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새암 <<내 어머니의 샘>>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하던 내게도 어려운 시절이 찾아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생활비를 벌며 공부해야 했던 나는 과로와 영양실조로 인해 자주 아프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달려온 몇 년간의 객지 생활은 내게 작은 흔적들을 남겼다. 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전전긍긍해야 했고, 자취방의 월세도 매달 큰 부담이었다. 주위의 친구들은 부모님의 공급 아래 학교를 다니며 캠퍼스 생활을 누렸지만, 나는 매월 알바를 해서 시골에 계신 엄마와 동생들에게 생활비를 조금이라도 보태 드리기 위해 과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이 언니는 시집을 가고, 엄마 혼자 동생들과 할머니를 모시고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항상 힘들었다. 명절에 시골집에 다녀오면 며칠씩 마음의 병을 앓아야 했다. 동생들은 내가 다시 부산으로 내려올 때면 마을 입구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와 울면서 가지 말라고 했다. 어린 동생들에게 작은 용돈을 쥐어 주고 부산으로 올 때면 내 호주머니는 거의 빈털터리였고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어느 때는 다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엄마와 동생들을 위해 일을 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느라 날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마음의 짐과 생활의 압력으로 많이 지친 나는 어느 날 드디어 쓰러지고 말았다. 여름방학 때 레슨이 이어지지 않아, 생활비를 아끼느라 하루에 빵 하나로 버티며 살아가는 날이 많았다. 영주동에서 수정동까지 산복도로 백 계단을 서너 번씩 오르락내리락하며 학습지를 배달하던 나는 더위를 먹어 어지럽고 빙빙 돌아서 길거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함께 학습지를 돌리던 후배의 도움으로 자취방에 돌아왔지만 며칠을 앓아누웠다. 후배는 내 자취방에 와서 아무것도 먹을 게 없는 것을 보고 가지고 있던 비상금을 털어 쌀과 반찬을 몰래 사놓고 갔다.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었던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교회 목사님과 친구들의 걱정을 받으며 부산 생활을 잠시 뒤로 하고 고향 집으로 갔다. 레슨이 없어 월세를 내기도 힘들었고 학습지를 배달해서 받는 돈으론 생활비도 충당하기 힘들었다. 몇 년간의 객지 생활은 아직 과정 중이라, 겉으로 보기엔 아무 성과도 없이 몸만 상한 채로 돌아온 나는 엄마와 동생들에게 미안했고 면목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엄마는 아무 걱정 말라며 당분간 집에서 푹 쉬라고 엄명을 내렸다.
시골집에 돌아온 나는 혼자 고생하시는 엄마를 보며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 사이 많이 자란 동생들과 오랜만에 함께 지내게 되었다. 동생들을 돌보며 집안일을 하고 시골 교회도 나가며 가족과 함께 보내는 몇 달은 참 행복했다. 저녁이면 두부 한 모를 넣어 끓인 된장찌개 하나로 온 식구가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고 동생들의 숙제와 공부를 봐주기도 하며 객지에서 지친 몸을 조금씩 회복하고 있었다. 동생들과 함께 산 그 기간은 내게 가족의 소중함과 사랑을 느끼게 해 주었고 객지 생활에 지친 나를 치료해 주는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몇 달 후 조금씩 건강을 회복한 나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서 음악 학원에 강사로 취직했다. 내 생활은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 작지만 규칙적인 수입이 있어서 방세를 밀리지 않고 낼 수 있었고 조금씩이나마 엄마에게 돈도 보내 드릴 수 있었다. 또 결혼한 언니가 형부의 직장 때문에 잠시 부산으로 이사를 와서 가까이 살며 늘 챙겨 주어 훨씬 덜 외로웠다. 쉬는 날이면 언니는 나를 집으로 불러 맛있는 요리를 해 주곤 했다. 아기를 가져서 배가 불렀을 때도 가끔씩 나를 위해 삼계탕 같은 것들을 만들어 자취방까지 직접 가져다주곤 했다. 2년 뒤 언니는 다시 김천으로 이사 갔지만 언니와 함께했던 시간은 나를 향한 주님의 또 다른 위로와 공급하심이었다.
그 후 결혼하기 전 난 다시 한번 동생들과 엄마와 함께 살아보고 싶었지만 결국 그러지 못한 채 결혼하고 말았다. 그래도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된 동생들은 방학이 되면 부산의 우리 집에 와서 며칠씩 머물다 가곤 했다. 한꺼번에 몰려와 신혼집이 꽉 찼지만 시끌벅적했던 내 어린 날의 우리 집이 다시 찾아온 것 같아 기뻤다. 바닷가 바로 옆에 살아 생선과 해물이 풍부해서 동생들이 좋아하는 해물탕을 가득 끓여서 주면 함께 앉아 떠들고 웃으며 먹곤 했다. 그럴 때면 객지에서 떨어져 같이 살지 못한 시간들이 다시 돌아와 우리의 애잔했던 추억들을 다시 돌려주곤 했다.
그 후로도 동생들은 내게 무슨 일이 있거나 일손이 필요할 때면 우르르 내려와서 도와주고 같이 시간을 보내 주다 가곤 했다. 가족이란 그런 것 같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힘들 때 곁에 있어 주는 것……. 가난했지만 우리 자매들은 유난히 우애가 깊었다. 동생들은 옷 하나도 서로 물려받아 입으면서 자랐지만 엄마의 사랑은 항상 우리를 따뜻한 가족으로 묶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