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가을
프라하에 5년 가까이 들락거리면서도 한 번도 프라하 얘기를 하지 못했다
재림이가 귀국한지도 10개월이 되어간다 매번 루지네 공항을 떠나오며 느꼈던 가슴 아린 이별의 슬픔도 이제는 조금씩 무디어져 간다.
재림이 에게는 참 춥고 힘들었을 프라하
부산예고를 졸업하고 바로 떠난 그 유학길에서 아이는 어떤 마음으로 비행기를 탔을까 비록 본인이 원해서 떠난 유학길이었지만 잘해서 떠난 것이 아니라 주눅 들고 힘든 마음에서 출발한 유학길이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심란했을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저려온다
프라하 6구역 우리가 살던 마르틴 씨 댁 3층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있어 햇살이 따뜻하고 밝은 집이었다. 비좁은 나선형 계단을 힘들게 통과해 가져다 놓은 피아노와 프라하 6구역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거실과 침실에서 주님의 주권으로 우리는 분수에 넘치는 이 아름다운 집에서 1년을 사는 행운을 누렸다
비록 재림이 에게는 마을버스와 트램을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불편한 환경이었지만 프라하 만 가면 대중교통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는 그 불편한 환경도 신기하고 즐거웠다.
마을버스를 타기 위해 걸어가던 오솔길
하얀색 나무 울타리 담장의 집들을 보며 그 안에 피어있는 꽃들과 나무들을 보며 기웃거리며 걷다 보면 버스 시간을 놓쳐서 그다음 버스 시간까지 또 한참을 기다리곤 했다.
마을 게시판에 붙어 있는 작은 포스터를 읽으며 무슨 내용인지 당최 몰라 궁금하고 궁금해서 그림과 내가 아는 체코어 단어를 총동원해서 의미를 유추하기도 했다
기껏 내용을 파악해서 재림이 에게 자랑스럽게 알려주면 재림이가 웃으면서 전혀 다른 내용을 얘기할 때마다 그놈의 체코어가 왜 그리 원망스럽던지...
마을 끝 버스 정류장 바로 못 미쳐 우리가 즐겨 멈춰 서서 늘 잠깐의 시간을 보내던 집이 있었다. 별로 멋있는 집은 아니었지만 소박한 담장과 장미가 예쁜 그 집에 귀여운 강아지가 한 마리 살고 있었다 매번 우리만 보면 달려와서 담장 곁에 붙어서 꼬리를 흔들고 온갖 재롱을 다 피웠다.
개를 무서워하는 나도 그 강아지는 얼마나 귀엽던지 매번 강아지랑 놀다가 버스를 놓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짖지도 않고 우리를 반겨주던 귀여운 강아지....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에서 친구도 없이 조금은 외로웠던 나에게 아무런 거부감 없이 그냥 다가오는 그 강아지가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다시 프라하를 간다면 꼭 그 집의 주인과 차를 한 잔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그 귀여운 강아지와 동네를 산책하며 한 나절을 보내고 싶다 가끔씩 정원을 가꾸는 주인 내외와 눈이 마주치면 짧은 체코어로 도브리덴을 남발하며 연신 눈웃음을 날렸는데 그 작은 강아지가 매번 창피한 줄도 모르고 엉터리 발음으로 용감하게 인사를 하도록 우리를 부추겼다
프라하 6구역 가장 높은 지대에 있던 우리 동네
전직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의 생가가 있던 그 마을에서 우리는 흔치 않은 동양인으로서 첼로를 메고 마을길을 돌아다녔다. 자존심 강한 프라하 사람들에게서 그나마 따뜻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들고 다닌 첼로의 영향이 컸으리라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인지라 첼로를 메고 가는 우리를 보면 유독 따뜻한 관심을 보이곤 했다. 오죽했으면 동양인만 보면 여권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경찰관도 우리가 첼로를 메고 걸어가면 씩 미소 짓고 무사통과였으니 말이다
토요일마다 데스코에 가서 장을 봐서 돌아올 때면 두세 번씩 버스와 트램을 갈아타서 힘들기도 했지만 일주일치 식량을 사다 냉장고를 가득 채워놓고 흐뭇한 마음으로 재림이랑 끓여먹던 라면 맛을 지금도 기억한다. 한국에서는 잘 먹지도 않던 라면이었지만 체코에서 한국 음식이 그리울 때마다 가장 손쉽게 맛볼 수 있는 한국음식이 라면이었으니 느끼한 체코 음식으로 속이 거북할 때마다 라면은 우리의 고향이었고 향수를 달래주는 고마운 친구 같은 음식이었다.
어느 주말 오후 재림이와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찾아낸 작은 카페... 그곳에서 흑맥주 한잔과 윙을 먹으며 좋은 곳을 찾아냈다고 좋아하던 우리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해가 지고 블타바 강가에 하나씩 가로등이 켜질 때마다 왠지 모를 심란함과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던 어스름한 저녁...
그 길을 다시 돌아 집으로 오던 그 저녁이 가끔씩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