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서> 소설 연재
광복 이후에 일어난 복잡한 정치적 흐름을 다 설명하는 것은 지루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은 국제사회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다. 대한민국은 몇십년 만에 다시 주권을 회복했고, 그전까지 제국의 괴뢰정부였던 기존의 정부가 그대로 한국의 공식적인 정부로 이어졌다. 정부 인사와 정부 체계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독립 직후 노예제를 폐지했다. 이제 한반도에 있는 모든 노예들은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한편 패망한 소화 본토에는 연합군 사령부가 들어섰다. 소화는 오랫동안 치른 전쟁과 원폭으로 입은 피해를 극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혜성은 가끔 뉴스를 확인하는 시간만 빼면 온종일 주문을 썼다. 그는 서점과 매려 왕궁을 오가며 주문을 썼다. 그는 서점 안의 성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작업을 하는 게 편했지만 여왕이 그를 보고 싶다며 자주 궁전으로 불러서 일주일의 절반 정도는 궁전에서 지내면서 주문을 썼다. 사실 그는 조용하기만 하면 어디서 글을 쓰든 상관없었다.
세상은 혜성의 방 밖에서 시끄럽고 어지럽게 흘러갔다. 그는 세상의 흐름에 자기도 모르게 들뜨기도 했지만, 그래도 곧 들뜬 가슴으로 책상에 앉아서 주문을 쓰다보면 어느새 다시 차분해졌다.
혜성처럼 여왕 역시 자신의 일에 바빴다. 여왕은 정말 정신없이 일해야 했다. 그동안 불사신 서점처럼 매려 역시 제국에게 협조하지 않아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고 있었는데, 이제 제국이 사라지면서 묶여있던 매려의 날개가 풀린 것이다. 사실 매려는 오래 전부터 제국이 전쟁에서 패하고 매려를 묶은 여러 가지 제한이 사라졌을 때 어떤 식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새로운 사업을 개척할지 내부적으로 계획을 다 세워놓았다. 그래서 식민지에서 벗어나자마자 곧장 그 계획들을 실행하느라 여왕은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여왕은 그 바쁜 상황에서도 시간을 쪼개서 혜성을 만나고 싶어 했다. 그들은 주로 식사를 같이 하는 걸로 데이트를 대신 했다.
여왕은 식사를 하면서 매려가 앞으로 어떤 사업을 할지, 현재 시국이 어떤 식으로 변화할지에 대해서 혜성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혜성은 여왕의 이야기를 즐겁게 들었다.
“이 나라는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이 있어. 매려도 거기에 발을 맞춰야지.”
여왕이 말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우리 부모님이 독립의 순간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는 거야. 부모님이 진짜 좋아하셨을 텐데.”
여왕의 말에 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부모님도 독립을 기뻐하실 거야. 아, 혹시 넌 오빠를 만날 생각은 없어?”
“없어.”
여왕이 웃으며 말했다.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아.”
“오빠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아?”
“그것도 몰라. 직원들이 알아보겠다고 했는데 내가 찾지 말라고 했어. 어쩌면 소화에 있다가 핵폭발로 죽었을지도 모르지.”
혜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구름은 아직도 혼수상태였다. 혜성은 가끔 궁전의 병실에 누워있는 김구름을 찾아가 옆에 앉아 있곤 했다. 그는 김구름의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면 김구름이 일어나서 그에게 괜찮다고 말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김구름은 미동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혜성은 방에 틀어박혀 주문을 쓰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써온 주문은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주문의 완성이 가까워지면서 혜성은 하루 종일 두문불출하고 오직 주문만 썼다. 여왕도 그것을 알았기에 혜성을 방해하지 않았다.
주문의 완성이 가까워지면서 이태민과 박준식 역시 책을 만들 준비로 바빠졌다. 혜성이 주문을 완성하면 다음으로 할 일은 궁극의 구미호의 꼬리털로 만든 종이 위에 주문을 새긴 뒤 거기에 붕새의 여의주에서 추출한 마력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 중 마력을 부여하는 과정이 가장 복잡하고 오래 걸렸다. 하지만 그 단계에서는 미리 설정한 프로그램에 따라 서점이 자동으로 마력을 부여했기 때문에 이태민과 박준식은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가끔 점검만 하면 될 뿐이었다.
한편 매려는 사업의 확장과 개편으로 바쁜 와중에도 곧 있을 매려의 건국 기념일을 축하하는 축제 준비에 한창이었다. 궁전 직원들은 바쁘게 오가며 축제를 준비했다. 물론 혜성은 내내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몰랐지만.
매려 건국 기념일 당일 새벽, 김혜성은 흑마법서의 주문을 완성했다.
그는 천천히 방 밖으로 나왔다.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걸었다. 그는 살짝 들뜨고 미묘한 기분에 약간은 허탈하면서도 시원한 기분으로 궁전의 정원을 걸었다. 정원 관리인들이 혜성을 알아보고 인사하자 혜성도 그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머릿속이 멍한 상태로 계속 걷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매려 병원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김구름이 보고 싶어서 병실로 올라갔다.
혜성은 병실 문을 열면서 김구름이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김구름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혜성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이사님, 저 해냈어요.”
혜성이 말했다.
“흑마법서의 주문을 완성했어요.”
김구름은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혜성은 말을 이었다.
“이건 제대로 된 주문일 거예요. 틀림없어요. 그런 확신이 들어요.”
그는 목이 메어 목소리가 떨렸다.
“그 전까지 전 제가 왜 태어났는지, 살아있을 가치가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확신해요. 전 살아있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에요. 흑마법서를 썼으니까요.
이사님이 이 순간을 함께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이사님도 일어나셔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틀림없이 기뻐하시겠죠. 이사님도 흑마법서를 꼭 만들고 싶어 하셨으니까요.”
김구름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혜성은 눈을 감고 있는 김구름의 손을 잡고 손등을 쓰다듬었다.
“전 다시는 이런 책을 만들 수 없을 거예요. 그런 느낌이 들어요. 전 이 책을 만드는데 제 영혼을 다 갈아 넣었기 때문에 아마 다시는 흑마법서를 만들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모든 주문은 일회용이잖아요. 마력을 부여해서 마법서로 만들고 난 뒤에는 같은 주문은 재활용하지 못하잖아요. 마치 우리 삶의 시간처럼 말이에요. 마력을 부여해서 책이 된 주문은, 설사 그 책이 파괴되어 사라진다고 해도 다시 마력을 부여해서 마법서가 될 수 없죠. 그런 점에서 한 번 사용한 주문을 다시는 쓸 수 없는 것처럼, 한 번 써버린 제 삶의 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저는 이 책을 만들기 위해 제 인생을 다 바쳤어요. 예전에는 이게 과연 그럴 가치가 있는지 의심이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어요. 그럴 가치가 있었다고요. 무한히 위대한 문학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건, 내 한 번뿐인 인생을 바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고요.”
혜성은 김구름의 손을 잡고 오랜 시간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혜성은 병실에서 나온 뒤 매려의 거리를 걸어 다녔다. 지난 10년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주문을 쓰면서 고통스러워하던 시간, 주문이 잘 써질 때는 즐겁던 시간, 홀로 방 안에서 고독과 싸우며 주문을 쓰던 시간이 모두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그는 다시 궁전으로 돌아갔다. 궁전은 축제가 시작되어 매려 시민들과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특히 오늘은 대한민국의 독립 이후 첫 번째 매려 건국 기념일이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운 분위기로 가득했다.
정원에서는 음악이 연주되고 있었고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혜성은 정원의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여왕에게 걸어갔다.
“어? 여기 있었네.”
여왕이 그를 보며 반가워했다.
“우리 춤추자.”
“응?”
“나가서 춤추자.”
혜성은 여왕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리고 정원 한가운데로 걸어가 여왕과 함께 춤을 추었다.
그는 춤을 잘 추지도 않았고, 멋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모습은 아름다웠다. 햇살이 그들의 몸짓과 머릿결을 따사롭게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