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나는 조금만 과로하면 편도가 부어 고생하곤 했었다. 또 축농증도 심해서 늘 엄마의 근심거리였다. 목에는 늘 무엇이 걸려 있는 것처럼 이물감이 느껴졌고 뜨끔뜨끔 아팠다.
삼대가 함께 살아 조용할 날이 없었던 우리 집은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아버지는 동네 청년들을 지도하기도 하셔서 우리 집엔 항상 손님이 많았고, 또 가끔씩 청년들과 산에서 멧돼지를 잡아와 동네 어른들을 모시고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저녁마다 우리 집에서 끓여 먹는 칼국수는 꼭 몇 분의 동네 아줌마나 아저씨들이 같이 드셨다. 밤에는 마당에 깔아 놓은 멍석 위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모깃불을 피워 놓고 감자나 옥수수를 삶아 먹으며 여름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어린 날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난 멍석 위에서 잠들 때가 많았다. 분명히 자기 전엔 마당에 깔아 놓은 멍석 위에 누워 있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면 방 안에 누워 있었다. 엄마에게 물어보면 빙그레 웃으시며 도깨비가 와서 데려다 놓았지 하시곤 했다. 늘 복닥거리던 대식구 안에서 넉넉하진 않지만 사랑과 정이 있는 시골 인심 속에서 내 어린 날은 행복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갑자기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과수원에서 나무에 올라가 가지치기를 하다가 떨어져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생각보다 빨리 회복되지 못하셨다. 처음엔 단순히 허리를 다친 줄 알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살이 빠지고 황달이 와서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다. 그런데 뜻밖에 간경화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에 엄마는 그때부터 간경화에 좋다는 약을 구해 사방으로 다니셨다.
그렇게 온 식구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1년 가까이 투병생활을 하시던 아버지는 막내 동생이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결국 돌아가셨다. 어느 날 오후 수업시간, 갑자기 바로 밑에 동생이 교실로 찾아와서 담임 선생님께 울면서 뭐라고 얘기를 했다. 잠시 후 선생님은 나를 교실 밖으로 불러내시더니 꼭 안아 주시고는, 아버지가 방금 돌아가셨다고 빨리 집으로 가 보라고 하셨다.
죽음이 뭔지 잘 알지도 못하던 나이….
난 동생과 함께 황급히 집으로 와서 동네 어른들 가운데 누워 계신 아버지를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슬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난 자전거를 타고 이웃 마을에 있는 친척 집에 아버지의 부고를 전하러 갔다. 일 년 가까이 아버지는 투병생활을 하시며 너무 고통스러워하셨다. 나중엔 복수가 차고 뼈만 남은 앙상한 모습이어서 가끔은 아버지의 모습이 무섭기도 했었다. 그 사이 고모들도 시집을 가고 큰아버지 식구는 대구로 분가를 하셔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갑자기 우리 집은 너무나 썰렁해졌다.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가진 돈을 거의 다 써 버린 후, 딸 6명과 함께 남겨진 엄마는 우릴 먹여 살리기 위해 정말 온갖 고생을 다 하셨다. 간혹 자다가 눈을 떠 보면 엄마가 머리맡에서 성경책을 펴놓고 울며 기도하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어둠 속에서 몰래 소리 죽여 울곤 했다. 가끔씩 엄마가 일거리를 찾아 타 지역에 가서 한동안 집을 비우면 다시 돌아오실 때까지 우린 멀건 김치죽만 끓여 먹기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할머니는 혼자 많이 우셨다고 한다.
그 와중에 나는 편도선염과 축농증 상태가 날로 심각해져 결국 김천 도립병원에서 4시간이라는 긴 수술을 받아야 했다. 담당 의사는 수술이 끝난 후, 같이 수술실에 들어간 의료진들을 위해 맥주를 사 오셨다고 한다. 너무 힘든 수술이어서 보호자가 인사를 해야 하는데, 우리의 사는 형편을 눈치챈 의사 선생님은 엄마 대신 본인의 돈으로, 같이 수술실에 들어갔던 의료진들에게 접대한 것이다. 후에 엄마는 두고두고 그 얘기를 하시며 그 후에 그 담당 선생님을 찾아뵙고 인사드리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그 병원에 계시지 않았다고 송구스러워하셨다.
그렇게 골골거리며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집을 떠나 혼자 부산으로 오게 되었다. 몸이 약하던 내가 공부를 하기 위해 객지로 나갈 때 엄마는 숙희네 엄마 집에 가셔서 많이 우셨다고 한다. 형편이 넉넉지 못해 혼자 학비를 벌어서 생활해야 하는 나를 보내며 가슴 아파하셨다. 콩 두 말을 팔아서 부산 가는 차비와 약간의 돈을 마련해 주신 엄마와 어린 동생들을 두고, 난 낯선 타향을 향해 기차를 타고 친구와 함께 집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