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디 알프스에 가다
어둠 속에서 말똥말똥 생각 속을 헤매고 다니는 사이 드디어 동이 터왔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아침을 간단히 먹고 우린 드디어 체르마트로 가는 기차를 탔다. 날씨는 차가웠고 난 모자가 없어 급하게 모자를 하나 살까 하고 역사에 있는 상점에서 모자 가격들을 보았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꼭 마음에 드는 것도 없어서 그냥 가기로 했다. 언니는 아침에 호텔에서 준 커피가 맛이 없다며 3프랑을 주고 커피를 한잔 사 왔다.
체르마트로 가는 기차는 스키시즌이라 사람들이 제법 많이 탔다. 작은 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스키복을 입고 스키를 타러 가는 사람들을 보며 부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이 험악한 산악지대에 살려면 스키 타기는 필수라 한다. 스키 마니아나 여유 있는 사람들이 스키를 탈뿐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필수로 타야 한다는 얘기를 들으니 내가 과연 하이디가 살았던 알프스에 온 것이 실감이 되었다.
테쉬에서 체르마트까지는 10여분쯤 가니 금방 도착했다. 체르마트 역에서 광장으로 나가니 전기차로 불리는 작은 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곳은 청정 자연지역을 보존하기 위해 자동차가 없다고 했다. 알프스 산맥의 구릉지대에 푹 둘러싸인 체르마트는 아직도 잠에서 덜 깬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마태 호른을 보러 가기 전 체르마트에서 오전 시간을 보내고 점심을 먹은 후 등반열차를 타기로 되어 있어서 체르마트 시가지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작고 아담한 체르마트는 옛날과 현대가 어우러져 잘 보존되어 있었다. 시가지의 끝 쪽에 있는 성당에서 바라보는 마태 호른의 모습은 벌써부터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작은 시가지를 돌며 그곳의 모습들을 사진 속에 담았다. 자유시간이 좀 주어져서 우린 쿱에도 들어갔다. 이곳의 치즈 가격은 정말 쌌다. 그뤼에르에서 산 똑같은 치즈가 2프랑 밖에 하지 않아 더 사고 싶었지만 그것도 짐이 될 것 같아 알프스에 올라가서 먹을 초콜릿만 샀다.
쿱에서 아이쇼핑을 하는 사이 금 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점심으로 나온 닭다리 구이와 야채는 제법 맛있었다. 여기서도 정식 퐁듀는 아니었지만 불에 녹인 치즈가 야채를 찍어 먹을 수 있게 나와서 아주 든든히 배를 채우고 우린 드디어 고르너그라트로 올라가는 등반 열차를 탔다. 드디어 알프스 산속으로 가는 것이다. 체르마트를 떠난 열차는 천천히 알프스를 향해 달렸다. 열차가 산속으로 올라 갈수록 펼쳐지는 대자연의 모습 하얀 설경에 쌓여있는 알프스는 그 자태를 드러내며 연신 우리의 함성과 감탄사를 연발하게 했다.
마침내 어느 지점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한 마태 호른...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만큼 그 자태를 드러내 보인 마태 호른은 한 시간 가까이 등반열차의 각도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곤 했다. 그 와중에도 기차는 두세 번 산골 마을에 정차했다. 어떻게 저런 곳에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은 깊은 산골짜기에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걸 보며 왜 이곳 사람들이 아이나 여자나 노인이나 할 것 없이 스키복을 입고 기차를 탔는지 이해도 됐다.
작은 마을 역사에 내린 사람들은 스키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 아니라 그 마을 주민들이었다. 하얀 눈에 뒤덮여 있는 산골짜기의 마을들... 역에서 내려 마을로 내려가는 큰 길도 없이 아슬아슬 산허리 오솔길을 타고 걸어 내려가는 사람들을 보며 이 등반열차가 우리에겐 관광 열차지만 저분들에게는 유일한 교통수단이구나 생각하니 이 험악한 산악지대에 사는 사람들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테쉬에서 호텔 주인장 할아버지가 커피를 자유롭게 마시게 두지 않고 딱 한잔씩만 부어주시던 것이 야박한 인심이 아니라 그만큼 물자를 공수하기가 힘든 환경에서 검소와 절약이 몸에 밴 생활방식이었음이 공감되어 왔다.
작은 마을에서 스키 객들과 마을 주민을 내려주기를 두어 번 한 등반 열차는 막바지 고지를 향하여 우리를 데리고 올라갔다. 끝도 없이 펼쳐진 알프스의 대자연은 참으로 사람의 마음을 겸허하게도 감동을 하게도 하며 우리를 황홀하게 했다. 기차에서 내려다본 알프스의 설경과 산골짜기 사이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들 그 사이로 간간이 보여주는 마태 호른은 우리 모두를 하이디가 되게 했다. 산등성이 어디쯤 하이디와 피터가 달려올 것 같은 알프스의 정경들을 보여주며 기차는 드디어 고르너그라트 정상으로 우리를 데려다주었다.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는 이번 패키지 여행객 분들이 다들 삼대는 덕을 쌓고 오신 것 같다며 자기도 이곳을 네 번이나 여행객을 모시고 왔지만 이렇게 선명한 마태 호른의 모습은 처음 본다며 우리 앞에 오신 팀들은 날씨가 안 좋아 아예 산에 올라올 수도 없었고 체르마트 역에서 마태 호른 사진을 배경으로 인증 샷만 찍고 갔다고 했다. 겨울에 스위스가 이렇게 맑고 따뜻한 날씨가 정말 잘 없고 원래 2월이 우기라 눈비도 많이 오고 춥고 황량한데 우린 공항에 도착한 날 저녁에 잠깐 비가 내린 것 빼고는 그다음 날부터 계속 맑고 화창한 날씨가 계속되어 너무나 선명한 스위스를 계속 보고 다녔고 날씨까지 따뜻해 정말 관광하기에 너무 좋은 환경이었다. 가이드는 여행 내내 이번 팀은 삼대가 아닌 사대가 덕을 쌓은 것 같다며 덕담을 했다. 우린 그때까지만 해도 스위스의 겨울 날씨는 원래 이렇게 평온한 것인 줄 알았다
. 등반 열차에서 내려 드디어 알프스의 한 봉우리에 올라온 우리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하얀 설 경위로 펼쳐진 알프스의 봉우리들과 그 가운데 우뚝 자태를 드러내 놓고 있는 마태 호른... 공기는 또 얼마나 청정했는지... 이 척박한 환경에서도 사람들이 도시로 가지 않고 수대를 산골 마을에 살아가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사방이 알프스의 봉우리들과 하얀 눈밭인 산 위에 서니 새삼 우리의 존재가 작고 미약하게 느껴졌다. 이 대자연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늘 아등바등 거리며 살아가던 우리의 모습도 이곳에서 잠시 내려놓고 대자연의 품에서 안식하며 고요히 나를 들여다보게 했다.
전망대 카페에서 바라본 마태 호른의 모습은 또 달랐다. 그곳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부리는 여유... 이걸 사치라 해도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가끔씩은 우리가 살던 지구에서 떠나와서 새로운 나를 보는 것도 참으로 좋은 것 같다.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는 나를 웃음 지으며 바라다보았다.
이제 돌아가면 무얼 하고 살아야 하는지 또 남은 인생을 어떻게 가치 있게 살아야 할지 이런 것들을 생각한 게 아니라 다만 대자연의 품에 나를 맡기고 그 시간을 오롯이 즐겼다. 아마 함께 하이디가 되어 올라간 사람들도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각자의 자리에서 다 크고 작은 인생의 상처와 고통의 무늬들이 하나씩 그려져 있을 사람들... 유럽 일주가 아닌 오로지 스위스 일주를 택해서 온 사람들에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들 알프스를 보기 위해 왔다는 것.. 유럽의 아기자기한 도시와 예쁜 풍경도 좋지만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는 알프스의 봉우리들을 보기 위해 떠나온 사람들...
그래서인지 이번 여행객들은 다들 너무나 좋으신 분들이었다. 목소리 한번 크게 내시는 분도 없고 버스 좌석도 첫날 앉아 왔던 그 자리에 끝까지 앉아 갈 정도로 조용하신 분들이었다. 호텔의 불편한 점들을 생각하면 한 번쯤 언짢은 소리를 하는 분들도 계실 텐데 여행이 다 끝나기까지 한 번도 큰소리 내는 분 없이 우린 즐겁게 함께 여행을 다녔다. 아마 가는 곳마다 보이는 대자연의 모습에 저절로 마음이 겸허해졌을까..
물론 항상 일행들을 챙기고 따뜻이 배려하는 프린세스 가족들과 순천에서 온 오누이 대학생들, 울산에서 온 엄마와 딸, 일산에서 온 시형이네 다양한 분들이 서로 배려하고 다닌 덕분이기도 하리라.
그 알프스는 우리 모두를 어린 날의 하이디로 만들었다. 눈을 뭉쳐 던지기도 하고 눈밭에 뒹굴어도 보고 뛰놀고 시끄럽게 해도 그 알프스는 묵묵히 우리에게 그 자리를 내어 주었다.
마태 호른!
석양에 더 눈부신 자태를 보여주며 알프스는 시간을 정지한 채로 우리를 끝없이 품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