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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한민국역사박물관 Aug 17. 2021

차별없이 누구나 바른 소리를 느낄 수 있도록, 훈맹정음

한글점자 #훈맹정음

지난 6월, 서울 종로에서 한글 금속활자가 출토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한글을 널리 쓰기 위한 활자까지 발견되고 보니 우리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읽는 것의 과정과 함께 글자의 감사함을 느낄 수 있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글을 읽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들은 어떻게 글자를 인식하고 있을까요? 다들 알고계시듯이 ‘점자’를 사용합니다. 음료 캔이나 엘리베이터 등 일상생활의 곳곳에 점자를 배치하기도 하죠. 이러한 점자들은 언제, 어떻게, 누구를 통해서 만들어진걸까요?



(왼) 점자,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 음료 점자, ©롯데 칠성음료



첫 한글점자는 1898년 미 북감리교 선교사인 로제타 홀 여사가 평양에서 맹아학교를 설립하고, 한글점자를 창안하여 교육하였습니다. 또한 교과서와 성경책 등을 출판하여 보급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한글점자는 뉴욕점자인 4점 점자여서 자음의 초성과 종성이 구별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존재했습니다. 이후 1913년, 조선총독부는 제생원 맹아부를 설치하고 일본의 6점 점자를 도입하여 가르쳤습니다. 학생들은 이 6점점자로 인해 기존의 4점점자와 6점점자의 차이를 느낄 수 있게 되었고, 6점 점자를 사용한 학생들은 좀 더 편리한 6점점자로 한글 점자를 제정해야한다는 의견을 내놓기 시작하였습니다. 학생들의 의견에 따르면 기존 한글점자의 경우, 반수 이상의 자모가 두 칸으로 제자되었고 글자가 서로 중복되어 오독가능성이 커진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한글점자를 6점점자로 다시 만들어야한다는 주장에 점점 힘이 실리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왼) 로제타 홀, ©국립국어원 | 평양 맹아 학교 08반 여학생들, ©『KOREA MISSION』(METHODIST EPISCOPAL CHURCH, 1910)



학생들은 당시 제생원 맹아부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박두성 선생을 찾아가 6점 점자로 한글점자를 만들고 싶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박두성 선생은 제자들과 함께 새로운 한글점자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박두성 선생은 그 이전부터 조선어 과목을 폐지하려는 일본인 교사들에게 반문하며 조선어교육을 주장했고, 어려운 일본어로 진행되어 이해에 어려움을 겪는 과목들은 직접 배워 가르치는 등 학생에 대한 애정이 높은 면모들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박두성 선생은 한글점자를 창안하는 것이 일본의 민족 유화책과 한글 말살정책에 반대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맹인들을 위해 결심을 굽히지 않고 한글 점자를 완성시키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왼) 박두성, ©송암박두성기념관 | 제생원 맹아부 학생들과 박두성 선생, ©국립서울맹학교



박두성은 한글점자를 만들기 위해 두 가지 일을 진행하였습니다. 먼저 이전에 존재했던 한글점자를 만든 홀 여사에게 6점점자로 한글점자를 창안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하지만 홀 여사는 기틀이 잡혀가는 점자를 버리고 새로운 점자를 만든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박두성은 홀 여사와의 공동연구를 포기하였습니다. 두 번째로는 제생원 맹아부에 4점점자가 아닌 일본과 같은 6점점자로 한글점자로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건의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인이었던 맹아부의 부장은 조선어의 자모 수가 영어의 알파벳 글자 수와 비슷하니, 영어 알파벳 글자를 그대로 조선어 자모에 적용하여 사용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맹아부 부장의 뜻대로 인쇄된 점자를 본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어 점자를 만든 것 자체’가 일본의 방침과 반대된다며 맹아부 부장은 호된 질책을 받게됩니다. 이후 맹아부 부장은 더 이상 조선어 점자 연구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덕분에 박두성과 제자들이 주변의 눈길을 피해 한글점자를 연구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글점자 초고, ©국립한글박물관



이렇게 만들기 시작한 한글 점자는 ‘배우기 쉬워야 하고’, ‘점자의 수는 적어야 하며’, ‘서로 혼동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는 목표를 중점으로 두었습니다. 1920년부터 한글 점자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여 1921년에 초안을 만들었고, 이를 다듬어 1923년에 완성하였습니다. 이 점자는 자음을 모두 세 점으로, 모음을 모두 두 점으로 제자하여 3·2점자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초성과 종성이 구별되지 않는 결정적인 단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이에 조선어 점자연구 위원들은 새로운 한글 점자를 다시 만들 것을 주장했고, 1923년 말부터 완벽한 한글점자를 위한 여정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훈맹정음, ©국립한글박물관



최종적인 점자가 나오기까지 12개의 안이 제안되었고, 조선어 점자연구위원들은 이 안에 대해 토론하면서 계속하여 연구하였습니다. 박두성은 국어에서 실제로 쓰인 자모의 빈도와 12개 안의 점의 수, 기억하기 쉬운 점자를 기준으로 다시 한번 비교검토 하여 제 11안을 채택해 ‘훈맹정음’ 이라고 이름붙이게 된 것입니다. 1926년 11월 4일에 박두성과 제자들은 훈맹정음 반포식을 거행하였으며, 이 날이 지금까지 이어져 한글점자 기념일이 되었습니다.



(왼) 점자 카드가 담긴 편지 봉투, ©국립한글박물관 | 점자 카드가 담긴 편지 봉투, ©국립한글박물관



훈맹정음이 발표된 후 점자는 빠른 속도로 보급되었습니다. 제생원 맹아부의 재학생과 졸업생들에게도 한글점자를 가르쳐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전국의 맹인들도 사용할 수 있게끔 점자 통신 교육을 활용하였습니다. 제생원 졸업생인 정창규의 집에서 육화사라는 간판을 걸고 지속적으로 점자연구와 교육을 해나간 박두성은 우체국 사서함을 사용하여 통신교육을 통해 점자를 가르쳤으며, 그의 제자들에게 매월 정기통신문을 보내게 하고,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점자를 모르는 사람에게 점자를 가르치라는 지침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박두성의 계획 덕분에 전국의 많은 맹인들이 한글점자를 깨우칠 수 있게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점자 통신교육자료를 받아 읽은 후 박두성과 편지를 할 수 있었으며, 박두성은 거의 모든 질답에 응해주며 맹인들의 세상을 넓혀주는데도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박두성의 점자 통신교육은 전국의 많은 맹인들과의 연락을 통해 제생원의 학생 모집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한글교육의 중심이 되었던 기독교에서도 점자를 활용할 수 있게끔 성경을 점역하였고, 제생원 맹아부를 은퇴한 후에도 계속해서 성경과 일반도서 점역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박두성 67세 즈음 사진, 국립한글박물관



이러한 박두성의 노력으로 인해 맹인들은 한글점자로 책을 읽으며, 새로운 세상을 보았고 꿈을 키워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훈맹정음의 점자가 몇 차례 수정과 보완을 거쳐 현재 우리나라에서 표준으로 삼고 있는 ‘한글 점자 통일안’이 되었는데요. 박두성과 그의 제자들은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을지 헤아리기도 힘들 듯 합니다. 우리의 글자가 있어도 뱉지 못했던 시절, 내일이 두려워 눈 앞이 깜깜했을 시절에도 가슴의 등불을 밝혀주었던 사람들이 존재했기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글을 보고, 읽고,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훈맹정음’의 뜻처럼 누구나 차별없이 바른소리를 배우고, 모두가 어우러진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





글·기획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걸음기자단 8기 정민경

사진출처 | 본문 이미지 하단 표기

참고자료 |

- 임안수 (2008). 한글점자를 창안한 송암 박두성 선생의 생애와 업적. 황해문화, 61, 319-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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