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눈, 읽는 눈, 뽑는 눈ㅡ1편
편집자의 채택원고
월간 잡지 편집자로 일할 때, 며칠에 걸쳐 수십 통의 편지를 읽곤 했다. 독자 사연이 많이 실리는 잡지였다. 첫 달엔 손글씨 편지를 읽는 일에 낭만을 느꼈다. 엄마가 정성껏 부쳐 갓 말아 낸 달걀말이를 식사 전에 한 입 먹어볼 때의 들뜬 마음 같달까.
달마다 같은 일이 반복되니, 이것이 내 '일'이구나 싶으니, 나는 원고를 읽어 내는 시간을 신경 써야 했다. 원고 읽다 야근하고, 글쓴이의 의도에 어긋나지 않게 편집을 하느라 말 그대로 글자 하나하나와 눈싸움을 했다.
읽기 어려운 글도 많았다. 의식의 흐름대로 퇴고 없이 쓴 글을 읽노라면, 일방적인 전개에 요즘 말로 귀에서 피가 나는 느낌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편집자였던 나는 남 사는 이야기보다는 글 잘 쓰는 사람에게 더 관심이 갔다. 애타는 사연보다 그럴싸한 문장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 시절 독자가 응모한 글을 수없이 읽고 고르고 교정 보긴 했지만, 그 사연을 제대로 읽어냈다고는 자신할 수 없었다. 책에 실릴 만한 그럴듯하고 좀 더 완결된 형태의 원고를 고르는 데 더 애를 썼을 수도 있다. 그래야 윤문 교정 교열이 수월하니까. 또 일반 독자는 글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으니, 일차적 사고에서 바로 감동이나 교훈을 주는 글이 더 낫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 작업이 신입인 나에게 전적으로 맡겨진 일은 아니었다. 당시 편집장님은 같이 일하면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꼼꼼하고 섬세한 분이셨다. 어린 나는 흉내도 내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부분을 고려해서 일을 진행하셨다. 내가 일차로 고른 원고들 중에 잡지에 실을 최종 원고를 선정하는 사람은 편집장님이었다.
하루는 내게 독자의 손글씨 원고를 한 편 주면서 채택된 원고라고 하셨다.
?
편집장님이 내가 미채택원고 모음에 넣어둔 원고를 다시 꺼내온 것이다!
이 원고 확실히 기억난다. 내가 판단하기에는 쓰다만 원고 같았다. 그래서 미채택 한 건데.... 이걸 채택한다면 마무리 두세 문장은 새로 써서 붙여 마무리하고 실어야 하는 걸까, 싶었다. 그렇게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조금은 불편한 마음으로 원고를 다시 읽었다.
부끄러웠다.
나는 뭐가 그렇게 급해서 이 글의 핵심을 놓쳤을까.
다시 보니 글은 그 상태로 완결성이 있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원고의 전체 줄거리 내용은 확실히 기억이 안 나지만, 끝 부분은 기억난다. 엄마 아빠의 부부싸움을 목격한 어린 시절에 대해 성인이 된 자녀가 쓴 내용이었다.
아빠는 화내는 사람이고 엄마는 줄곧 참는 사람이었다. 아빠와 싸운 뒤에도 엄마는 집안일을 하기 위해 주방에 가서 불에 냄비를 올렸다. 엄마를 뒤에서 바라본 내 눈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양은냄비가 보였다. 냄비는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커서도 엄마를 보면 줄곧 그 냄비가 생각났다.
초보 편집자 눈에는 빨간 냄비가 그냥 냄비였나 보다. 원고를 읽어내지 못했다. 냄비 속 마음을 아는 독자에게는 뻔히 보였을 것이고 더 쓰지 않아도 충분했다. 기억이 안 나 대략 적었더니, 지금은 잡지에 실렸던 것만큼의 감흥이 없지만, 줄도 바르지 않고 삐뚤한 손글씨를 타이핑으로 옮기고 보니 그 원고는 문장도 충분히 훌륭했다.
엄마가 바보 같아서 참는 줄 알았는데, 엄마는 엄청난 인내로 가정을 지키고 있었다. 빨간 냄비를 보며 엄마의 심리에 공감했고, 세월이 흘러서까지 그 냄비를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부연 문단을 붙였다면 오히려 감정선이 무뎌지고 김이 빠져버렸을 것 같다.
원고를 보이는 대로 보는 눈과 쓴 사람의 마음을 읽어 내는 눈과 최종 원고로 선정하는 눈은 결국 한 사람의 눈이다. 세 관점이 하나가 될 때, 능숙한 편집자가 되는 게 아닐까. 그 많은 미채택 원고 중에서도 이 글을 다시 골라온 편집장님처럼.
너 왜 이걸 빠뜨렸니 다그치거나, 다시 잘 읽어보라는 꾸중도 없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