이나 그냥 책 쓰는 속물일 뿐이에요. 신념 같은 건 없어요.”

 “자꾸 듣다 보니 정말 그렇게 느껴질 정도군.”

 박준식이 중얼거렸다.

 “그게 진짜니까요.”

 혜성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물론 저도 연합군이 빨리 움직이길 바라고 있어요. 그러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도 곧 끝나겠죠.”

 “어쩌면 식민지도 끝날지 모르고.”

 이태민이 말했다.

 “근데 말이야, 연합군이 소화의 항복을 받아낸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자동으로 독립이 되는 걸까?”

 박준식의 말에 이태민이 목소리를 높였다.

 “당연한 거 아니야?”

 “그건 우리 생각이지. 제국을 다른 강대국이 정복하면 우린 제국의 영토 그대로 다른 나라에 흡수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연합국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승인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벌써 인터넷에는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던데.”

 그 말에 혜성도 걱정이 되었다.

 “그러게요. 연합국이 우리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때는 어떻게 되는 거죠? 우리는 제국령의 일부로써 같이 패전국 취급을 받게 되는 걸까요?”

 “우리는 반드시 독립을 할 겁니다.”

 이태민이 힘주어 말했다.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처절한 노력이 있었고, 우리 국민들도 수십년동안 만세운동과 같은 식으로 독립의 열망을 여러 차례 보여줬잖아요. 그 어떤 나라도 그것을 절대 무시하지는 못할 겁니다.”

 이태민의 말에 혜성은 마음이 약간 놓였다.


 다음 날 새벽, 혜성은 잠이 오지 않아서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맡에 둔 스마트폰을 집었다. 그리고 무심코 뉴스를 클릭했다가 속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연합군이 소화 본토에 핵무기를 투하한 것이다.

 “핵이라니!”

 혜성은 놀라서 소리쳤다.

 “핵이라니, 이럴 수가......”

 혜성은 즉시 여왕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기다리자 여왕이 전화를 받았다.

 “윤아, 연합군이 제국에 핵 공격을 했대! 사실이야?”

 “응, 나도 방금 전에 보고를 받았어.”

 여왕은 혜성이 전화를 하기 전부터 깨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제국 본토에서도 직접 연락을 받았어. 핵 공격은 사실인 모양이야.”

 “와, 연합군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느낀 거지. 안 그래도 제국 쪽에서 움직이는 걸 보니까 연합군이 좀만 더 꾸물거렸으면 위험할 뻔했어. 연합군이 현명하게 대처한 거지.”

 “근데 소화에는 우리 국민들도 꽤 있을 텐데......”

 그 말에 여왕의 목소리도 가라앉았다.

 “그건 정말 유감이야.”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혜성이 물었다.

 “황제가 항복할까?”

 “그건 확신할 수 없어. 하지만 항복할 가능성이 높지.”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그럼 연합군이 추가 핵공격을 가하겠지.”

 그들은 잠시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았다. 혜성은 밤늦게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했고, 여왕은 자고 있지 않았다며 괜찮다고 했다.

 “정말 역사적인 밤이군.”

 “그러게. 그래서 네가 더 보고 싶어.”

 여왕의 말에 혜성은 어색하게 웃었다.

 “내일 내가 궁전으로 놀러갈까?”

 “좋아.”

 그들은 잘 자라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혜성은 다시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검색했다. 인터넷 기사는 핵에 대한 뉴스로 도배되어 있었지만 모두 짧은 속보일 뿐 구체적인 기사는 없었다. 혜성은 계속 뉴스를 보다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도로 누웠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아서 그는 잠시 뒤척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그는 그렇게 어둠 속에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제국은 핵을 맞고도 항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흘 후, 연합군은 2차 핵공격을 감행했다.

 핵폭발이 두 번 일어나는 동안에도 혜성은 자신의 방에서 계속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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