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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스물넷의 마음

by 대낮

* 옛 편지




어제 퇴근하고 과음을 했습니다. 옆 팀에서 만들던 잡지가 폐간이 돼서 마지막 호 마감을 마쳤기에 동기들과 소주를 마셨어요. 그 동기들은 앞으로 어떤 인사발령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이랍니다. 퇴사하지는 않겠지만 원치 않는 일들을 하게 되겠죠. 저는 12년간 한 번도 쉰 적 없는 잡지를 맡고 있기에 그런 걱정은 없지만, 그래도 이래저래 마음이 안 좋습니다.

동네에 갔더니 마침 자전거 같이 타는 사람들이 삼겹살을 굽는다며 오라고 하길래 거기도 들렀어요. 또 소주를 마셨습니다. 제게 채워진 소주가 한 병쯤 됐을까, 이어 맥주를 마셨습니다. 오랜만의 술자리라 걱정했는데 도무지 취하지 않았습니다! 자전거 멤버와는 처음 갖는 술자리니 소심한 제가 긴장을 했나 봐요.

만나도 묵묵히 자전거만 탔는데, 그 친구들은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했었는지, '의외로 재밌는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또 무척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 같다 하더군요. 제가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감정적으로 살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에요.

산악자전거를 배우는데 제가 제일 꼴찌입니다. 조용히 페달만 돌려서는 안 되는 일이더라고요. 헬멧에 장갑까지 끼고 안전등을 켠 채 도로에 나서면 이제 조금 주눅이 들기도 합니다. 짐이 될까 봐 주말에 유명산에 오르는 것도 따라가지 않았는데 그들이 무척 부러웠습니다. 산을 오르는 자전거!

술잔을 기울이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직업을 알게 됐는데, 요리사, 건축설계사, 보석세공업 등 짐작하지 못했던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중엔 제 자전거를 조립해 준 사람도 있지요. 그 사람들 표정을 살피고 말소리를 듣는데, 저는 참 지루하게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저 '생각'만으로 이십사 년이나 보낸 건 아닌가 싶으니 조금 허탈했습니다.

제게 산악자전거를 권했던 아홉 살 많은 한 오빠가 제게 그러더군요. 처음엔 몰랐는데 책을 많이 읽어 그런지 어린 나이에도 생각이 깊다고. 편집자라고 하니 그렇게 얘기해 준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도 스스로 '다만 책을 읽은 것뿐이구나, 정작 내 삶은 텅텅 비어 있구나' 싶었습니다.

조용히 읽고 쓰며 흔적 없이 살아가도 괜찮다 여겼었는데, 어젯밤엔 요리도 배우고 싶고 건물도 짓고 싶고 보석도 조탁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면 자전거 끌고 산에 오를 수 있었으면!

새벽이 되어서야 대문에 들어서서 현관문 앞 계단에 한 시간이 넘도록 쭈그려 앉아 있었습니다. 과거도 미래도 가족도 모두 잃어버린 것처럼 외로웠습니다.

술 냄새 가득한 아침, 힘겹게 출근을 하고 아무 일도 못 한 채 멍하니 시간을 보냈습니다. 간간이 울려대는 전화에 깜짝깜짝 놀라면서 말이에요. 이제야 어지럼증과 두통이 멎었고 선배님이 떠올라 줄줄이 적고 있습니다.

타타타타 적고 보니 북한산 도선사에서 자전거 타고 내려오던 밤이 생각나네요. 그쪽은 흙길이 아닌 도로가 있기 때문에 내려서 자전거를 조금 끌고라도 오를 수 있었거든요. 내리막에서 브레이크를 잡아 멈추면 넘어질 위험이 커서 가장 낮은 곳에 이를 때까지 자전거를 멈출 수가 없었어요. 제 생각의 페달질이 더 낮은 곳에 이르기 위한 것이길 바랍니다. 허전하고 외롭더라도.

좀 더 실력을 쌓는다면 내려오는 동안 산의 풍경들도 볼 수 있겠죠. 그냥 내려와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날은 소주 한 컵씩 몸에 채워주면서.

조만간 찾아가야지, 하는데 날짜가 참 쉽게 갑니다.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고, 만나보고 싶은 선배님이 있어서 가끔씩 지친 몸이 충전되곤 합니다. 또 편지할게요.


2004년 10월 6일 (수) 오후 4:58





* 옛 편지를 보고 울컥했다. 젊은 내가 가여워서가 아니라 이 편지를 받아준 사람이 고마워서.

알 수 없는 두려움에, 혹은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무서움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앞길이 구만 리 같은데 애늙은이처럼 구는 스물넷의 주절거림을 듣고 답해 주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메일함에서 이 편지를 다시 읽고는 선배님이 보고 싶어서 좀 울었다. 늦기 전에 찾아야 하는데, 세월의 공백을 깨는 일은 너무나도 묘연하다.


2025년 8월 1일 (금) 오전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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