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76주년 특집
8월 15일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일 것 같습니다. 우선 1945년에는 광복을 맞이했는데요. 광복은 글자 그대로는 ‘빛을 되찾는다’라는 의미이지만, 한국인들에게는 나라를 빼앗긴 상태가 곧 암흑이라는 인식에 대한 대치 관념으로 통해왔습니다. 그러나 꿈에 그리던 독립이었지만, 이는 자력에 의한 해방이 아니었는데요. 그로부터 3년 뒤인 1948년 8월 15일에는 우여곡절 끝에 남한만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됩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혼란스러웠던 그 3년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해방 전부터 해외 각국은 조선의 독립을 협의해왔습니다. 1943년 이집트 카이로 회담에서는 조선을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키는 데 합의했고,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는 일정 기간 조선을 신탁통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왔지요. 1945년 7월 포츠담 회의에서는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는 공동작전을 펴는 것에 합의했습니다. 따라서 일본이 패전하더라도 조선의 독립은 조선인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 38선이 한반도의 분할선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한편, 한국인들은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중심으로 주체적인 건국사업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건준은 미군의 상륙을 앞두고는 한국인을 대표할 기관의 필요성을 느끼며 9월 6일, 조선공산당 주도 아래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조직을 확대 개편했는데요.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의 일차 목적은 점령군으로부터의 정권 이양이었고, 이를 위해 통일전선체 정부를 구성하고자 했습니다. 사진은 1945년 건준에서 제작한 선언문으로, 노동자, 농민 등 ‘근로대중의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 국가 건설’이라는 조선인민공화국의 건국 취지문과 표어, 그리고 이승만, 여운형 등 인민위원과 후보인민위원, 고문의 명단이 실려있습니다.
미소의 분할점령은 정치세력의 분열을 조장했습니다. 일본인 관리들을 상당 기간 그대로 근무하게 하는 등 미군정의 현상유지정책은 친일파가 다시 득세하게 했고, 이에 혼란이 격화되기도 했는데요. 1945년 12월에는 미국·영국·소련이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포함한 의제들을 다룬 모스크바 삼상 회의가 열렸습니다. 당시 신탁통치가 중요 사안이기는 했으나 핵심은 임시정부 수립이었음에도 국내에는 이러한 내용이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고, 이내 국내 주요 정치세력은 각기 상이한 활동을 전개해나갔습니다.
1946년 3월에는 혼란 속에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 내용을 이행하고자 협의하는 자리였으나 미소의 극심한 입장 차에 결국 회의는 성과 없이 그해 5월 종료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은 최초로 단정론을 제기했습니다. 통일 정부의 수립이 여의치 않으니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를 먼저 수립하자는 것이었죠. 이에 대부분 정치세력은 격렬히 반대했습니다. 이승만은 미국이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단정론을 제기한 것이었으나, 당시 미군정은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끝나갈 무렵부터 김규식과 여운형 등 개혁적인 중간파에 힘을 싣고 있는 참이었습니다.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 등은 좌우 연합만이 위기를 돌파할 길이라 생각했지만,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미군정은 좌우합작을 통해 좌익 세력 일부를 끌어들이는 한편 소련의 이북 지역 정책을 지지하던 조선공산당을 배제하고자 했는데요. 탄압 속에 벌어진 조선공산당의 투쟁은 당시 사회를 향한 사람들의 불만과 결합, 9월 총파업으로 이어졌습니다. 좌우합작은 엇갈리는 반응 속에서 미소공동위원회 재개 논의가 유지될 때까지는 이어졌습니다.
1947년 5월 21일 열린 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잘 전개되는 듯했으나 곧 교착상태에 빠졌고, 더불어 냉전이 격화되며 남북 단독정부가 수립될 전망이 가시화되었죠. 결국, 유엔으로 이관된 한반도 문제는 남북총선거가 진행되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선거를 감시할 임시위원단도 구성되었으나 소련은 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했고, 유엔은 소총회에서 “가능한 지역”, 즉 남한에서만의 선거를 재결정했습니다. 이에 김구와 김규식 등은 연합국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조선인 스스로 나서야 한다며 남북지도자회의의 필요성을 제기했습니다.
한편, 38선 이북에서는 소련군의 후원을 받은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국가 수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1948년 1월, 남측의 선거를 위한 임시위원단이 입국하자 분단정부수립 반대세력은 북에 남북지도자회담을 개최하자는 서신을 보냈는데요. 사진은 중앙청 공보부에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을 환영하고자 발행한 포스터로, 덕수궁에서 개최된 회의 사진,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위원단 환영회 사진 등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1948년 4월, 북측 제안으로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에는 남북 각기 단체 대표 545명이 모였습니다. 회의에서는 남한 단독선거를 막고, 외국 군대를 즉시 철수시킨 후 조선인 스스로 정부를 수립하자는 내용의 결정서를 채택했는데요.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의 4김 회담과 15인 지도자 협의회도 열렸습니다. 남북연석회의는 비록 실질적인 변화를 끌어내지는 못했으나, 이념 대립에서 벗어난 주체적·평화적 통일국가수립운동이었습니다.
결국, 유엔 소총회 결정에 따라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1948년 5월 10일 실시하게 되자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한 중도파와 민족주의자들은 선거 참여를 거부했고, 좌익은 반대 투쟁을 전개했는데요. 1948년 4월 3일에는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미군의 즉시 철수 등을 주장하며 무장봉기한 제주민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어린이, 여성, 노인 등이 다수 포함된 마을 주민들에 대한 집단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이승만은 초강경 진압으로 사태를 해결하려 했고, 군 지휘권을 가진 미국은 학살을 방조하거나 묵인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진행된 5.10 선거 결과, 이승만이 소속된 한국민주당은 참패하고 무소속이 대거 당선되었습니다. 무소속 당선자 중에는 이승만과 한민당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지닌 인사들이 대거 포함되었습니다. 이후, 제헌국회는 대한민국을 국호로 정하고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했습니다. 그리고 보통선거제에 의한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한 제헌헌법을 공포했고,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공포되었지요. 북한의 경우, 남한의 선거를 부정하며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이로써 남과 북에 별개의 정부가 수립되며 분단이 현실화된 것이죠.
이처럼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 꿈에 그리던 독립을 맞이했지만, 해방 이후로도 혼란스러운 정국이 펼쳐졌습니다. 김구가 자력으로 얻은 독립이 아니라는 점을 우려했던 것처럼 한반도의 문제는 국제정세와도 계속해서 얽혔는데요. 결국, 3년 후 같은 날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한반도는 분단국가의 운명으로 나아가게 되었지요. 새 출발의 의미가 있는 날이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통일국가만은 지키고자 했던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음은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글·기획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걸음기자단 8기 양여진
참고문헌 |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2017, 『한국사』, 새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