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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없는치료

갯새암 <<내 어머니의 샘>>

by 박민희


어찌 되었든, 우린 호텔 같은 병실에서 다른 모든 일을 제쳐두고 오랜만에 휴식을 취했다. 아침저녁으로 진료를 보거나 치료를 받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딱히 할 일도 없어서 아이를 안고 산책을 하고 몰래 병원을 빠져나와 칼국수도 사 먹었다. 근처 공원에서 놀다가 회진을 돌 시간이 되면 숨바꼭질하듯이 병실에 와 있곤 했다 병원에서도 아이를 데리고 있는 우리 처지를 아는지라 특별히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우리도 조용히 말썽 피우지 않고 다녔기에 열흘 동안 별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입원해서 집중 치료 후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드디어 퇴원하는 날…. 교수님은 한 달분의 약을 지어 주시며 매달 병원에 와서 피검사를 받고 약을 처방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물론 약은 평생 먹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어마어마한 가짓수의 약 보따리를 들고 부산으로 다시 내려가는 길…. 서울을 떠나기 전 우리는 63 빌딩에 잠깐 들렀다. 전망대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다가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앙상한 몸에 금붕어처럼 튀어나온 눈… 퉁퉁 부은 목…. 곧 쓰러질 것 같은 몸으로 아이를 안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서글펐다. 아픈 몸으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 현실로 돌아가는 것이 내게는 너무 버거웠다. 부산으로 내려오며 나는 약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른 대안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서울에서 본 갑상선 환자들도 몇 년씩 약을 먹으며 유지만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약을 먹어 낫겠다는 게 아니라 약을 안 먹으면 큰일 난다는 생각만 다들 가지고 있었다. 약을 언제부터 먹었는지 물어보면, 다들 몇 년째 복용하고 있다며 젊은 새댁이 어쩌다 이 병에 걸렸냐고 안타까워했다. 게다가 이구동성으로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고 얘기했다. 그분들은 오랫동안 약을 먹었는데도 다들 나처럼 목이 붓고 눈이 튀어나오며 손을 떨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약으로는 결코 이 병이 낫지 않겠다는 생각에 실망감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걸 느꼈다.



부산에 내려와서 난 갑상선에 관한 민간요법의 책들을 찾아서 읽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여러 책들을 읽고, 케일이 갑상선에 좋다는 어느 정도의 일치된 결론을 찾은 후 아침마다 케일에 제철 과일을 갈아서 녹즙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그 몇 달간, 난 35㎏도 채 나가지 않는 앙상한 몸으로 늘 소파에 누워 있었다. 아이에게 우유를 줘야 하는데, 돌아누울 힘이 없어 아이를 굶긴 적도 몇 번 있었다. 집안은 늘 엉망이었고, 그걸 바라보면서도 제때 치울 수 없어 스트레스였다. 아이는 한참 엄마 손을 필요로 하는데 잘 먹지 못하고 늘 기운이 없어 아이에게 미안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이가 낯을 가리지 않아 가끔 사택의 엄마들이 아이를 데리고 가서 봐 주곤 해서, 밀린 집안일을 하며 쉬기도 했다.



회사 사택이란 곳이 살아가는 게 비슷하고, 또 다 한 가족 같아서 아플 때 참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같은 부서에 근무하던 가족들이 많이 돌봐 주셨다. 가끔씩 집에 오셔서 청소도 해 주시고 반찬도 가져다주셨다. 어떨 때는 너무 기운이 없어 아이를 데리고 방문하면, 몇 시간씩 돌봐 주시고 푹 자라고 안방을 내어 주셨다. 그땐 우리가 부서에서 제일 막내여서 사택의 다른 가족들이 더 예뻐하고 챙겨 주신 것 같다.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었다.


식이요법을 시작하면서 약은 먹지 않았다. 약으로 인한 부작용이 너무 많았기에 약을 포기하고 케일과 과일을 갈아 마시며 몸 상태를 보기로 했다. 케일과 과일을 갈아먹기 시작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갈 무렵부터 다행히 조금씩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입맛이 돌아오고 소화 기능도 좋아지면서 식사량이 조금씩 늘었다. 가끔 구토를 하기도 하고 몸져누울 때도 있었지만, 조금씩 기운을 회복하며 살도 붙기 시작했다.


처음엔 정기 진료를 받으러 혼자 서울까지 가는 게 힘들어 매번 남편이 휴가를 내어 가족이 다 같이 가야 했다. 그러나 점점 몸이 회복되어 나중에는 혼자서 아이를 데리고 기차를 타고 서울을 갔다. 또 매월 처방받는 약의 개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교수님은 약을 잘 챙겨 먹어 치료효과가 빠르다고 칭찬하셨다. 물론 교수님께 약을 안 먹는다는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대신 약을 차곡차곡 잘 보관해 두었다. 차츰 손이 떨리고 두근대는 증상이 없어졌으며 튀어나온 눈과 부은 목이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물론 몸무게는 여전히 40㎏을 넘지 못했지만 다른 모든 증상들이 좋아지고 있었다. 혼자서 아이를 데리고 서울에 올라가는 발걸음이 점점 가벼워졌다.


케일을 갈아먹기 시작한 지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박사님은 다시는 이 병으로 병원에 올 일이 없겠다며 완치를 축하해 주셨다. 갑상선 기능 항진증이 완치가 되기가 참 힘든데 일 년 동안 정말 열심히 약을 복용하고 치료를 잘 따라와 주었다고 말씀하셨다. 또 일 년 가까이 엄마랑 같이 병원에 따라온 재림이에게 “너도 고생 많았다”라며 과자를 사 주셨다. 당뇨환자도 같이 보셔서 환자들이 넘치도록 대기하는 바쁜 진료일정에서도 부산에서 올라간 우리를 교수님은 항상 다독이고 배려해 주셨다.


그날 병원을 나오기 전 마지막이라 배웅 나오신 교수님께 난 조용히 감사하다는 인사 끝에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사실은 약을 전혀 먹지 않았다고….

약을 먹으면 소화가 안 되고 온종일 멍하니 너무 무력해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다른 갑상선 환자들을 보니 평생 약을 먹어야 하는 것이 너무 힘들 것 같아 약을 먹지 않고 민간요법을 병행했다고 양해를 구했다.


교수님은 깜짝 놀라시며 약을 안 먹고 도대체 뭘 먹었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몇 권의 책을 읽어 본 후 케일에 과일을 넣어 일 년간 갈아먹었다고 말씀드렸다. 케일과 과일을 갈아먹으면서 식욕이 돌아오고 살도 조금씩 붙으며 불편한 증상들이 사라져 갔다고 말씀드렸다. 교수님은 케일이 어떻게 갑상선 치료에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봐야겠지만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약을 먹지 않아 죄송하다고 말씀드린 후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씩 부산에서 교수님 뵈러 와서 피검사도 매달 받고 다른 지시는 다 잘 따라 했다고 말씀드렸다. 교수님은 놀라워하시면서도 아직 젊기에 가능한 일인 것 같다며 기왕에 시작한 것 앞으로도 꾸준히 관리하고 일 년 뒤에 한 번 더 와서 피검사해 보자고 하셨다. 그리고 그때 가져갔던 약을 들고 와 보라고 하셨다. 교수님 눈으로 확인해 봐야 할 것 같다며 웃음을 지으셨다. 그렇게 완치 판정을 받고 그 후로도 계속 케일과 과일을 아침마다 한 잔씩 갈아 마셨다.


일 년 후 다시 교수님을 찾아뵈었을 땐 몸무게도 정상으로 돌아와 43㎏의 예쁜 몸매에 얼굴도 통통하니 살이 붙어 교수님은 이제 정말 다시는 볼 일이 없겠다며 기뻐해 주셨다. 그 후로도 교수님은 역학조사 차 부산에 오실 때면 내게 전화하셔서 내 상태를 확인하시고 만나고 가셨다. 권위 있는 의사 선생님이셨지만 막혀 있지 않고 참 열린 분이셨다. 그땐 철이 없어서 식사도 한 번 제대로 대접해 드리지 못하고 감사한 마음도 다 표현하지 못했다. 교수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참 위험한 상항이 올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 우리 마을에 오셔서 나를 보시고 서울로 불러 치료해 주셨다. 또 약을 먹지 않고 민간요법을 행한 나를 혼내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지지해 주시고 완치하기까지 격려해 주신 교수님께 오늘 이 지면을 통해서나마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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