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목욕탕의 역사
목욕탕에서 때를 시원하게 밀고 바나나 우유 한 모금 들이키며 하루의 시작을 하거나 끝맺는 경험, 다들 한번 쯤은 해보셨나요? 저는 엄마 손을 잡고 들어가 서로의 등을 밀어주며 팅팅 불은 손으로 나오던 기억이 납니다. 이젠 코로나19로 인해 목욕탕에 가는 발걸음이 줄어들고,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집집마다 존재하는 포근한 욕실로 인해 그다지 목욕탕의 중요성을 못느끼곤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의 몸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목욕탕을 꺼리기도 하죠.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근대는 유교 문화가 여전히 공존하는 사회였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남과 같이 목욕을 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라는 궁금증이 듭니다. 그리고, 목욕탕은 도대체 왜 생긴걸까요? 우리는 왜 때를 밀게된걸까요?
사실 위생은 19세기 말 한국인에게 생소한 단어였습니다. 일본에서 만들어져 한국에 들어온 새로운 단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위생이란 단어의 어색함은 점차 사라지고, 당시 우리 사회의 중요 주제어로 떠올랐습니다. 위생을 구현한다는 것은 몸이 깨끗해진다는 청결의 의미를 넘어 근대라는 새로운 문명을 수용하고 성취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위생을 위한 공간, 목욕탕의 첫 걸음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치료장소의 역할
1904년 7월 장용준 등의 청원에 의해 설립된 목욕탕은 피부 종기, 궤양 등을 치료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치료를 위해 한약재와 서양의 방향성 약물을 혼합하여 사용하였으며, 목욕탕에서 환자가 질병을 고치지 못하면 침구나 첩약에 의한 한방 치료가 이루어졌는데요. 제국신문 광고에는 한증소가 풍한서습, 요통각기, 감기 체증 있는 사람들에게 효과가 있다는 광고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목욕탕이 일종의 치료소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셈이죠.
위생 개념의 확대
그러다 개항을 통해 우리 땅에 서양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서양인들이 본 한국인은 더러웠고, 냄새가 났다고 합니다. 한국 최초의 의료 선교사로 입국한 알렌의 일기를 통해 1887년 한국인 사절단의 청결과 위생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몸에서 계속 고리타분한 똥냄새가 풍기고 있었고, 그들은 선실에서 끊임없이 줄담배를 피우고 있어서, 이 담배냄새에다, 목욕하지 않은 고린 체취, 똥냄새, 오줌 지린내, 고약한 냄새가 나는 조선 음식 등이 뒤섞여 온통 선실 안은 악취로 가득했다” – 『알렌의 일기』 중
하지만 한국인이 청결을 신경쓰기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조선 사람들의 청결은 지켜야 할 유교 도덕 중 하나였는데요. 헝클어진 머리, 때 낀 얼굴에 옷과 허리띠를 아무렇게나 몸에 걸치는 것은 “검소한 것이 아니라 누추”한 것이라고 칭하며, 자녀가 올바른 차림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부모의 교육도 중요했습니다. 이는 조선이 유교적 차원의 청결을 추구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인의 청결에 대해 언급한 알렌의 일기는 주관적인 서술로 이루어진 기록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에는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이 설립 된 후 1년 만에 제중원의학당이라는 의학교육기관까지 만들어졌습니다. 알렌이 운영하던 제중원이 가지는 의미와 서양의 사상, 관점, 기술 등이 빠르게 전파된 점을 생각해본다면, 서양의 관점에서 본 청결도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확산되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깨끗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청결을 추구했을 것입니다. 나아가 몸을 청결하게 할 공간이 필요했을텐데요. 그 공간이 바로, 목욕탕입니다.
목욕탕에 주목한 사람들은 근대적 개혁을 급진적으로 추구한 개화파였습니다. 박영효는 1888년 고종에게 올린 건백서에 다른 개혁안과 함께 목욕탕 설치를 요청했습니다. 목욕을 “인민들에게 목욕할 수 있는 곳을 만들어 때때로 몸을 닦게 함으로써 더러운 것과 전염병을 면하도록 깨우치는 일” 이라고 표현하며, 큰 문제였던 전염병을 막는 수단으로 여겼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독립신문은 목욕이 청결과 위생을 위한 수단임을 말하며, ‘이틀의 한 번씩’이라는 구체적인 목욕 횟수도 제시했습니다.
목욕의 중요성에 대한 결실
목욕에 대한 강조는 공중목욕탕을 설치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졌습니다. 가정마다 목욕탕 설치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공중목욕탕은 대안이 될 수 있었던 것이죠. 목욕탕은 마을단위 뿐만 아니라 직장이나 학교까지 설치장소가 확대되었습니다. 심지어 노동자 파업 요구조건으로 목욕탕 설치를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목욕의 필요성이 공중목욕탕 설치로 이어지면서 위생과 청결을 위한 목욕문화가 확산되어간 것입니다.
또한 서양 의학이 수용된 이후, 때는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었습니다. 1920년대 신문에서는 ‘때를 씻을뿐아니라 때를 밀었다‘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단순히 때를 씻는 행위를 넘어 적극적으로 미는 문화가 형성되었는데요. 이에 대해 한국인과 일본인의 목욕탕 활용방식은 달랐습니다. 1934년 동아일보의 기사에는 조선인의 목욕탕 사용에 대해 이야기하며, ’제발 청결을 위해 목욕탕 안에서 때를 밀지말라‘는 글이 실려있습니다. 식민지 시기 한국인은 목욕탕 사용에 있어서 차별당했고, 한국인에게 목욕이란 여러 환경으로 인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심지어 공중목욕탕을 설치하는 주요목적도 “조선인을 입욕” 시키자는데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오히려 ’불결한 개인이 모욕을 당하듯이 불결한 민족도 마찬가지 취급을 받는 것‘이라며 우리의 민족성 자체를 욕보이는 상황도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목욕과 문명, 그리고 독립
불결함을 해결할 수 없다면 독립도 불가능하다는 인식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윤치호 일기』에 의하면 “대중목욕탕 하나 운영하지 못하는 우리”가 “독립을 운운할 수 있는 건가”라는 자조적인 비판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결국 불결은 신체적 차원을 넘어 정치적 차원에서도 해결해야 할 대상이 된 것입니다.
목욕 습관을 사회경제적 원인을 넘어 정치적 문제와 연결지어 해석했습니다. 혐오와 모욕을 받기 싫다면, 차별을 극복하고 싶다면, 청결해야 했을 것입니다. 한국인을 불결하게 만드는 것이 때라면 때를 벗기고 밀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목욕은 ’청결‘이라는 주요 의미를 넘어 문명과 개화라는 사고와 연결되게 됩니다. 목욕은 위생을 실천하는 방법이었고, 문명을 성취하는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식민 지배가 더해지면서 우리의 민족적 감정까지 확대되었고, 결국 목욕을 하고 때를 민다는 것은 몸을 씻는 것에서 확장하여, 우리의 진보와 차별을 극복하는 하나의 수단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젠 아파트가 생기고 그곳에 샤워 시설이 들어서면서 많은 가구들이 일상적으로 몸을 씻게되었고, 목욕탕 이용 빈도가 굉장히 많이 줄었습니다. 또한 때를 미는 행위 자체도 예전만큼 많이 행해지진 않습니다. 비누 외에도 바디스크럽제 등 여러 세정용품의 발달도 생활문화의 변화에 영향을 끼치고 있을 듯 합니다. 어쩌면 한국에서도 자연스럽게 때를 미는 문화가 사라져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목욕탕을 찾으면 그곳에는 아직도 이태리 타올로 몸이 벌개질 때까지 몸을 문지르고, 때를 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때를 밀어주는 세신사라는 직업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목욕탕은 이제 하나의 시대과제가 아닌, 힐링과 피로해소의 목적이 커졌습니다. 뜨끈하게 몸을 녹이고, 몸 뿐만 아니라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는 공간이 되기도합니다. 지금처럼 씻는 것을 즐겁게 향유한다면 목욕탕의 존재와 그 안의 문화는 생각보다 오래 갈 수 있지 않을까요? 팅팅 불어터진 손으로 바나나 우유를 손에 들고 나오던 때가 그립습니다. 목욕탕을 그리워하는 분들이 하루 빨리 목욕탕에 다시 갈 수 있는 날이 찾아오길 바랍니다.
글·기획 | 한걸음기자단 8기 정민경
참고자료 |
- 독립신문
- 동아일보
- 윤치호 일기
- 박윤재 (2021). 때를 밀자 ―식민지시기 목욕 문화의 형성과 때에 대한 인식. 역사비평, 360-3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