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의 노래
하이델베르크
밤새 뒤척이며 어둠 속에서 거의 뜬 눈으로 잠 못 이룬 나는 새벽이 되어서야 잠깐 잠이 들었다. 그 사이 언니가 일어나서 씻고 짐을 챙기는 소리에 눈을 뜨니 새벽 5시, 나도 얼른 일어나 씻고 짐을 챙겼다. 아무래도 날씨가 심상치가 않다. 대한항공 홈페이지엔 오늘 한국으로 가는 비행 편이 결항이 될지도 모른다고 공지가 올라오고 유럽의 거의 모든 항공사들이 강한 비바람으로 무더기 결항사태가 예상된다고 했다. 조식을 먹으려고 레스토랑에 내려가 창가에 앉았는데 바람소리가 요란했다. 비바람과 강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조식을 먹고 호텔방에 올라와 짐을 챙긴 후 버스를 타러 나가는데 비바람이 너무 거세어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다. 바람에 떠밀리다시피 걸어가 겨우 버스에 올라탔다.
폴란드 기사님은 폴란드엔 악천후로 공항이 폐쇄되었고 유럽 많은 나라의 공항도 무더기 결항이 속출한다며 자기도 오늘 폴란드로 일곱 시간 차를 몰고 돌아가야 하는데 날씨 때문에 걱정이라고 했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면서 여행 잘하고 한국 못 가는 거 아닌지 서서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자리에 앉아 여행의 마지막 일정까지 무사히 지켜 주시고 축복하시길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 다른 일행들도 한 팀씩 올라타면서 걱정스러운 얘기들을 많이 했다. 제일 중요한 건 오늘 대한항공이 뜰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아직 결항에 대한 정식 문자가 없었기에 일단 우리는 날씨가 좋아지길 간절히 바라면서 마지막 여정인 하이델베르크로 향했다. 일주일간 너무 좋은 날씨에 여행을 다녀 이게 유럽 날씨라고 착각한 우리에게 가이드는 오늘 이 날씨가 겨울 유럽의 일반적인 날씨라며 너무 놀라지 말라며 삼대가 덕을 쌓은 팀이니 끝까지 날씨가 우리 편인지 한 번 보자며 농담을 했다. 버스 안에서 바라본 독일의 시가지는 비바람 대문에 왠지 스산하고 황량했다. 바람이 너무 불어 그 큰 버스가 흔들려 기사님도 최대한 조심해서 운전하길 한 시간, 슈투트가르트를 벗어난 버스는 어느새 해가 비치고 바람이 멈춘 맑은 겨울 날씨인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비가 그치니 독일의 풍경도 아름답게 바뀌고 있었다.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을 때는 약간 바람이 불긴 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이 정도 날씨면 비행기가 결항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안심하며 하이델베르크 고성 투어를 시작했다. 가이드는 정말 이 팀은 끝까지 날씨가 도와준다며 우리를 복이 많은 여행팀이라고 했다. 하이델베르크는 깨끗하고 밝은 도시였다. 옛날 고성이 있는 언덕 위에 올라가 시내 전망을 보며 사진을 찍었다.
스위스에서 알프스를 보고 온지라 가슴은 별로 콩닥거리지 않았지만 독일의 대학도시인 하이델베르크도 유럽의 다른 도시들처럼 강이 흐르는 양옆으로 마을들이 형성되어 나란히 마주 보며 그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있었다. 특이하게 이곳도 프라하처럼 지붕이 다 빨간 지붕이어서 꼭 프라하에 와 있는 착각도 순간 들었다. 독일의 검은색 목조건물과 달리 이곳의 건물들은 다 빨간 지붕이어서 도시 전체가 밝고 화사하게 보였다. 바람이 좀 불어 춥긴 했지만 옛 고성 위에서 바라보는 하이델베르크 시가지는 아름다웠다. 아직 겨울이라 황량한 겨울 풍경에도 빨간 지붕의 도시는 전체적으로 밝고 정겨웠다.
고성을 내려와 시내로 가서 강물 위에 걸쳐 있는 다리를 걸을 때는 바람이 많이 불어 입고 간 패딩에 달린 모자를 고등학생처럼 푹 눌러쓰고 다녔다. 짧은 하이델베르크 시내투어를 마친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유럽에서의 마지막 식사다. 우린 이 식당에서 처음으로 여행사의 다른 패키지 팀과 마주쳤다. 우리가 먼저 식당에 도착해서 앉아 있는데 갑자기 시끌시끌 동양인이 들어오기에 처음엔 중국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한국의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단체로 연수차 독일 여행을 온 것이었다. 이 팀은 들어올 때부터 시끄럽더니 식사하는 내내 시끄러웠다. 우리 팀이 얼마나 조용한 분들이었는지 새삼 비교되는 장면이었다.
이날 우리 메뉴는 생선과 크로켓이 나왔는데 이 팀은 함박스테이크와 감자튀김이었다. 그런데 생선요리가 너무 우리 입에 맞지 않아 거의 식사를 하지 못했다. 생선을 튀긴 게 아니라 그냥 쪄서 크로켓이랑 주는데 정말 입에 맞지 않았다. 게다가 빵도 딱 숫자에 맞게 나와서 시형인 빵만 먹고 거의 식사를 하지 못했다. 저쪽 팀은 맥주에 뜨거운 불판에 지글거리는 함박스테이크와 감자튀김을 먹는데 많이 비교가 되었다. 조용한 우리 팀과 달리 그 팀은 너무 시끄러워서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우리 팀의 일행들이 음식 가격표를 보고 있었다. 사실 대부분 식사를 거의 못한지라 분명 한두 사람은 볼멘소리가 나오겠구나 생각했는데 다들 아무 말이 없이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새삼 우리 팀 분들이 얼마나 조용한 분들인지 느끼는 순간이었다.
식사 때 얼굴을 비추지도 않던 가이드는 버스에 타고야 얼굴을 나타내서 식사 맛있게 했냐며 생선 요리가 우리 입에는 좀 안 맞았을 거라며 독일 요리가 그러려니 생각하라고 했다. 그리고 공항으로 가기 전 마지막 쇼핑센터에 갈 텐데 엄청 긴 시간을 쇼핑할 물건에 대한 안내의 말을 했다. 아마 이번 여행 중 가장 많은 말을 한 것 같았다. 물건에 대한 홍보를 하는데 얼마나 유창하게 말하는지 처음으로 가이드가 이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나 싶어 혼자 속으로 웃었다. 공항으로 가는 한 시간 내내 쇼핑할 물건을 홍보해서 머리가 조금 아플 즈음 다행히 차는 공항 면세점에 도착했다. 독일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그렇게 쇼핑센터에서 끝났다
언니와 나는 작은 독일 칼과 볼펜, 탈취 비누를 샀다. 아마 우리가 가장 적게 산 것 같았다. 애초에 여행이 목적이고 가지고 간 돈도 거의 없는지라 우린 각자 산 물건 값이 5만 원도 채 되지 않았다. 가이드가 목이 아프도록 홍보를 했는지라 너무 적게 사서 가이드에겐 조금 미안했지만 우린 꼭 필요한 물건만 샀다.
쇼핑을 마치고 나온 우리는 드디어 폴란드 기사님과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가이드가 가지고 온 라면 같은 게 남아 있으면 기사님께 드리면 좋아한다고 미리 얘기해서 나는 어젯밤 호텔에서 챙겨 놓은 커다란 선물 가방에 한국에서 가지고 간 장갑과 마스크, 라면 등과 스위스에서 산 초콜릿과 오렌지 주스 그리고 작은 선물을 미리 챙겨 놓았다. 여행 내내 밝고 환한 미소로 우리를 반겨 주었고 정말 운전을 잘해 주셔서 편하게 여행을 다녀 꼭 인사를 하고 싶었다.
버스에서 캐리어를 다 내려 주고 출발하려는 기사님께 맨 마지막에 서 있다가 짧게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선물가방을 전해 드렸다. 제법 묵직한 선물 가방을 받으며 기사 아저씨는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내가 편안한 여행을 하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다시 말씀드렸더니 정말 고맙다며 환하게 웃으셨다. 기사 아저씨의 밝은 웃음을 보며 가벼운 마음으로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비가 조금씩 내리기는 했지만 바람은 많이 불지 않아 폴란드까지 무사히 잘 가시길 바란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은 검소한 독일인의 모습을 많이 닮았다. 이제 수속하고 들어가면 스위스 일주 여행도 막을 내린다. 대한항공 수속 장소에 가니 사람이 굉장히 많다. 아마 거의 만석인 것 같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한국인이 갑자기 나타나는지 올 때처럼 중간 자리가 비어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들 많이 피곤하고 힘든 표정들이다. 아쉬움과 섭섭함이 교차한다. 다 같이 앉아 차라도 한잔 마시며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은데 결국 하지 못했다. 앉을자리도 별로 없어 서서 한 시간 가까이 대기하다가 수속을 마치고 각자 안으로 다 들어가서 헤어졌다. 아… 올 때처럼 갈 때는 결국 다 각자 돌아가는구나….
짧았지만 한 가족이 되어 같이 여행한 모든 분들께 감사와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안녕 스위스, 안녕 알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