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의 노래

알프스의 노래

by 박민희



초등학교 5학년 때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를 읽었다. 원래 책을 워낙 좋아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지만 내가 어릴 때 우리 집 가정 형편은 보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여유는 없었다. 삼대가 함께 살았던 대가족 속에서 하루 한 끼 밥을 챙겨 먹는 것도 그때는 전쟁이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고모들 큰아버지네 가족들이 위채에 살고 아래채에 딸부자인 우리 가족과 사랑방엔 외할머니와 막내 외삼촌까지 같이 살았으니 어찌 보면 4대가 한집에 같이 산 것이다.



오후가 되면 우리 집 마루에선 할머니와 엄마 큰엄마와 고모들이 둘러앉아 칼국수를 만들기 위해 밀가루를 치대고 방망이로 미는 소리가 요란하곤 했다. 콩가루를 넣어 만든 칼국수는 가마솥에 끓여 우리 식구뿐 아니라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까지 마당에 펴놓은 멍석에 앉아 다 함께 앉아 먹었다. 그 대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우리 집엔 내가 보고 싶은 동화책을 때 맞춰 사 줄 수 형편이 아니어서 나는 동네의 언니 집들을 다니며 책을 빌려다 읽었다.



특히 포도밭 집의 백경 언니 네는 서울에서 이사 와서 집도 포도원 앞에 예쁘게 신식으로 짓고 부엌에서 수돗물도 나오는 최신식 집이었다. 언니네 집에 한번 놀러 가서 언니의 방에 있는 세계 위인전집을 비롯해 벽면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책들을 보며 내게 꿈같은 그 방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그 언니의 책장에서 빌려다 본 수많은 책들은 늘 내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했다. 책을 빌려 읽을 때마다 혹시 책에 뭐가 묻을까 봐 조심조심하며 본 동화책들.. 그 많은 책들을 언니의 엄마는 내가 다 본다고 백경 언니에게 핀잔 반 푸념 반을 하시곤 했다


. 우리 집도 대식구에 농사가 많아 학교에 갔다 오면 어린 동생을 봐야 하고 밭에 가서 어른들을 도와 심부름도 해야 해서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볼 수 있는 처지만은 못되었다. 틈틈이 언니네에서 책을 보다 다 읽지 못하고 집으로 와야 할 때면 그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언니 집에 놀러 갈 핑계만 찾기도 했다. 내가 너무 책을 좋아하니 어느 날 언니가 내게 한 권의 책을 선물했는데 그 책이 바로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다. 아버지가 보시던 법률 책과 고모들이 보던 몇 권의 소설책 그리고 언니가 사 보던 어깨동무라는 월간지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내 책이 생긴 것이다



그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를 수십 번을 읽었다. 나중에 하도 읽어 책이 닳아 너덜너덜 해지도록 하이디는 내 어린 날의 친구였다. 그 하이디를 얼마나 만나 보고 싶었는지... 알프스의 산봉우리와 알므 할아버지가 살던 오두막.. 알프스의 별들이 총총히 보이는 큰 창이 있는 다락방. 건초더미 위에 담요를 깔고 별을 보며 잠든 하이디를 내려다보고 있는 큰 전나무들... 그 사이로 들려오는 바람소리... 난 날마다 하이디와 함께 알프스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 책을 하도 많이 읽어 동생을 업고 재울 때도 내 입에선 하이디의 얘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어릴 때 동생들은 내가 해주는 하이디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으며 잠들곤 했다. 그렇게 내 어린 날을 함께 했던 하이디와 알프스는 어른이 되어서도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내가 얼마나 하이디와 알프스를 좋아했으면 러시아로 유학을 갈 때 같이 같던 한 교수님은 날보고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같다고 했다. 내게서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보인다며 어이없는 농담을 했지만 좋아하면 닮아간다고 하지 않았는가? 난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하이디를 사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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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알프스를 50이 넘어왔다. 이제 소녀도 아니고 대학생도 아니고 중년의 아줌마가 되어 알프스에 왔어도 이 알프스 앞에서 오늘 나는 여전히 어린 날의 하이디다. 하이디가 살았을만한 산허리의 소박한 집들.. 불에 구운 치즈를 녹여 빵 위에 얹어 막 짜낸 우유와 함께 먹는 소박한 저녁식사를 생각하며 난 어린 날의 하이디가 되어 알프스의 노래를 하고 있다.



눈 덮인 알프스... 평생에 여기에 몇 번이나 다시 올 수 있을까? 체르마트에서 일주일만 머물면서 날마다 알프스에 오르고 싶다. 등반열차를 타고 매일 알프스에 올라 중간에 작은 마을들에 내려 그곳 주민들과 얘기도 나누고 싶고 염치없이 그들의 집에 들어가 딱딱한 빵 위에 불에 녹인 치즈 한 덩이를 올린 소박한 식사를 대접받고도 싶다. 겨울의 알프스... 너무나 매혹적이다.


그런데 이 알프스를 봄에 또 오고 싶다. 그때 이 알프스는 어떤 모습일까? 에델바이스가 곳곳에 수줍게 피어있는, 작은 야생화들 속에 고개 내밀고 있는 에델바이스를 찾으며 이 산을 올라와보고 싶다. 양치기 소년 피터가 불러주는 요들송을 들을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푸르름이 가득한 구릉과 알프스의 봉우리들을 보며 이 대자연속에서 그분의 섭리를 만나고 싶다. 하이디처럼 예쁜 마음씨를 가지고 알므 할아버지에게도 사랑을 전하고 싶다. 알프스에서 만난 사람들.. 척박한 자연 안에서 자연과 함께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알프스를 닮은 하이디와 알므 할아버지를 오늘 여기서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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