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 외로울 땐 책을 많이 읽었다. 책이 외로움이기 때문일까(연애할 땐 책 없어도 사는 게 좋더라).
소설도 외로움이고, 시도 외로움이고, 에세이도 외로움이다.
화자와 메시지는 있는데 아직 청자는 없는 모양새라서 그렇다.
얼마 전 오로지오롯이 님 브런치에서 이런 문장을 읽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혼잣말을 오래 이어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사회 과학서나 인문 역사서도 그렇다.
책의 저자는 외롭다. 논리와 지식을 무기로 홀로 자신이 던져 놓은 질문에 맞서는 외로움이다.
그것이 왜 그런지, 어떻게 그런지, 내가 이렇게 설명을 하면 내 이야기를 알아듣겠는가 하며 애쓰는 모습이 보인다.
작가는 혼자 오래 쓰면서도 읽을 사람 계속 생각한다. 글의 완성이 독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모든 글쓰기는 마치 나와 함께 '생각의 계곡'을 산책할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연애편지를 쓰는 일과 같다.
그 편지는 어떤 언어로 써야 할까.
경력 많은 편집자는 연애편지깨나 고쳐본 사람들이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숱하게 고치다 보니 외로움도 외로움으로 읽히지 않고, 내밀한 고백도 흔한 레퍼토리로 보일 때가 많다. 아, 맞춤법이나 맞게 써줬으면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이렇게 쓰면 작가님 뜻이 전달되기 어려워요 한다. 독자들 연애 꽤 해본 사람들이에요, 이걸로는 부족해요 한다.
그런데 오늘 야초툰님 인터뷰 질문지 답변을 메일로 받고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태솔로 독자도 있는 거 아닐까. 풋사랑에 울고 웃는 독자도 있는 거 아닐까. 문학판의 언어, 편집자의 언어가 아니라 독자의 언어로 말하는 작가도 있는 거지.
야초툰 작가는 서른여섯 살에 처음 책을 읽었고, 마흔 살에 책을 냈다고 한다. 그전에는 글이며 책의 매력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첫 작품이 무려 장편소설이고, 출판사에 메일로 투고해 출간했다! 인스타툰을 잘 그려 팔로워도 만 명이 넘는데, 왜? 어쩌다? 소설을 쓰는 걸까. 내일 야초툰 작가를 만나 인터뷰하기로 했다. 꼬치꼬치 물어봐야겠다(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