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6·10 만세운동과 1987년 유월 항쟁
6·10 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순종 장례일을 계기로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대규모 시위운동이었습니다. 이는 일제에 맞서 독립을 향한 우리 민족의 뜻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50여 년이 지나, 1987년, 공교롭게도 다시 한번 같은 날 민중이 뜻을 모아 일어섰는데요. 바로 군부 독재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으로, 이날은 유월 항쟁의 시작이었습니다.
1920년대 중반에 들며 3·1운동을 계기로 움튼 독립운동도 일제의 탄압 아래 힘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임시정부 역시 여러 문제에 직면해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민족운동의 활력소는 학생운동이었습니다. 기존의 분산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학생층 전체를 망라한 계획적 운동으로 발현된 것이 6·10 만세운동이었는데요. 1926년 4월 25일, 대한제국 황제 순종의 승하는 만세운동의 발단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나라를 빼앗기고 실의 속에 살다간 순종에 대한 애도는 국가 없는 민족의 설움을 표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일제는 이를 계기로 시위가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철저한 경계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당시 조선공산당은 민족주의 세력과 연합해 대한독립당을 조직하고 그 이름으로 순종의 장례일에 대규모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 등을 결정했습니다. 이 시도는 비록 사전 발각되었지만, 시위 계획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실천될 수 있었습니다.
학생 단체는 크게 두 갈래로, 먼저 전문학생 중심의 ‘사직동계(社稷洞系)’가 있습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들은 순종의 비보를 듣고 민족운동을 일으키겠다 결심하며 5월 20일, 40여 명이 모여 장례일에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결의했는데요. 6월 8일 태극기와 독립만세 격문 30매를 만들었고, 다음날 “2천만 동포의 원수를 구축하라! 피의 대가는 자유다. 대한독립만세!”라는 격문을 작성하여 『시대일보』 배달부 김낙환을 통해 빌린 기계로 1만여 매를 인쇄했습니다. ‘통동계(通洞系)’는 중등학교 학생 중심으로, 중앙고보·중동학교생 박용규, 곽대형 등은 순종 승하 소식을 듣고 시내 사립고보생 중심의 시위운동 전개를 결의했습니다. 5월 29일, “조선민중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제국주의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이라는 격문을 기초하여 5,000매 등사했고, 배분 후 거사일을 기다렸습니다. 이들 계획은 기성 독립운동가들에 감시가 쏠리는 틈을 타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6월 10일, 학생 2만 4천여 명은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도열했습니다. 상여가 종로 3가를 지날 때 학생 300여 명이 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뿌리며 시위를 감행했고, 이를 시작으로 학생들은 행렬을 따라 시내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소식을 들은 전국 학생들도 동맹휴학 투쟁에 나섰고, 군중도 합세하며 제2의 3·1운동과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으나 결국, 군대까지 동원한 일제에 저지당했습니다. 경찰에 잡힌 학생은 전국적으로 1,000여 명이나 되었고 대부분 석방되었으나 11명은 기소되어 그해 11월 공판이 열렸습니다. 재판장의 심문에 학생들은 “거사의 목적과 동기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인데 새삼 물어볼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나라의 형편은 현명한 너희들이 더 잘 알 텐데 무엇을 알려 하느냐?” 등 거침없이 거사의 목적을 진술했습니다. 이처럼 6·10 만세운동은 학생들이 주체로서 3·1운동 이후 민족의 독립 의지를 다시 보여준 항일운동이자 이념 차를 극복한 실천이었습니다.
그리고 50여 년이 흐른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개헌논의 중지와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한 정부이양을 주 내용으로 하는 「4·13호헌조치」를 발표합니다. 각계 인사들의 비난 성명이 이어졌으며, 5월 27일에는 재야와 통일민주당이 연대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발족했고, 이는 이후 유월 항쟁의 구심체로 역할합니다. 한편, 5월 18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조작·은폐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이에 국민운동본부는 6월 10일 ‘박종철군 고문살인 조작·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합니다.
6월 9일, 연세대 학생들은 6월 10일 예정된 국민대회 출정을 위해 연세인결의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날 이한열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에 국민의 분노는 더욱 고조됩니다. 그리고 6월 10일, 국민대회는 전국 22개 도시에서 약 24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시민들은 신세계 앞 광장을 완전히 점거하는 데 성공했고, 이 농성은 6월 15일까지 계속되며 항쟁의 전국적 확산에 중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당시 경찰은 6만여 명의 병력을 투입했지만, 각지로 분산된 방어력은 한계를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이후 국민운동본부는 투쟁의 재결집을 위해 6월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선언하고,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날 대회에는 전국 150여만 명의 민중이 참여했으며, 부산 지역에서 이태춘이 경찰의 다연발 최루탄 난사 직후 얼굴에 최루탄을 뒤집어쓴 채 고가도로에서 떨어져 숨지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한편 6월 24일 전두환과 김영삼의 여야회담이 결렬되자, 26일 국민운동본부는 ‘국민평화대행진’을 강행합니다. 전국 시민과 학생 130여만 명이 경찰의 원천봉쇄 방침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이는 투쟁의 열기가 집약된 결과였습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 조치를 약속하며 「6·29선언」을 발표합니다.
* 참고
6·29 민주화선언 환영 이벤트로 무료 영업을 했던 가화커피숍 이야기
6·10 만세운동은 침체되어있던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고, 3·1운동과 이후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교량이 되어 민족 독립운동사에서 하나의 횃불이 되었습니다. 2020년 12월 8일에는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바 있습니다. 6월 10일 국민대회를 기점으로 한 유월 항쟁은 한국 현대사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습니다. 이처럼 민중은 뜻을 모아 사회의 변화를 도모해왔으며, 우리 역사 속에는 민중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글·기획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걸음기자단 8기 양여진
참고문헌 |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2017, 『한국사』, 새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