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줄 일기 연말 결산
몇 줄만이라도 잘 쓰겠다고 시작했다. 게을렀다. 게으른 뇌는 쉬운 감정과 묵은 지식만 갖고 놀았다. 글은 늘어지고, 생각의 속도가 더뎠다. 어떤 때는 마음대로 길게 썼고, 일기인지 일지인지 구분이 안 갔고, 카테고리 분류도 대충 그렇게 했다. 머릿속에서 생각을 굴리다가 이제 그만 내려놓고 싶을 때, 그제야 가끔 내키는 대로 글을 썼던 것이다.
성과는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됐다. 지난 글을 보니 보였다. 1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어떤 일을 어느 정도 했는지. 나는, 맡은 일을 기한 내에 하려고 애썼다. 갑의 요구를 대체로 수용했다. 일의 질을 통해 신뢰를 쌓고자 했다. 현재의 부당함도 좋은 마음으로 덮어 미래를 꾀하려고 했다. 마감이 빠듯해도 일정을 조정하기보다는 내 수면시간을 줄였다. 감당 못할 일이 들어오면 지인을 동원해서 어떻게든 일을 해결하려 애썼다. 이런 사람이었다. 이렇게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올여름 무척 덥던 날, 면접 보자고 나를 불러 세 시간 동안 개인적인 수다를 늘어놓던, 국어학원 원장이 왜 그랬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원장은 자기소개서를 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고 했다. 원장은 나를 "돈을 적게 주고도 쓸 수 있는 사람"으로 읽었을 것이다. 돈 외에도 중요한 것이 많은 사람, 중요한 걸 위해서라면 돈을 포기하는 사람. 원장 표현대로 "착한 과". 나랑 친해지기만 하면, 돈을 아낄 수 있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날 원장이 서너 번 반복한 질문이 떠올랐다.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는데, 자꾸 물었다. 부군은 무슨 일을 하시느냐. 본인 가족 얘기를 워낙 많이 해서 그런 맥락으로 들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남편 덕으로 먹고살 만한지가 궁금했던 게 아닐까.
위의 원장 같은 사람과 대비되지 않는다면, 사실 나는 그다지 착하지 않다. 흔하고 평범한 을이다. 그러니까, 취미로 일하는 사람이 아니다. 정당하게 일로 관계를 맺고, 그에 합당한 보수를 받고 싶어 하는 을이다. 다만 외주 프리랜서는 을 중의 을이다 보니 사는 게 더 팍팍할 뿐. 올해는 작년보다 일이 많았고, 가정사도 많았다. 그 탓에 종종 두통으로 고생했다. 밤에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을 만큼 심했다. 난생처음 편두통 전문약도 먹었다. 잠을 줄이고 대충 먹으며 운동은 안 하면 병이 온다. 장염과 감기가 주기적으로 왔다. 그러니까, 올해를 평가하자면, 잘한 게 없다. 친구 말처럼, 올해 나는 어리석게도 나에게만 관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 같은 사람을 위해 해마다 달력이 1월부터 다시 시작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