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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주 편집자의 거래처

by 대낮


편집자들 사이에서 AI 관련 이야기가 오갔다. 혹자는 5년 혹자는 2년쯤 남았을 거라고 했다. 우리가 지금처럼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나는 출판계의 보수성을 생각해 더 길게 잡고 있었는데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말 맞춤법을 틀리게 안내한 퍼플렉시티를 질책한 적이 있는데, AI는 틀린 답을 뻔뻔하게 계속 고수했다. 내가 사전에 사용된 용례를 근거로 들이대자 그제야 사과했다. 영어 번역에서는 허점을 지적하자 바로 인정했고, 원문이 애매해서 그랬다면서 내 지적이 예리하다고 나를 칭찬했다.


이런 해프닝 속에서도 두려움을 느낀다. 아무리 좋게 봐도 신입사원 정도로 보이는 이 녀석이 빠른 시간 안에 경력직으로 탈바꿈해 내 자리를 넘볼 것만 같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교정 보는 할머니가 될지 말지 고민했는데, 그 선택권은 벌써 내 손을 떠난 듯하다.


내 거래처는 많지 않은 편이다. 거래처라는 말이 어색하지만 나는 전문(!) 외주 편집자니까. 거래처가 맞다. 거래처에서 주는 일은 비정기적이고 들쑥날쑥하지만 인연들은 꽤 깊다.


거래처 1

첫 직장, 그러니까 잡지사에서 같이 일했던 편집장님이 A 출판사의 주간으로 계신다. 이 분과의 인연은 연락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며 벌써 20년째다. 이 분이 일하는 출판사에서 2년 전부터 청소년책과 소설을 받아 작업하고 있다.


거래처 2

마찬가지로 첫 직장에서 얼마 동안 우리 팀 팀장님이었던 분이 연구소 출판팀에서 근무하고 계신다. 이 분이 일하는 연구소에서 오래전에 단행본 교정을 본 적이 있는데, 이번에 거의 7년 만에 다시 연락이 와서 올해 보고서 교정을 보기로 했다. 귀한 인연들이다. 출판계는 인연이 오래간다. 그 탓에 다들 이 바닥이 더욱 좁다고 느낀다.


거래처 3

이곳은 2017년에 사람인에 올린 내 이력서를 보고 연락을 해왔다. 샘플 원고 작업이 있었고, 계약서를 안 썼다. 첫 작업비를 받기까지 불안했고, 지급일을 넘기고 주말이 되자, 극도로 긴장한 나는 사무실에 찾아가는 길을 검색까지 했다. 부모님 댁에 급하게 다녀오느라 그랬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북에디터에서 읽었던 악덕 출판사 사장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떠올라 괴로웠다. 하지만 다행히 돈은 문제없이 받았다. 전전긍긍하며 못 미더워한 내 태도에 등을 돌린 만도 한데, 몇 년 뒤 갑자기 다시 연락이 왔다. 대표는 서울에서 수원 우리 집 앞 카페까지 직접 찾아와 얼굴을 보여준 뒤 일을 맡겼다. 그 뒤로 지금까지 몇 년째 일이 이어지고 있다.


거래처 4

이사오기 전에 살았던 동네에 있는 홍보물 제작소다. 기획사라고 부르기에도 규모가 작은 듯한데, 지도로만 확인했으니 그저 짐작일 뿐이다. 그때 나는 육아에 전념하면서도 경력이 끊기는 게 두려워 두 가지를 병행할 목적으로 집에서 일정 거리에 있는 여러 곳에 묻지 마 지원서를 넣었다. 여기는 그중 하나였다. 편집자나 기획자를 구한다는 공고가 아니라 디자이너를 찾는다는 공고였는데, "근처에 이런 편집자도 살고 있습니다"라는 의미로 이력서를 보냈다. 그러고 말았는데 5년쯤 뒤? 아니 더 오래됐나? 갑자기 연락이 왔다. 내 이력서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자기 사무실에 편집자가 필요한 일이 들어왔다고 했다. 보고서 교정이었다. 원고 그대로 디자인만 해서 책을 만들어 주는 곳인데 꼭 교정을 부탁하는 기관이 있다고. 그렇게 이곳이 내 거래처가 됐다.


거래처 5

거래처 1에서 같이 일한 편집자가 소개해 줬다. 이 편집자와 책을 진행할 때, 나는 그의 실수에 화가 나 심호흡을 세 번쯤 하고 나서 전화를 걸었다. 지금까지 거래처 1에서 2년 동안 여러 편집자와 작업했지만, 교정 때문에 전화(작업 시 대개 모든 소통을 글자로 한다)를 한 건 이때뿐이다. 내게 온 파일은 두 개였는데 하나는 작가의 원본, 다른 하나는 수정본이었다. 그런데 수정본이 원본보다 못한 게 아닌가! 부적절한 비유와 더 모호해진 표현.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이런, 편집자가 엉터리로 고치다니. 나는 편집자에게 그가 실수한 부분에 대해 침착하게 설명했다. 제발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는 조용히 내 말을 듣더니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그 수정본 역시 작가가 고친 것이라고! 자기가 미처 그 부분을 조율하지 못하고 줘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이 점잖은 편집자를 이때 처음 알게 됐는데, 그는 이 책을 마지막으로 다른 출판사로 이직했다. 그러니까 둘이 같이 작업한 책은 딱 한 권이다. 작업이 끝나고 이직 소식을 전해오긴 했지만 그 뒤로는 서로 연락이 없었다. 얼마 뒤 그는 몇 년 전에 다녔던 다른 출판사에서 같이 일했던 번역가에게 연락을 받았다. 교정볼 사람을 찾고 있다고. 그가 나를 추천해서 벽돌책 번역서 작업을 맡게 됐다.


기타 거래처들

건너 건너 알음알음 단발성 일이 들어오기도 한다. 오래전에 작업했던 곳에서 갑자기 연락이 오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력서가 공개돼 있어서 아주 가끔 새로운 거래처에서 연락이 온다. 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무례한 경우도 많다. 원고도 없이 견적을 묻는다. 실제로 견적 조사가 목적인 경우도 있다. 특이한 건 이런 연락은 처음부터 감이 온다. 그들은 지나칠 만큼 내게 친절하다. 크몽과 숨고에도 가입을 했는데 얼마 전 탈퇴했다. 거기엔 무뢰한들이 많았다.

작년에는 인연도 없는 어느 연구소에서 갑자기 연락이 와서 두 번 일을 하고 작업비도 받았다. 담당자는 내게 지속성까지 약속했는데, 알고 보니 그가 팀도 모르게 내게 일을 맡긴 거였다. 국가 기관에서 이런 일이 가능하다니 황당한데, 직원은 퇴사했고, 상급자는 내게 일을 더 이상 주기 어렵다고 사과가 아닌 통보를 했다. 나는 일을 계속 달라는 말은 하지도 않았기에 불쾌했다. 내가 연락한 이유는 작업비를 못 받았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 담당자와 주고받은 회사 메일을 확인하고 지레 방어하는 듯했다. 일한 작업비를 받긴 했다. 그러나 무례해도 작업비만 주면 그만인 걸까. 이마저도 이 기관의 출판물 관련 비리 기사를 보고, 내가 기관에 연락해서 어렵게 그 상급자와 통화한 거였다.



여러 거래처가 있어도 일감에 주기성이 없다 보니 일은 몰리거나 없거나 한다. 그리고 오래 연락이 없으면 이제는 내 거래처가 아닌가 보다 하는데, 별안간 또 연락이 오기도 한다. AI의 등장이 아니더라도 프리랜서는 하루아침에 백수 되기 딱 좋은 입장인 것이다. 실제로 몇 주 쉬면 월급이 없는 셈. 게다가 내가 편집 일을 시작할 때부터 들은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 출판계는 단군이래 계속 불황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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