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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한민국역사박물관 Sep 23. 2021

영화 <모가디슈>로 엿보는 우리나라 UN가입의 이야기


코로나19로 한국영화의 침체기가 길었습니다. 그러다 지난 7월, 더운 여름과 함께 찾아온 영화 <모가디슈>가 누적관객수 320만명이 돌파하며 극장가에 활기를 불어넣었는데요. <모가디슈>에 대해 어디까지가 실화고, 어디까지가 픽션인가를 논하는 글을 많이 보셨을겁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나라가 유엔 가입을 위해서 도대체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던 건지 생각해보게 되었는데요. 유엔가입, 우리나라는 과연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을까요? 당시 상황을 영화 <모가디슈>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화 모가디슈 포스터 ©롯데엔터테인먼트



유엔헌장 제2장 제4조
국제연합의 회원국 지위는 이 헌장에 규정된 의무를 수락하고, 이러한 의무를 이행할 능력과 의사가 있다고 기구가 판단하는 그밖의 평화애호국 모두에 개방된다



우리는 왜 아프리카까지 가게된걸까?

우리 정부는 1948년 유엔으로부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은 뒤 1949년 1월 처음으로 유엔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거부권을 갖고 있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소련의 반대로 부결됐습니다. 냉전시대의 쌩쌩부는 찬바람은 유엔가입을 위한 길을 몇 바퀴 더 돌게했죠. 그러다 1970년대에는 유엔에서 남북 간 체제 경쟁이 가장 치열한 시기였습니다. 하나라도 더 많은 국가와 수교하려고 애를 썼고, 한반도 문제와 관련한 사안에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외교전을 벌였습니다. 유엔에서는 국력과 관계없이 모든 회원국이 동등하게 한 표씩 보유하기 때문이었는데요. 그렇게 <모가디슈>의 배경이 영화 속 시대의 우리와 현재의 우리에게도 꽤나 낯선 아프리카 대륙 속 소말리아의 수도인 ‘모가디슈’가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외교노력 어디까지였나?

우리나라는 독립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외교 정책을 꾸준히 펼쳤습니다. 특히 북방외교에 주목해볼만 합니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북방외교를 다져나가겠다는 포부를 밝혔고, 첫 단계는 소련‧중국‧동구권과의 수교였습니다. 한국이 가장 먼저 수교한 국가는 헝가리로, 북방외교의 신호탄을 던졌는데요.



서울 1988 올림픽 ©국제올림픽위원회
영화 <모가디슈> 스틸컷, 88올림픽 개막식 비디오를 들고 있는 림용수 역의 허준호 배우 ©롯데엔터테인먼트

동구권 가운데 헝가리와 가장 먼저 수교한 배경에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있었습니다. 당시 북한의 방해 공작으로,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협조가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헝가리 IOC 위원이었던 팔 슈미트는 서울 올림픽을 지지하고, 인접 동구권 국가에 한국을 이해시키려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1988년 3월 헝가리가 동구권 국가 최초로 서울무역사무소를 설치하였고, 본격적으로 북방외교가 추진된 것이죠. 이후로 북방외교는 점차 발을 넓혀가게 됩니다. 그해 11월 폴란드, 12월 유고슬라비아, 1989년에는 3월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과 외교관계를 수립했습니다. 이렇게 북방외교를 통한 정책이 진전되고, 사회주의 국가들의 변화가 찾아오면서 남과 북의 대화도 시작되기 시작합니다.



투닥투닥 남북한, 어쩌다 동시가입?

한국이 1973년 ‘6.23 선언’으로 남북 동시가입의사를 밝히자, 북한은 동시 가입이 분단을 고착화시키려는 의도라며, 단독 가입이 아닌 한 유엔 가입 반대 입장을 고수해왔습니다. 그리고 북한은 '고려연방공화국'의 국호아래 남북이 단일의석을 갖는 가입안을 주장하였는데요. 남북은 이렇게 서로 유엔 가입에 대해 커다란 입장 차이를 보였습니다.

영화 <모가디슈> 스틸컷, 남북 대사관들의 다툼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북한, 유엔단독가입 노선 철회 만화 「고바우영감」 ©조선일보



그러나 북한의 단독 가입은 국제적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한국이 남북의 유엔 가입 문제에 대해 북한측 입장을 지지했던 소련, 중국 등과의 외교 관계를 확대하여 그들의 지지를 끌어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비동맹국들의 협조를 얻어 유엔 가입이 확실해지자, 국제관계에서의 고립을 우려하여 북한도 입장을 변경하였고, 남북한 동시 가입이 실현되게되었습니다. 1990년 남북 고위급 회담이 두 차례 열렸으며, 1991년 9월에는 제46차 유엔총회에서 남북이 만장일치로 유엔 동시 가입을 승인받게되었습니다 이렇게 남북의 유엔 가입으로 서로 한반도의 유일 합법 정부라고 했던 주장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으며, 서로를 견제하고 날이 서있던 대립관계에서 화해의 장을 더 넓게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각각의 국제적 지위가 향상되고, 남북 관계의 정상화와 대외 관계에서 새로운 발판이 펼쳐졌다고도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1991년 남북한 유엔 가입 확정 후 축하인사를 나누는 남북 대표 Ⓒ 연합뉴스
91년 유엔 동시 가입 후 악수하는 이상옥 외무장관(왼쪽)과 강석주 북한 외교부 제1 부부장. ©중앙포토


바라고 바라던 유엔 가입 이후 한국은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안전 보장 이사회 비상임 이사국에 선출되었고, 캄보디아와 소말리아 등지에 유엔 평화 유지군(PKO)을 파견하기도 했죠. 현재 우리는 정말 유엔 헌장 제2장 제4조에서 말하는 “평화애호국”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1991년 남과 북이 맞잡은 두 손이 무색하게도 현재까지도 남북관계엔 갈등이 빈번합니다. 서로를 잡은 그 손으로 서로를 다시 견제합니다.


끝까지 뒤돌아 보지 못하던 <모가디슈>의 엔딩장면을 기억하시나요? 저는 고개조차도 돌리지 못하고 빳빳하게 안녕을 고해야 했던 순간이 영화의 러닝타임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잔인하다 느껴졌습니다. 과연 우리의 한반도 땅에는 언제쯤 완전한 평화가 찾아올까요? 지금은 이념, 체제, 정치같은 많은 단어들이 서로를 막아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렵게 얻은 평화애호국의 이름인만큼, 만남과 헤어짐에는 자유로이 서로의 안부정도는 나눌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치열하게 평화를 추구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글·기획 | 한걸음기자단 8기 정민경

참고자료 |

- 국가기록원 – 한국과 유엔

- 씨네21 - 류승완 감독이 선택한 '모가디슈' 엔딩에 대하여

- 중앙일보 - 소련이 막은 유엔의 문···한국은 수십년 '셋방살이' 버텼다 [유엔 가입 3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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