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서> 소설 연재
혜성이 주문을 완성했다는 말에 이태민과 박준식은 크게 놀라며 기뻐했다. 그들은 즉시 흑마법서를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혜성이 쓴 주문을 궁극의 구미호의 꼬리털로 만든 종이에 새기는 일이 첫 단계였다.
그 작업에만 일주일이 걸렸다. 혜성이 쓴 주문이 워낙 방대했기 때문이다. 종이에 주문을 새기는 일은 서점 안의 마법의 기계가 맡았다. 세 사람은 종이에 주문이 다 새겨지자 그 다음으로 붕새의 여의주에서 마력을 추출하는 일에 돌입했다.
“여의주에 담긴 마력이 워낙 커서 흑마법서를 만들고 나서도 마력이 좀 남네요.”
컴퓨터 모니터를 보던 이태민이 말했다.
“남은 걸로 다른 책을 만들 수도 있겠군요.”
혜성의 말에 박준식이 손뼉을 한 번 치더니 말했다.
“어쨌든 정말 다행이에요. 이제 우리 지점의 계약 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우리가 책을 만들었는지 아닌지를 본사에서 어떻게 알죠?”
“계약 기간 마지막 날에 본사 직원이 직접 지점으로 와서 상황을 확인합니다.”
이태민이 대답했다.
“아하, 그런 식이군요. 흑마법서가 그 전까지는 완성되겠죠?”
“약간 아슬아슬하긴 한데 그럭저럭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들이 응접실에서 그런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가게 밖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혜성이 전화를 받았다.
“네, 불사신 서점 서울 지점입니다.”
상대방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김혜성 사장님 계신가요?”
“네, 제가 김혜성입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젊은 남자 목소리였다. 그는 잠시 주저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중요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 사장님과 만나서 얘기할 수 있을까요?”
“어떤 일인가요?”
“만나서 직접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 그러니까......”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김지훈과 관련된 일입니다.”
“김지훈이요? 노예해방전선의 지도자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 사람과 관련해서 제가 사장님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혜성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만나서 얘기하시죠.”
“오늘 시간 되시나요? 제가 지금 마침 불사신 서점 근처에 있는 카페에 있거든요.”
“아, 양천구에 계세요?”
“네.”
남자는 서점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카페의 이름을 댔다. 혜성은 지금 가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이에요?”
박준식이 물었다.
“어떤 사람이 김지훈에 대해서 저한테 알려줄 게 있다고 하네요.”
“김지훈?”
이태민이 말했다.
“조심하세요. 이상한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제국이 무너지긴 했지만 아직도 사장님을 노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요. 경호원들과 함께 가시죠.”
“그럼 되겠네요. 어차피 오늘은 할 일도 없으니까 가서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려고요. 갔다 오겠습니다.”
혜성은 경호원들을 데리고 서점 밖으로 나왔다. 카페는 서점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
평일 낮이라 카페 안은 한적했다. 혜성이 카페에 들어가자 구석에 앉아 있던 왜소한 체구의 젊은 도깨비 남자가 일어났다.
“김혜성 사장님이시죠?”
그가 혜성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혜성은 그와 악수를 했다. 남자는 이십대 후반 정도로 보였고 안색이 다소 창백했다. 혜성은 한눈에 보기에도 그가 건강이 좋지 않다고 느꼈다.
그들은 커피를 주문하고 남자가 앉아 있던 구석 자리에 앉았다. 경호원들은 그들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앉았다.
“저는 강민수라고 합니다. 사장님을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남자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혜성은 어색하게 웃었다.
“김지훈에 대해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는데......”
강민수는 불안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했다. 그는 뭔가를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혜성은 그가 입을 열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김지훈이랑 관련된 일이긴 합니다만, 사실은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에요. 사실 제가 진짜 하려던 이야기는 김지훈에 대한 게 아닙니다. 물론 그 친구와 관련이 있긴 해요. 다만 그를 언급하면 사장님이 관심을 보이실 것 같아서 말했던 겁니다.”
“어떤 일이죠?
강민수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사실을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어요. 그냥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평생 비밀로 간직한 채 죽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었어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도대체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숨긴 채 오랫동안 침묵했습니다. 하지만 더는 침묵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말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제 딴에는 용기를 내서 사장님에게 찾아온 겁니다.”
“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하고 관계가 있는 일인가 보군요?”
“그건 아닙니다.”
강민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저는 꼭 사장님을 만나고 싶었고 사장님에게 털어놓고 싶었어요. 사장님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사장님을 제외하면 달리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 아무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왜......”
“왜냐하면,”
강민수는 떨리는 눈빛으로 혜성을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사장님께서는 도깨비 여왕의 약혼자이고, 연방의 도깨비 강제노동을 반대했고, 무엇보다도 용산의 대학살에서 수많은 사람을 구한 영웅이니까요. 그래서 사장님이라면 이 사실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어요. 저는 아무 힘도 없고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제 사장님에게 이 일을 맡기겠습니다. 그래서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혜성은 들을수록 아리송해졌다.
“그래서 말씀하시려는 게 어떤 것이죠?”
강민수는 떨리는 손으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저는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오랜 세월 두려움에 떨며 숨어 지냈습니다. 저는 김지훈의 최후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진짜요?”
혜성은 깜짝 놀랐다.
“네. 저는 지훈이와 함께 노예로 일했습니다. 저는 지훈이와 친해졌고, 그가 죽을 때 옆에서 임종을 지켰죠.”
“김지훈과 함께 노예로 일했다는 말씀은 매자의 유물 발굴 현장에서 노예로 계셨다는 말씀인가요?”
“아닙니다. 그건 그 후의 일입니다. 김지훈이 노예해방전선의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납치된 후의 일입니다.”
“누가 김지훈을 납치했는데요? 제국인가요?”
“연방입니다.”
“무슨 연방을 말씀하시는 건지?”
“지금의 연방 정부요. 대한민국 정부 말입니다.”
혜성은 눈을 깜박였다.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가 안 되는군요. 한국 정부는 독립 전이나 지금이나 노예제에 반대하는 입장이잖습니까.”
“겉으로만 그럴 뿐입니다. 연방은 비밀리에 대규모로 노예들을 부리고 있습니다.”
강민수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태백산맥 지하에는 거대한 지하도시가 있습니다. 한국 정부가 식민지 이전, 아주 오래 전부터 지어놓은 것이죠. 수십만 명의 도깨비 노예들이 그곳에 갇힌 채로 강제노동을 당하고 있습니다. 전부 도깨비로만 이루어진 노예들이죠. 전 김지훈과 함께 그곳에 갇혀 있었습니다.
김지훈은 노예해방전선의 지도자로 활동하던 과정에서 연방 정부와 몇 번 교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식민지 시절에도 연방 정부는 노예제를 반대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지훈이가 노예들을 해방시키던 중 연방 정부의 비밀에 대한 단서를 잡게 된 겁니다. 지훈이는 연방에게 지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고 물었는데, 연방은 지훈이가 더 눈치 채고 그 사실을 폭로하기 전에 지훈이를 납치해버렸습니다. 그리고 태백산맥 탄광의 노예로 만들어버렸죠.
저는 지훈이보다 먼저 그곳에 끌려가서 강제노동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새로 들어온 지훈이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린 빨리 친해졌어요. 처음에는 지훈이가 밖에서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지훈이와 친해진 뒤 지훈이가 자신은 밖에서 노예를 해방시키는 단체를 이끌고 있었는데, 연방 정부의 배신으로 이곳에 끌려왔다고 말해줬죠.
지훈이는 그곳에서 저와 함께 몇 년 동안 일하다가 병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탄광에서는 병에 걸려 죽는 사람이 많아요. 지훈이도 같은 병에 걸려서 죽었죠. 저는 그의 임종을 지켰습니다.
지훈이가 죽고 몇 달이 지났을 무렵 탄광에서 어떤 시설이 무너지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그 복구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작은 구멍을 하나 발견했는데, 감독관 몰래 그 구멍을 기어나가자 밖으로 향하는 통로가 나와서 홀로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숨죽인 채 밖에서 살아갔죠. 저는 몇 년 동안 연방이 제가 탈출한 것을 알아내고 저를 잡으러 올까봐 두려워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광복이 왔고, 저는 제국이 무너지고 노예제가 폐지된 후에는 혹시 그곳의 진실이 드러나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죠. 연방은 지상에서는 노예제를 금지했지만 지하에서는 여전히 강제노동시설을 유지하고 있어요.”
혜성은 강민수가 말을 마친 후에도 잠시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가까스로 물었다.
“그게 사실인가요?”
“네. 전부 제가 겪은 일입니다.”
혜성은 눈앞의 남자가 미친 사람이 아닌가 싶어서 가만히 쳐다봤다.
“제가 미친놈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그건 아닙니다만...... 선생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그 탄광은 무슨 목적으로 운영되는 것이죠?”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저희는 그저 어떤 거대한 광물이나 뼈 같은 것에서 조각을 채취하는 일을 하라고 강요당했습니다.”
“그곳에 수십만 명의 노예가 갇혀 있다고요?”
“네. 전부 도깨비들로만 구성된 노예들입니다.”
“근데 그 사실을 지금까지 아무도 모른다고요?”
“지상의 사람들은 전혀 모르죠.”
“그리고 선생님만 그곳에서 운 좋게 탈출하신 것이고요?”
“그렇습니다.”
“혹시 선생님이 말씀하신 이야기의 증거를 보여주실 수 있나요?”
“제가 지금 갖고 있는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직접 보여드릴 수는 있을 것 같네요.”
“어떻게요?”
“제가 탈출한 굴 안으로 기어들어가서 탄광의 모습을 사장님께서 눈으로 직접 확인하시는 겁니다. 제가 며칠 전에 태백산에 가서 그 굴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확인했는데,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정부에서는 아직 그 굴의 존재에 대해서 모르는 거죠.”
혜성은 한동안 눈앞의 남자를 응시했다. 그는 이 사람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이 사람은 그냥 장난을 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세상에 흔한 거짓말쟁이. 하지만 강민수는 지치고 불안하고, 무엇보다도 간절해 보였다. 혜성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그 굴이 있는 곳까지 절 데려가 주세요.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혜성과 강민수, 그리고 세 경호원은 곧장 차를 타고 강원도 태백시로 향했다. 그들은 강민수가 이끄는 대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등산로를 벗어나서 한참동안 산을 오른 끝에 그들은 나무가 울창한 곳에 도달했다. 강민수는 커다란 바위 옆에 있는 작은 동굴을 가리켰다.
“이곳입니다. 이 안으로 들어가면 있어요.”
동굴은 허리를 숙여야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작은 크기였다. 옆에 있던 경호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공자님,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요. 저만 들어갈 테니까 여러분은 여기서 기다려주시겠어요?”
“저희도 같이 들어가겠습니다.”
“굴이 좁아서 다 같이 들어가긴 힘들어 보여요. 저랑 이 분만 들어갈게요.”
혜성은 괜찮다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는 강민수에게 들어가자고 말했다.
강민수는 미리 가져온 헤드 랜턴을 혜성에게 내밀었다. 혜성이 랜턴을 머리에 쓰자 강민수가 먼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혜성도 그를 따라 들어갔다.
동굴은 아래로 계속 이어졌고 들어갈수록 좁아졌다. 허리를 숙인 채 계속 내려가다 보니 허리가 점점 아파졌다. 비좁고 어두운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혜성은 갑자기 제국인 폭도들에 의해 관에 갇혀 땅 속에 파묻혔던 때가 떠올라 숨이 막혔다. 혜성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두려움은 지워지지 않았다.
“사장님? 괜찮으신가요?”
앞장서서 걷던 강민수가 뒤돌아보며 물었다.
“조금 답답해서 그래요. 괜찮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굴이 갈수록 좁아져서 그들은 허리를 굽힌 상태로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가야 했다.
굴 안으로 들어간 지 체감상 3, 40분은 지난 것 같았다. 앞장서서 걸어가던 강민수가 멈추더니 말했다.
“죄송하지만 여기부터는 굴이 아주 좁아서 기어가야 합니다.”
“아직 멀었나요?”
“거의 다 왔습니다. 좀만 더 가면 나옵니다.”
강민수의 말대로 굴이 갑자기 더 좁아졌다. 혜성은 강민수를 따라 엎드려서 기어가기 시작했다. 엎드린 상태로 아래로 내려가다 보니 얼굴로 피가 쏠렸다. 혜성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한참 동안 그렇게 기어가자 저 앞에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강민수는 이마의 랜턴을 껐다. 혜성도 불을 끄고 강민수를 따라 계속 기어갔다.
앞에 있던 빛은 가까이 갈수록 점점 커지다가 마침내 작은 구멍으로 드러났다. 먼저 구멍 밖으로 빠져나간 강민수는 뒤따라오던 혜성이 구멍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줬다.
“여기서부터는 조용히 움직이셔야 합니다. 들키면 사장님도 붙잡혀서 노예가 되실 거예요.”
강민수가 소곤거렸다.
그곳은 천장이 높고 거대한 공간이었다. 갑자기 넓은 공간이 나오자 혜성은 당황스러웠다. 마치 지상으로 나온 것만 같았다. 강민수는 혜성을 이끌고 작은 언덕 위로 올라가서 엎드린 채 아래를 가리켰다.
그곳은 일종의 공사장 같은 모습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감독관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지시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공사장 아래의 커다란 굴 입구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옆의 굴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뭔가를 든 채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멀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한 눈에 보기에도 강민수의 말대로 인부들은 모두 도깨비 같았다. 도깨비들은 모두 똑같은 낡은 회색 옷차림이었다. 마치 죄수복과 비슷해 보였다.
공사장의 높은 곳에서는 총을 든 감시자들이 곳곳에 서 있었다. 인부들은 곡괭이와 여러 가지 장비를 든 채 광물처럼 보이는 물질이 담긴 수레를 밀며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저 쪽이 노예들의 숙소에요.”
강민수가 작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곳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저 사람들이 전부 노예란 말인가요? 합법적으로 고용된 광부가 아니고요?”
“네. 전부 밖에서 끌려왔거나 여기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강민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수레를 끌고 가던 인부 한 명이 땅에 쓰러졌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감독관이 달려와 인부를 채찍으로 후려쳤다. 하지만 인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감독관은 인부를 계속 때리다가 인부가 미동이 없자 무전기로 어딘가에 연락을 했다. 그러자 잠시 후 들것을 든 사람들이 와서 인부를 싣고 가버렸다.
혜성은 그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강민수도 옆에서 숨을 죽인 채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제 가야겠습니다. 여기 오래 있으면 위험해요.”
두 사람은 다시 좁은 굴을 기어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은 더 오래 걸렸다. 동굴 밖으로 나온 혜성은 땅에 주저앉았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호원들이 그를 부축해서 몸에 묻은 흙을 털어주었다.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혜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로 강민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본 그 광경은.......”
강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연방이 비밀리에 운영하는 강제노역장입니다.”
그들은 다시 차를 타고 서점으로 돌아왔다. 혜성은 강민수와 휴대폰 번호를 교환한 뒤 나중에 다시 연락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혜성은 서점에 들어가 자신이 본 광경을 박준식과 이태민에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두 직원들 역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이태민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연방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죠?”
박준식이 물었다.
“그건 강민수 씨도 모른다고 했어요.”
“지금까지 제국의 노예제를 그렇게 비난했으면서 자기들은 몰래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니! 사장님,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혜성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이태민이 말을 이었다.
“연방 정부에게 탄광에 대해 물어보는 건 위험합니다. 연방은 우리가 그 사실을 알아냈다는 걸 알게 되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제 생각도 그래요. 비밀리에 거대 노예 시설을 운영하는 사람들이니까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그리고 답해준다고 해도 진실을 알려주진 않겠죠. 이건 어때요? 일단 언론에게 알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공론화하는 거죠. 세상이 이를 알게 되면 그 때는 정부도 무시하지 못할 겁니다.”
“좋은 생각이에요.”
이태민이 말했다. 하지만 박준식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과연 좋은 생각일까요? 우리가 그걸 언론에 제보했다는 걸 정부가 알게 되면 그 때는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일단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는데 우리에게 해코지를 하지는 않겠지.”
이태민의 말에 박준식은 고개를 저었다.
“사장님, 저는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솔직히 이 일이 우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죠?”
혜성이 물었다.
“강민수라는 사람은 이 진실을 자신이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장님한테 떠넘긴 겁니다. 어찌 보면 비겁한 거죠. 우린 그 탄광과 직접적인, 아니 간접적인 관련도 없잖아요. 그냥 그 사람은 심리적인 도움이 필요했던 거예요. 솔직히 사장님이 이 일을 해결할 필요는 없어요. 사장님은 어디까지나 마법사일 뿐이지, 사회 운동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왜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일까지 해야 합니까.”
“도대체 왜 그래? 뭐가 걱정이야?”
이태민이 물었다.
“난 연방 정부가 무서워.”
박준식이 대답했다.
“정부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었어. 우리가 이 사실을 제보한다면 엄청난 사회적 파장이 일어날 거야. 그런 일이 일어나면, 정부는 자신들을 곤란에 빠트린 제보자를 색출하려 할 거야. 그렇게 해서 우리가 제보자라는 걸 알아낸다면, 그 때는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난 그게 걱정돼서 그래.”
“정부가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정부는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제국의 노예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어. 하지만 뒤로는 비밀리에 거대 노예시설을 운영하고 있었지. 정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한 일도 할 거야.”
“제보자의 신원을 보호하는 건 언론인의 기본이야. 우리가 제보했다는 걸 언론이 알리지 않으면 괜찮잖아.”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지. 언론이 그런 기본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리고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접촉한 기자를 정부가 족친다면?”
“정부가 기자를 고문이라도 할까 봐 그래?”
“안 한다는 보장이 있어?”
이태민은 고개를 저었다.
“지나친 생각이야.”
“지나친 건 사장님이 보고 온 광경 아니냐?”
그렇게 말한 뒤 박준식은 생각에 잠겨 있는 혜성에게 말했다.
“사장님, 조금이라도 걱정되면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사장님은 지금까지 고생을 할 만큼 했어요. 또 다시 또 다른 고생을 자처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강민수 씨에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보라고 하면 돼요. 그런다고 해도 아무도 비난하지 못할 겁니다.”
“매려 여왕에게 도움을 구하면 어떨까?”
이태민이 말했다.
“그건 안돼요.”
혜성이 말했다.
“이 문제를 언론이 아니라 매려가 공론화한다면 매려는 정부에게 큰 탄압을 받을 겁니다. 이런 문제는 언론이 공론화하는 게 맞아요.”
“그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군요. 언론에 제보하고 정부에서 제보자를 색출하는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박준식은 그렇게 중얼거린 뒤 말을 이었다.
“모르겠다. 그냥 사장님이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알아두세요. 진실을 알리는 건 사장님의 의무가 아니에요. 침묵하는 게 사장님의 죄는 절대 아니라고요.”
혜성은 한참을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방관자도 가해자라고 그랬어요.”
그는 고개를 들고 두 직원과 눈을 마주쳤다.
“진실을 모른다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 침묵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제가 직접 언론에 제보하겠습니다. 이 사실이 공개되면 대중과 언론이 들고일어날 테고, 그렇게 되면 연방 정부는 자신들이 지금까지 비밀리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제대로 밝힐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리고 나아가 강제 노동을 없앨 수도 있겠죠. 제가 직접 제보하겠습니다.”
혜성은 다음날 대현일보의 최명준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명준 기자는 오랫동안 제국의 노예제에 대한 탐사보도를 해온 것으로 유명한 기자였다. 혜성은 이 사실을 어떤 언론사의 어떤 기자에게 제보할지 고민하다가 최 기자를 고르기로 했다. 최명준 기자는 불사신 서점 지구 지점의 사장이자 매려 여왕의 약혼자인 혜성이 직접 만나서 제보할 게 있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달려왔다.
혜성은 최 기자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하도록 강민수를 설득했다. 언론에 알린다는 말에 강민수는 두려워하는 듯했으나 혜성의 설득에 결국 말을 하기로 결심했다.
직접 만난 최명준 기자는 생각보다 젊은 도깨비 남성이었다. 혜성은 불사신 서점으로 두 사람을 불렀다. 강민수는 혜성이 보는 앞에서 긴장한 모습으로, 하지만 차분하게 기자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예상대로 최 기자는 이야기를 듣고 크게 놀랐다. 혜성은 자신도 강민수와 함께 그 굴 안으로 들어가서 탄광의 내부를 봤다고 덧붙였다.
“저도 직접 가서 봐야겠습니다. 안내해 주실 수 있나요?”
최 기자의 말에 강민수는 알겠다고 했다.
두 사람이 강원도로 떠나기 전에 혜성이 물었다.
“취재를 하고 난 다음에는 기사를 내시는 거죠?”
“네, 증거 사진과 영상도 찍은 다음에 기사를 낼 생각입니다.”
두 사람이 강원도로 떠난 다음 날, 최 기자는 동굴 안으로 몇 번 더 들어가서 충분한 증거가 될 만큼 사진과 영상을 모아야겠다고 혜성에게 문자를 보냈다.
대현일보의 1면에 특종이 실린 것은 혜성이 최 기자를 만나고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대현일보는 1면과 여러 면을 할애해서 최 기자가 찍은 노예 시설의 사진을 실었다. 그리고 대현일보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최 기자가 직접 촬영한 노예 시설의 내부를 담은 동영상도 여러 편 올라왔다.
사진과 영상에는 노예 시설과 강제 노동의 모습이 자세히 담겨 있었다. 최명준 기자는 일주일 동안 시설 안을 몰래 돌아다니며 자세히 촬영을 한 모양이었다. 그는 수십만 명의 노예들이 지내는 열악한 시설과 그들이 채찍을 맞으며 광물을 캐고 가공을 하며 혹사당하는 모습, 그리고 부상자와 사망자들의 모습까지 먼 곳에서 확대해 촬영을 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찍은 것들이었다.
기사는 이 모든 것이 연방이 오래 전부터 비밀리에 운영해온 대규모 노예 시설이라고 설명했으며, 그곳에서 탈출한 익명의 제보자, 즉 강민수의 증언도 자세하게 싣고 있었다.
그 날 아침 인터넷 기사를 본 혜성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큰 파장이 일겠군.”
그는 중얼거렸다.
“제발 잘 풀려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